쓸쓸한 봄날 / 박정만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 앉아서
노방(路傍)에 피는 꽃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적셨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몸을 다 주었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청옥 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녘에서는
풍문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이제 날 저물고
팔이 짧아 내 품에 드는 것도
부피 없고 무게 없고 다 지친 것뿐.
가슴의 애도 제물에 삭고
긴 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은 지나갔어라.
빈 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삼아
잔주름 풀어가는 강물을 본다.
철없는 봄 / 박정만
뉘도 모를 무덤가에 홀로 앉아서
저홀로 피었다 저홀로 사라져 갈
무심한 푸새것의 꽃 하나를 바라봅니다.
한눈팔듯 한눈팔듯 무심히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한 줄기 쪽빛 바람이 불고
문득 제풀에 떨어지는 꽃잎 하나가
허리 굽은 목숨의 등성잇길로 등성잇길로
내 가슴 싶은 골에 십리허(十里虛)를 놓고 갑니다.
터무니 없는 소문처럼 놀이 번지고
가는귀 먹은 듯이 밤이 밀리면
우리 모두 풀꽃처럼 시들은 얼굴을 하고
제자리 걸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덧없이 잦아드는 햇발 아래
내 목숨 첫머리에 앉혀놓고 떠난 그대여,
지금은 짝귀 달린 제비꽃도 잠이 들 시간
장명등(長明燈)에 떼밀리는 어둠 속으로
푸새것의 꽃 하나가 꿈결같이 떠나갑니다.
그대가 무심히 떨구고 간 철없는 봄날의
잃어버린 초록의 손수건처럼 손수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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