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 홍윤숙
사랑아
늙지 않아 죽어도 늙지 않아
서러운 사랑아
이천년을 살아도
검은 머리 청청한
머리 풀어 산발하고
벌판을 달리는 젊은 사랑아
이따금
내 가슴 깊은 곳에
몰래 문 열고 들어와
여름바다의 파도로 몰려와
무성영화 시대의
활동사진 틀어 놓고
에덴 동산의
보라빛 도라지꽃
도라지꽃도 피워 놓고
이슬비에 젖은 사월의 새벽길을
수만번 넘어지며 무릎 깨는
사랑아
철없이 늙지 않아
늙지 않아 서러운 사랑아
이천년도 더 산
방부제에 절인 사랑아
나는 죽고
너는 살아
고향의 사과밭
사과나무 가지에
칭얼대는 한 주름 바람으로나
가서 살아라
잉잉대며 날으는 꿀벌로나 살아라
가끔 가끔
돌아보며 생각하는
나는 시방 눈도 없이 캄캄한 타관의 밤이다
이별 / 홍윤숙
그날 떠날 때
내 가슴 반은 무너지고
남은 가슴 반에 그대를 묻었으니
나는 그대의 집이노라
살아서는 멀리 헤어져 서로 떠돌고
한구석 문고리 잠겼던 마음
죽어서 남김없이 다 풀어놓았으니
무시로 빈 가슴 문 열고 들어와 편히 쉬어라
그 산골짜기 외진 길 및 굽이 돌아가면
그대 먼저 가서 터 닦아 세운 집
우리 생애 마지막 집 한 채 거기 있으니
내 희망 또한 거기 가 쉬리라
무너진 가슴 반은 이미 그 곳에 가 있으니
이별 1 / 홍윤숙
가야 한다고
가서 젊음의 황야를 갈아야 한다고
미명의 문을 따고 너는 떠났다
분홍빛 발톱 채 굳지도 않은
등에 한 자루 무거운 열망을 지고
지구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그날 출발은 지체없이 뜀박질로 오고
이별은 한 순간에 눈썹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십년 아시아의 대도시 수도 서울엔
팔월 삼복에도 눈이 내렸다
충견처럼 기다리는 그 지붕 밑 다락방엔
열리지 않는 녹슨 빗장 하나
스물 다섯 해 잠자던 네 따뜻한 창가에선
수국빛 추억 만발하고
스치면 구석구석 종소리 울리는
기억의 계단에선
먼 일기장의 까만 낙서들이
춤추는 인형처럼 튀어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쥐똥나무 그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작은 발자욱들, 작은 목소리들,
때없이 내리는 빗발이 되고
때없이 울리는 악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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