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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와의 연애 / 강해림
허무라는 말은 참 허무 맹랑하다
내 혀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동안
세상은 텅 빈집이 되어 버리고
문 꽁꽁 걸게 해 놓고
오로지 당신 품 안에서만 놀게 하고
그래서 좋았다
우린 만나면 늘 진지했다
치 떨리는 외로움으로
손안에 들어오면 놓아 버리고 싶고 앙탈하고 싶었으므로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래서 좋았다
가끔 내게 디오니소스의 술통이 동이 나도록 취해 보자고
한 살림 차리자고 농을 걸긴 했는데
어디 그가 남기고 간 자리만한 넓고 텅 빈
우주 공간이 있던가
그가 주는 것이라면 독주라도 달게 마실 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이별주도 없이 내 곁은 떠났을 때도
죽을 만큼 아팠지만
그래서 좋았다
세상에 헛 것 아닌 거 있냐고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래도 가끔 그가 그립다
꽃 / 강해림
지상의 모든 길들은 초행길입니다
내 순결한 혈흔이 찍히기 전까지는
세상은 바지랑대 길이만큼의 길만 내게 보여주셨으므로
감히 허공의 길 넘보게 되었을까요
벼랑 끝, 발을 헛디뎠을 때의 아찔함
순간의 어떤 섬광 하나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난 주저하지 않고
허공인 몸의 길 따라 줄기를 뻗었답니다
사지를 친친 감으며 더듬어갈 때
몸속 깊은 곳에서 어둠의 수액이 퐁퐁 솟아나오고
흰빛, 자주빛, 붉은빛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내 안의 묵음(默音)들
눈물까지 찔끔거릴 뻔했지만
기쁨은 언제나
아침이슬처럼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거라고
말을 내뱉듯
까맣게 잘 여문 씨앗 하나
툭, 떨어져
환한 소리, 외길로 떼구르 굴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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