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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봄의 약속 / 마종기

by kimeunjoo 2011. 4. 13.

 

 

 

 

 

봄의 약속 / 마종기

 

 

지난밤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갔었지?

산도 하나 넘고

배 저어 강도 하나 건너서

인연과 고통이 같은 것이라는

어려운 푯말만 읽고 헤어졌던가.

 

떠나가는 길에서 혼자가 되어

혹 연인에 취해 긴 잠이 들면

괜찮아,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지구의 가슴까지 이미 간 것을,

기다림과 황야가 같다는 것을,

누가 아니라 한들 섭섭해하랴.

 

살수록 추워지는 도시에 가도

긴 유언이 되어 움츠리지 않겠다.

내 뼈는 아직 너를 떠나지 않았다.

봄이 현란한 목소리로 웃고 있는 사이,

나이 든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고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 약속이 도착한다.

 

 

 

꽃밭에서 / 마종기

 

이제부터 나는

짧게 살겠다.

밤사이 거센 비바람 속에

휘어지고 눕혀진 굴종.

난초과 꽃가지나 풀꽃 쑥부쟁이,

누가 말해준 것일까

한낮이 되기도 전에

꼿꼿이 다시 일어서는 힘.

길도 잘 모르는 힘의 밑동이

모든 것 안고 또 감싸 안고

뜰을 뒤지며 따뜻해지네.

 

구차하지만 다 끝나기 전에

길게는 말고 한 십 년쯤 후,

그래도 내 지상의 어느 날 중에

당신에게 머리 숙이고 몰입하겠다.

가뭄이 와도 기죽지 않고

몇 광년의 속도가 세상을 보아도

몸은 바닥을 뒤집으며

그늘을 일으켜 세우고

변방의 속살까지 부추기면서

수줍음 한 송이 진 자리에

흰 꽃씨를 몇 개씩 내가 심겠다.

 

 

 

쓸쓸한 물 / 마종기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 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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