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약속 / 마종기
지난밤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갔었지?
산도 하나 넘고
배 저어 강도 하나 건너서
인연과 고통이 같은 것이라는
어려운 푯말만 읽고 헤어졌던가.
떠나가는 길에서 혼자가 되어
혹 연인에 취해 긴 잠이 들면
괜찮아,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지구의 가슴까지 이미 간 것을,
기다림과 황야가 같다는 것을,
누가 아니라 한들 섭섭해하랴.
살수록 추워지는 도시에 가도
긴 유언이 되어 움츠리지 않겠다.
내 뼈는 아직 너를 떠나지 않았다.
봄이 현란한 목소리로 웃고 있는 사이,
나이 든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고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 약속이 도착한다.
꽃밭에서 / 마종기
이제부터 나는
짧게 살겠다.
밤사이 거센 비바람 속에
휘어지고 눕혀진 굴종.
난초과 꽃가지나 풀꽃 쑥부쟁이,
누가 말해준 것일까
한낮이 되기도 전에
꼿꼿이 다시 일어서는 힘.
길도 잘 모르는 힘의 밑동이
모든 것 안고 또 감싸 안고
뜰을 뒤지며 따뜻해지네.
구차하지만 다 끝나기 전에
길게는 말고 한 십 년쯤 후,
그래도 내 지상의 어느 날 중에
당신에게 머리 숙이고 몰입하겠다.
가뭄이 와도 기죽지 않고
몇 광년의 속도가 세상을 보아도
몸은 바닥을 뒤집으며
그늘을 일으켜 세우고
변방의 속살까지 부추기면서
수줍음 한 송이 진 자리에
흰 꽃씨를 몇 개씩 내가 심겠다.
쓸쓸한 물 / 마종기
불꽃은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움직이는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불꽃이 그림으로 완성된
안정된 세상의 쓸쓸함
내 고통의 대부분은
그 쓸쓸한 물이다
나는 때때로
그날을 생각한다
순결의 물을 두 손에 받들고
다가오던 발소리의 떨림
가득 찬 물소리에
나는 몸을 씻고 싶었다
떨지 않는 물은 단지
젖어 있는
무게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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