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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다시 미친 사랑에게 - 김왕노

by kimeunjoo 2012. 8. 19.

 

 

다시 미친 사랑에게 / 김왕노

 

 

미친 사랑이여 네가 미쳐서 내게 올 때 피해 버린 사랑이여

난 미친 사랑을 위해 발에 밟히는 질경이 한 포기

미친 사랑에게 걷어차이는 개 한 마리

미친 사랑을 적시는 봄 비 한 번 된 적이 없다.

 

난 몸뚱어리가 긴 욕망의 아나콘다거나

내 것을 아끼거나 내 사랑에만 미쳐 갔을 뿐

내 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를 아파했을 뿐

내 신발에 지걱거리는 여름의 긴 장마를 원망했을 뿐

 

미친 사랑이여 이제는 더 미칠 수도 없는 늙어버린 사랑이여

치욕적 치욕적이게도

네 사랑이 미쳐갈 때 함께 미치지 못한 둔한 가슴

네 사랑이 미쳐갈 때 네 미친 손 잡아주지 못한 나의 손

네 사랑이 미쳐갈 때

미친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지 못한 나의 마음

 

네 사랑이 미쳐서 날 뛸 때 나도 미쳐 날뛸까봐 경계하며

네 영혼의 푸른 이파리 내게 닿을까 두려워했다.

네 삶의 그늘 속으로

내 하루가 잠겨 들까 미친 사랑 멀리로 돌아다녔다. 비굴했다.

 

- 2010년 시와 경계 가을호 -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 김왕노

 

이별이나 상처가 생겼을 때는 백년이 참 지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쓰린 몸에 감각에 눈물에 스쳐가는 세월이 무심하다 생각했습니다.

백년 산다는 것은

백년의 고통뿐이라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상처고 아픔이고 슬픔이고 다 벗어버리고

어둠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축복이라 했습니다.

밑둥치 물에 빠뜨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엉거주춤 죽어지내듯 사는 주산지 왕 버들 같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고부터 백년은 너무 짧다 생각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익히는데도

백년이 갈 거라 하고 손 한번 잡는 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주 보고 웃는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백 년 동안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마음이

꽃 피우는데도 백년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랑 속 백년은 참 터무니없이 짧습니다.

사랑 속 천년도 하루 햇살 같은 것입니다.

 

 

 

사칭 / 김왕노

 

나는 사람과 어울리려 사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꽃과 어울리려 꽃을 사칭하였고
나는 바람처럼 살려고 바람을 사칭하였고
나는 늘 사철나무 같은 청춘이라며

사철나무를 사칭하였고
차라리 죽음을 사칭하여야 마땅할
그러나 내일이 오면 나는 그 무엇을

또 사칭해야 한다
슬프지만 버릴 수 없는 삶의

이 빤한 방법 앞에 머리 조아리며

 

 

 

꽃 / 김왕노

 

난 당신의 몇 부 능선에 피었던 꽃인가.

채석강가 채석 위에 핀 꽃은

몇 천 년 제 몸을 공중부양 하여 이른 것인가.

내 안에 꽃으로 피었던 당신도

당신 안에 꽃으로 피었던 나도

꽃씨하나 남기지 않은 불임의 꽃이었구나.

서로의 가슴 속을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꽃

척박한 세월이라지만

돌 안에도 돌 꽃이 핀다는데

구름의 몸 안에도 구름 꽃 핀다는데

우리가 이제 우리의 꽃이라 부르며

꽃의 씨방에 들어가 요나처럼 울 꽃은

그리고 난

당신의 몇 부 능선에 다시 피어야 할 꽃인가.

 

 

 

궤나 / 김왕노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가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

 

그리워질 때면 그립다고 부는 궤나

그리움보다 더 깊고 길게 부는 궤나

들판의 노을을 붉게 흩어 놓는 궤나 소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짐승을 울게 하는 소리

 

오늘은 이 거리를 가는데 종일 정강이뼈가 아파

전생에 두고 온 누가

전생에 두고 온 내 정강이뼈를 불고 있나 보다

그립다 그립다고 종일 불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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