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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자야(子夜) / 백석의 여인

by kimeunjoo 2011. 2. 6.

 


    백석白石

     

     

     

    자야(子夜) / 백석의 여인

     

     

    子夜는 백석의 여인 중에서 잘 알려진 분이다.

    이동순(영남대)교수가 백석 문학이 해금되던 해, 자야 여사를 직접 면답해 얻은 자료가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 담긴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는 자야 여사가 구술하고 이동순 시인이 정리및 조력한,

    자야 여사의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이란 이야기다.


    백석의 女人에는 누구 누구인가..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한 분은 지금 옮기는 자야이고,

    그리고 부모님이 정처해준 부인,
    백석의 절친한 친구 신현중과 결혼해버린 통영의 란,
    그리고 김진세의 누이,..등이다.


    세월과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가난과 외로움이 쓸쓸할 때
    사랑의 처지가 눈물 앞에 뉘여가며 흔들릴 때
    그의 사랑도 정처(定處)도

    그의  조국인 조선의 울도 그와 함께, 따라, 변해간다.


    함흥에서 서울에서 통영에서
    의주에서 만주에서 북한에서

    백석의 여인도 운명처럼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필자가 보기에
    백석의 심중에 남은 여인이 첫사랑-통영의 란이라면,
    여인의 심중에 남아 있게한 사랑이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의 사랑,

    아니 여인의 시인에 대한 사랑이야기
    오늘은 이생진 시인님의 시를 빌어 1편-자야의 사랑을 보낸다.

    "천재시인 백석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사후,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은 같은 해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일하게 된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진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 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이러한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해준다.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

    앉았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과 동기가 순수했다고 한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 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다

    와중에 진향은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어느날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기생의 위치로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진향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하여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자야-‘내 사랑 백석’에서)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外的인  도피
    그때 백석은 나이 스물 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 둘이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 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 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 백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 축구 학생 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 시켜놓고

    자신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도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 다방을 연 것이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 여 정도이다.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백석은 어느 날 ‘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詩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야의 회고)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1937년, 여성)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거웠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 업무에 종사하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눌러 앉게 되었고, 자야는 성가하여 서울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다.

     

    백석은 이 무렵   어느 신의주 변방 박시봉이란 사람의  하숙방에서 묵게되는데

    이때에 서울의 친구에게 시 한 수를 붙이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1948년 잡지‘학풍’에 실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 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서울로 보내져 학풍에 실리게 됨으로서 백석이 서울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해방된 조국, 갈곳의 정처가 없는 몸,

    실직하고 다시 삶의 꾸러기를 찾아가는 자신의 심정,

     

    겨울..고향에 대한 애수..

     

    백석의 단절한 심경이 절절히 배인 이 시는 지금 많은 시인들의 애송시가 되었다.
    즉 남한에 알려진 마지막 작품인 셈이자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애송한 애송시가
    된 것이다.

    백석이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1987년까지 금지도서가 되었다
    까닭은 해방이후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면서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인 것이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백석문학이  해금이 된  1987년 9월,

    이동순(李東洵.영남대)은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는데

    그 해 한 달 뒤 10월,

    이동순은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 밖의 전화를 받게되고,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고
    이동순 시인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자야 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자야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는다.

    이동순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시인은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하여

    세상에 백석의 여인- 자야여사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글이 나온 뒤에 어느날 자야 여사에게 이동순 시인은  [백석과 보낸 3년간의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했다.
    자야가 글 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의 학구파 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야는 [백석과의 사랑의 세월]에 대한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너무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병원에 입원 하기도 했으나

    평생을 사모한 사랑이기에 집중하여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이라고 책을 마침내 출간했다,


    이동순시인이 1930년 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 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백석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였다.
    백석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까지 출제된다는 것은
    ‘월북 시인’에서 ‘재북 시인’으로의 완전한 복원을 의미한다”

    (이동순)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혼자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고 이야기하였다.


    자야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원을 기부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여 시행토록하였고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발표해 현재 8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김영무 신대철.박영근.최영철.이시영.정양.고형렬 등이
    백석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자야여사 -김진향-김영한은 평생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기리고 전 재산을  시주한 성북동 길상사에 자신의 혼을 묻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겨울이였다

    까치들이 와서 울어 주었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은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남겨지고
    북한에서 자야보다 먼저 죽었다.


    그의 시(詩)와 비련(悲戀)의 사랑,
    그리고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많는 독자의 숨결이 되어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旻影 시인)
    *참고 인용--
    자야여사 ‘내 사랑 백석 /’(문학동네.1995)
    수능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조성관 주간조선 차장 대우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자야 여사의 회고/이동순"

    이글은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이야기 중심으로 엮은 것입니다.

     

    위의 편집과 자료-이민영(0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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