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雪夜) / 김광균(金光均)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안방 / 김광균
아침에 방문을 여니 어머니가 안 계시다
아 어머님은 세상을 떠나셨나 보다
지난 십이년 그 오랜 날과 밤으로
하루같이 보고 싶어 하시더니
어머님은 저 세상에 가시는 길에
이북에 들러 동생을 만나셨겠지
어머님은 오래 못 본 아들을 껴안고
얼마나 거기서 울으셨을까
산이
두 주먹으로 쳐부수고 싶은 산이
남북을 가로막아
내 귀에는 어머님 울음 소리가 안 들리나 보다
먼-훗날 형제 마주 앉으면
동생은 자세한 이야길 하리라
이야기하다 아야기하다 날이 새면
북한산성 기슭을 찾아가
어머님 무덤 위에
동생과 나는 뎅굴며 울을 것이다.
김광균 시집 『와사등 』,《자유문학사 》
추일 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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