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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눈의 심장을 받았네 / 길상호

by kimeunjoo 2011. 1. 17.

 

 

 

눈의 심장을 받았네 / 길상호

 

 

당신은

새벽 첫눈을 뭉쳐

바닥에 내려놓았네

 

그것은

내가 굴리며 살아야 할

차가운 심장이었네

 

눈 뭉치에 기록된

어지러운 지문 때문에

바짝 얼어붙기도 했네

 

그럴 때마다

가만히 심장을 쥐어오던

당신의 손,

 

온기를 기억하는

눈의 심장이

가끔 녹아 흐를 때 있네

 

 

 

 

헐렁한 팬티 / 길상호

 

나는 팬티를 파는 남자, 죄판에 꽃무늬 망사 끈 팬티 늘어놓고서, 저기 아저씨! 옆의 여자분 팬티 좀 사드리세요, 내가 파는 팬티는 사준 사람만 벗길 수 있는, 밤마다 싸고 또 싸게 만드는 팬티, 싸다 싸 세 박스 만원~, 꽃무늬는 여인에게 바치는 꽃다발, 망사는 여자를 건져올리는 그물, 끈은 두 사람 하나로 묶는 인연,

쑥수러워 할 거 뭐 있나, 사세요 사, 사람 드문 골목 모퉁이 찢어진 가로등 불빛을 걸치고, 나는 팬티를 파는 남자. 척보면 척, 누구 속이 까만지 누구 속이 하얀지, 누가 큰 사람인지 누가 작은 사람인지 다 알지 허풍을 떨다, 어둠도 잠이 든 밤 리어커 좌판에 늘어놓 은 말들을 챙겨, 침묵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한때 당신이 오래 입다 버려진 남자.

 

 

 

밥그릇 식구 / 길상호

 

처마 밑에 놓인 밥그릇

아침엔 까치가 기웃대더니

콩새도 콩콩 깨금발로 다가와

재빨리 한입,

빗방울이 먹다 간 한쪽은

팅팅 불어 못 먹을 것 같은데

햇살이 더운 혓바닥으로 쓰윽,

저마다 배를 불린다

정작 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잠을 자다 뒤늦게 나와

구석에 남은 몇 알로

공복을 누루지 못해 야아옹,

뒷마당으로 사라지고

고양이가 흘리고 간 한 알

개미들이 기다랗게 줄을 선다

텃밭에서 돌아온 할아버지

텅 빈 밥그릇을 보고 허허,

또 한 그릇 덜어낸 사료 포대처럼

조금 더 허리가 휜다

 

 

“식구”란 한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가족이라는 말보다 더 살갑게 느껴지지 않나요? 여기에 “밥그릇”은 하나뿐인데, 그 밥그릇에 담긴 음식을 다양한 “식구”들이 싸우지도 않고 참으로 슬기롭게 끼니를 해결하고 있군요. "처마 밑에 놓인 밥그릇“의 원래 주인은 고양이랍니다. 고양이는 느긋하지요. 저를 사랑해 주는 할아버지께서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주시니 뭐 급할 것이 없는 거지요.

 

지난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온 고양이가 아직 단잠에서 깨지 않은 줄 아는 “까치가 기웃대며” 쓰윽쓰윽 걸어와선 한입 먹고 자리를 뜨자, 까치의 눈치를 보며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비비며 기다리던 ”콩새가 재빨리 한입“ 먹고 날아가네요. 어제 밤비가 내렸는지 밥그릇 한쪽이 빗물에 “팅팅 불어 못 먹을 것 같은데”, 공연한 걱정을 했군요. ”햇살이 더운 혓바닥으로 쓰윽“ 핧아먹네요.

 

이렇게 골고루 식구들을 챙기는 “밥그릇”은 정말 엄마 같아요. 햇살이 환하게 퍼지자, “밥그릇” 주인인 고양이가 느릿느릿 다가오는 군요. “밥그릇 식구”들이 고양이 몰래 바쁘게 다녀가는 바람에 그만 먹을 것이 부족한 고양이가 “야아옹”거리며 할아버지를 부르네요. 그런데 “밥그릇 식구”가 또 있었네요, 고양이가 흘린 사료 “한 알”을 “개미”식구들이 신이 나서 줄을 서고 있군요. “밥그릇”하나에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다툼 한번 없이 끼니를 해결하는 아침 풍경이 정말 따스하고 정겹지 않으세요?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란 느리게 살아가고자 하는 생활방식으로 최근에 많은 현대인들이 꿈꾸는 삶의 형태이지요. “슬로우(slow)”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바로 고양이 “밥그릇”에 어떤 “식구”들이 와서 끼니를 함께 하는가를 찬찬히 바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요?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

 

 

 

 

 

 

길상호 세 번째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

 

 

 

길상호(37ㆍ사진)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 발행)를 펴냈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뒤 현대시동인상, 이육사문학상, 천상병시상 등을 수상한 그는 빼어난 서정, 치밀한 언어 구사로 정평을 얻고 있다.

 

자연친화적 서정성이 돋보인 첫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2004), 내면의 불안과 고통을 직시한 두 번째 시집 <모르는 척>(2007)에 이어 3년 만에 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고단한 삶에 눈길을 준다. 그의 말이다. "대전에서 자연과 가까이 살다가 4년 전 서울에 올라오니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내 시에 사람 얘기를 담고 싶었고 그러려면 나 자신부터 파악해야겠다 싶어 쓴 시들이 두 번째 시집에 실린 것들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봤는데, 희망보다는 절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꽃게탕을 끓여 먹으며 시인은 어머니를 생각한다.

 

'마디마디 매운 국물이 스며든다/

뼈마디 구멍이 점점 넓어진다//

 

등딱지가 밥그릇으로 변하는 순간/

등가죽이 검게 죽어버린 순간//

 

게딱지 밥을 비벼 맛나게 퍼먹는다/

나는 삭은 등골을 열심히 빼먹는다'

('식욕'에서)

 

'헐렁한 팬티'의 시적 화자는 팬티를 파는 행상. 허풍스러운 재담으로 손님을 끌던 그는 늦은 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자조한다.

'어둠도 잠이 든 밤 리어카 좌판에 늘어놓은 말들을 챙겨, 침묵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한때 당신이 오래 입다 버려진 남자'

 

장판 밑에 살얼음이 깔리는 단칸방에서 겨울을 나는 남자('툰드라의 아침'), 빚 때문에 불화를 겪는 부부('빚'), 외상 사절이라는 단골 술집 주인의 선언에 술 생각을 애써 털어내는 남자('외상') 등

생의 그늘을 들여다보던 시인은, 보잘것없이 생긴 꽃 대신 하얗게 탈색한 잎으로 나비를 유혹해 열매를 맺는 개다래나무에 빗대 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잎을 꽃으로 바꾸기까지 제 속을 얼마나 끓였겠습니까/

그 열매 날로 씹으면/

혓바닥이 훨훨 탄다는데요/

그래도 불기 어르고 달래놓으면/

오장육부 따듯하게 덥히는/

약재가 된다는데요/

뜨거운 그 열매를 먹고/

궁여지책 하루를 버티는/

까맣게 탄 사람도 있다는데요'

 

('궁여지책'에서)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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