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 박제영
다림질 하던 아내가 이야기 하나 해주겠단다
부부가 있었어. 아내가 사고로 눈이 멀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래. 언제까지 당신을 돌봐줄 수는 없으니까
이제 당신 혼자 사는 법을 배우라고. 아내는 섭섭했지만 혼자 시장도 가고 버스도 타고 제법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대.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버스에서 마침 청취자 사연을 읽어주는 라디오 방송이
나온 거야.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내가 혼잣말로 그랬대. 저 여자 참 부럽다. 그 말을 들은 버스 기사가 그러는 거야. 아줌마도 참 뭐가 부러워요. 아줌마 남편이 더 대단하지. 하루도 안 거르고 아줌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구만. 아내의 뒷자리에 글쎄 남편이 앉아 있었던 거야.
기운 내 여보,
실업자 남편의 어깨를 빳빳이 다려주는 아내가 있다
영하의 겨울 아침이 따뜻하다
- 『빛의 발자국』(2009 시문학 사화집)
*
얼마 전인가요? 가수 박진영이 티비프로에 나와서 결혼보다 사랑이 더 상위개념이라고 하더군요.
또 지난 주에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박칼린 음악감독이 티비프로에 나와서 또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서약서 같은 게 아니라 불꽃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고.
정말 그럴까요?
결혼보다 사랑이 더 위대한 것일까요?
생면부지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백년을 함께 하는 일이 과연 사랑만 못한 걸까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약속이 불꽃 같은 사랑만 못한 걸까요?
결혼이 삶의 한 방식이듯 이혼도 삶의 한 방식임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혼에 대한 의미가 폄훼되고 평가절하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직장을 그만 두고 잠시 실업자 생활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언제나 잠재적 실업자이긴 합니다만,
아내가 곁에 있는 한 영하의 겨울 아침도 충분히 따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뜨겁게 나를 뎁혀주지만 결코 나에게 화상을 입히지는 않는 熱的인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 당신 곁을 지켜주고 있는 아내와 남편이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졸시를 띄웁니다.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이 계속되는 날들입니다.
가족이라는 난로로 따뜻하게 몸을 녹이시기 바랍니다.
2011. 1. 10.
강원도개발공사 대외협력팀장 박제영 올림
아내의 서랍 / 박제영
1
아내에게는 서랍이 없다
서랍은 잃어버린 세계의 비밀이 숨겨져 있거나 기억을 키우는 곳
가령 당신의 서랍 속 구석에 유년의 상처와 공증 받은 유서 한 장 숨겨져 있고
딸의 서랍 속에, 버린 줄 알았던 낡은 인형 몰래 키우고 있듯이
당신과 딸이 아내의 비밀인 줄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2
아내의 서랍은 없다
서랍은 목책 너머 은밀히 키우는 화원
가령 당신과 딸의 서랍 속에는 이끼가 자라고 있을 것이다
언제고 꽃 필 때를 기다리면서
당신과 딸이 아내의 서랍인 줄은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늙은 거미 / 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김주환 홍평기 엄아람 엮음,『생각하며 읽는 시』(우리학교, 2010)
■ 본문 중에서(108쪽)
「늙은 거미」를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해 봅시다.
1. 시 속에 나온 거미의 일생을 요약해서 말해 봅시다.
2. 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3.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는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봅시다.
4.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에 담긴 말하는 이의 심정을 헤아려 봅시다.
■ 본문 중에서(193쪽)
1.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 거미줄을 만들어 새끼를 키우다 새끼를 다 떠나보낸 후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으로 수의를 짓는다.
2. 자식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희생으로 보낸 자신의 생의 돌아보는 것. (거미줄에 맺힌 이슬은 눈물 방울의 이미지이다.)
3. 할머니 또한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살다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4. 어머니(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 연민. (자신의 내장을 뽑아내 새끼를 키우는 거미와도 같은 부모의 생을 헤아려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 현직 선생님들이 엮은 책이다.
<언어능력 향상 프로젝트> 시리즈의 하나이다.
어느 눈 밝은 선생님이 계셔서 어둔 구석에 숨어있던 졸시, 「늙은 거미」를 찾아내신 모양이다. 시집 『뜻밖에』가 비록 많은 독자에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늙은 거미」만은 제법 독자들이 찾아 읽은 듯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소통 -
장미여관 김씨
장미여관 김씨가 바로 당신이라면
장미여관 박씨는 그러면 누구인가
당신이 그의 그림자이고 동시에 그가 당신의 그림자라면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인가 장미여관 김씨인가
출처 : http://blog.naver.com/sotong/50102952087
"장미여관 김씨" 브로그의 주인이자, "소통"이란 분이 훤~~하게 잘 생긴 박제영 시인입니다
왜 "시인 박제영" 이라하지 않고 ~팀장이라 하시는지... 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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