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톡톡 다시 읽기] (46)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주사위놀음 기도말고 즐겨라
0. 니체, 차라투스트라를 만나다
1881년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질스마리아의 실바플라니 호숫가의 숲속을 거닐고 있을 때 하나의 사유가 ‘비둘기처럼 조용하게’ 찾아왔다. 니체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로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였던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유를 펼쳐낸다.
사실 예언자 차라투스트라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대조적이다. 전자가 선악을 엄격하게 구분한 가운데 도덕을 창시했다면, 후자는 도덕의 몰락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말한다. 말하자면 니체는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를 몰락시키고 그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1883년 2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쓰기 시작한다. 1부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열흘. 2부와 3부 역시 그해 여름과 겨울에 각각 열흘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리고 1884년 반년간의 작업을 거친 뒤, 1885년에 제4부가 나왔다. 조용히 다가온 사유와 폭풍과 같은 글쓰기. 그렇게 니체는 영감을 인류에게 보낸 최고의 선물로 만들어냈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진
1. 차라투스트라, 허무주의와 맞서 싸우다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변신 이야기다. 그는 동굴에서의 수련과 인간의 심연에 대한 탐사 후에 충혈된 눈을 하고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는 때로는 웃고, 때론 아파하며 자신과 주위의 사물을 보다 섬세하게 파악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나간다.
‘차라투스트라’의 첫 장면도 마찬가지다.
동굴에서 10년 동안 수련을 마치고 나온 차라투스트라가 성자를 만나 던진 말은 ‘신의 죽음’ 이었다. 니체에 의하면 사멸하는 인간은 존재의 불안정함에, 존재가 우연에 맡겨져 있음에 공포를 느끼며 안정을 욕망한다.
존재의 사멸성을 받아들이는 대신 피안의 영원한 세계를 설정한다. 거기서 현재의 삶은 벗어나야 할 것으로 그려진다. ‘저편의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삶의 허무함을 근거로 현재의 삶을 비난하고 평가절하한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 4부의 ‘보다 높은 인간들’이 보여주듯 인간은 붙잡을 가치가 소멸한 뒤에 다시 새로운 대체물을 발견해낸다. 가령 신의 죽음을 인정한 교황도 ‘신앙’을 만드는 것은 중단하지 않으며 미신과 주술을 거부하는 과학자조차도 실증성과 엄밀성의 신앙에 빠져든다.
절대적 가치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기존의 가치를 새로운 가치로 전환하는 것도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창조 행위가 ‘과거’의 부정인 한, 창조와 생성에서 ‘리얼’한 세계가 누락되기 때문이다. 이때 행위의 판단 기준은 현재의 삶이 아니라 기억이다. 이들에게 현재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영역 밖의 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허무주의자다!
▲ 니체(오른쪽)와 그가 사랑한 연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니체는 독일의 여성 문인인 살로메로부터 영원 회귀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가운데는 니체의 친구이며 살로메를 두고 삼각관계의 연심을 나눴던 철학자 파울 레.
차라투스트라는 이 삶이 멈춰선 자리에 함께 멈춰선다. 이들의 멈춰버린 시간을 어떻게 돌릴 것인지, 또 멈춰선 자를 어떻게 길 떠나게 만들지를 사유한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삶을 돌아보라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독을 타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머리말).
2. 어린아이, 주사위를 던지다
사람은 자유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사유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주어진 조건과 자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대개 ‘별 수 없어’ ‘어쩔 수 없어’라고 말을 하게 되는 상황. 푸코 식으로 이야기하면, 사유의 틀이 있고 인간은 그 속에서 정해진 대로 사유할 뿐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틀을 벗어날 수 없으며’, ‘창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런 사유의 틀이 깨어진다고 해서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다른 형태의 억압이 만들어진다. 부자유의 영원회귀! 지금의 사건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는 탄식. 차라투스트라에 의하면 이런 반복의 피로감이 우리의 변신을 가로막는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활발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아이들의 주사위 ‘놀이’를 통해 이 문제를 해명한다.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는 땅에 닿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변화에 내맡겨진다. 이것은 삶의 우연성 혹은 현재 상황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하늘로 던져진 주사위를 구속할 어떤 필연성도 없다. 그러나 주사위는 땅에 떨어져 하나의 숫자가 나오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사위 놀이는 우연과 필연의 반복이다.
이 사건을 해석하는 상반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소위 학자 부류. 이들은 주사위 놀이에서 하나의 법칙성을 끌어내려고 한다. 많은 사례들을 수집하고 그 속에서 일반적인 법칙을 끄집어낸다. 주사위를 던지는 순간의 우발성이나 혼돈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그것은 ‘원래 그래.’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사위로 노는 ‘아이들’은 다르다. 던져질 때마다 주사위는 그들에게 매번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놀이에 열중해서 경쟁이 붙은 아이들은 주사위 놀이에 몰입한다. 학자들의 주사위 던지기가 동일한 것의 회귀의 문제라면 아이들의 던지기는 매번 차이의 귀환이다. ‘생성’의 반복, 혹은 ‘차이’ 나는 반복이다.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대신 매 순간 ‘설레요.’, ‘힘들어요.’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한편으로 주사위가 우연의 하늘에 다시 펼쳐지는 한, 과거의 낡은 사건은 새로운 사건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잘 실감나지 않는다고? 주사위 게임을 축구의 역전승으로 바꿔서 떠올려보길. 상대에게 당한 첫 번째 골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지만 동점골과 연속골이 터지는 순간, 과거의 쓰라림은 현재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원인으로 바뀐다. 우리는 이렇게 과거조차도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몰락을, 자신의 해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습관대로 살고자 한다. 사실 주사위 놀이는커녕, 단 한 번의 주사위 놀이에 짓눌려 있다.
변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부자유를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의 주사위 놀이를 했음을 상기하자. 이것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긍정한다면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또 다른 ‘한번 더’를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에서 ‘한번 더’의 외침을 듣고 차이의 기쁨에 공명하지 않았을까?
최진호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Also sprach Zarathustra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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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렇게 집필되었다.
② 짜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대립을 극복한다.
③ 현대인은 영혼과 육체, 선과 악, 참과 거짓 등 이원론적 대립을 영원하게 고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 핵심용어
▶위버멘쉬(Ubemensch) = 위버멘쉬는 저편의 초월적인 세계를 위해서 지상의 삶을 버리지 않는 자이다.
그는 이원론적으로 고착된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원환적 삶을 사는 자이다. 그는 대립을 초월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환운동 속에서 내재적으로 극복하는 자이다. 이 용어는 초인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초인이 초월적인 인격으로 잘못 해석될 소지가 있어 독일어 음역으로 위버멘쉬라고 했다. 영어권에서도 superman 또는 overman으로 번역해오다가 Ubemensch로 쓰고 있는 추세다.
프리드리히 니체 | |
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렇게 집필되었다
니체(1844~1900)는 '짜라투스트라'를 쓰기 위해서 18개월간의 잉태기간을 가지고, 1883년 2월과 8월에 1부와 2부, 1884년 1월에 3부를 집필하고, 1885년 초에 4부를 완성한다. 니체는 각 부를 집필하는데 열흘로 충분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1888년 정신이 혼미해지기 직전에 쓴 마지막 위대한 자서전적 저술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서 '짜라투스트라'라는 책이 세상에 미칠 영향을 예언자적으로 소개한다.
"내 작품 중에서 '짜라투스트라'는 독보적이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수천 년간 퍼져나갈 목소리를 지닌 이 책은 존재하는 것 중 최고의 책이며, 진정 높은 공기의 책이다 - 인간의 만사가 그것의 밑에 아득하게 놓여 있다 - 그뿐 아니라 이 책은 가장 심오한 책으로서,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했고,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선의가 담겨 올라오지 않을 수 없는 고갈되지 않는 샘이다."
니체는 자신의 이 책이 단테, 셰익스피어 그리고 괴테를 능가한다고 말한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다소 과장되게 들렸던 이 예언은 실현되었다. 이전의 니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짜라투스트라'의 서술형식과 언어수준은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이 작품은 철학적 의도 아래 구상된 것이지만 비유로 상징화된 문학작품으로 씌어있다.
니체는 스스로 이 책을 제5의 복음서라 불렀다.
이 책에 나타난 새로운 삶의 지혜는 전반적으로 반종교적인 성격을 지니며,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풍자로 활기를 띠며, 새로운 디오니소스적 철학을 예고한다. 이 작품은 일반철학책들과 달리 고도, 계절, 하루 중 시간의 변화와 아름다운 풍경들이 있고, 질병과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동물과 인물이 나타나고, 짜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제2의 자아로 등장한다. 비록 니체가 옛 페르시아 예언자 그리고 개혁자 짜라투스트라의 전기의 하나 혹은 다른 세부를 수용할지라도, 그의 짜라투스트라는 철저히 예술 작품상의 인물이다. 이 인물은 니체가 전도의 스타일로 그의 철학에 관해서 말하는 가면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 작품의 내용을 풍요롭게 하고, 또 니체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현대성, 그리스도교, 국가에 대한 비판이 있고 디오니소스적 개념,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의 사상이 서술되고 있다.
이 작품과 더불어 니체사상 전반에 관해서 말하자면 니체는 생철학, 실존철학, 포스트모던의 선구자 그리고 서양철학 2000년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들뢰즈는 현대철학의 대부분은 니체 덕에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2. 짜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대립을 극복한다
산 속에서 짜라투스트라의 고양된 정신은 화나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그리고 최대로 불안전하게 하는, 그러나 최대의 희망에로 자극과 미래의 비전을 제공하는 인간세계와 소통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두 영역이 상호 대립되는 고양된 정신의 영역에로 상승하기도 하고, 또한 물질적인 인간세계로 하강하기도 한다. 짜라투스트라가 최소한 각부에서 반복해서 행하는 산으로의 상승과 도시로의 하강은 이원적인 대립(천상과 지상,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끊임없이 극복하는 원환운동으로 형상화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서른에 산 속으로 가서, 그 곳에서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10년을 보내면서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 변화가 왔고, 그는 저 아래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는 이러한 이유를 태양의 비유로써 말한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그리고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더라면 너는 필경 너의 빛과 그 빛의 여정에 지쳐 있으리라. 우리는 아침마다 너를 기다렸고, 너의 그 넘치는 풍요를 받아들이고는 그에 감사하여 너를 축복해왔다.…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다.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기뻐하고,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넉넉함을 기뻐할 때까지.…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또한 그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몰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보라! 잔이 다시 비워지기를,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노라.' 이렇게 하여 짜라투스트라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짜라투스트라가 그의 과도한 지혜를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 어떤 것도 대립자와의 생산적인 긴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긴장이 없다면 삶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경직, 즉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즉 사물들 없이는 태양의 활동은 헛되기도 하고 그 힘은 자기 파괴적이 되기도 한다. 태양은 사물들이 태양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들을 필요로 한다.
3. 현대인은 선과 악, 참과 거짓 등 이원론적 대립을 영원하게 고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산을 내려오면서 성자를 만나고, 성자는 짜라투스트라의 변화한 모습을 말한다. 성자는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완전성으로 있는 신을 찬양하기 위해서 숲에서 거주한다.
성자는 종교적 삶을 살고, 신을 완전하고 불변적인 것으로 사랑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생성을 배제한다. 반면에 짜라투스트라는 생동하는 실존적 삶을 산다. 짜라투스트라는 끊임없는 생성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에 의거해서 신의 죽음을 말한다. 이 만남을 통해서 니체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의 불변성과 디오니소스적 생성, 신과 위버멘쉬, 그리스도교의 신의 은총과 힘에의 의지의 대비를 예견하게 한다.
숲에서 나와 짜라투스트라는 도시의 시장터에서 군중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위버멘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에서 영혼이 육체를 경멸하는 것은 동시에 육체가 영혼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멸은 위버멘쉬라는 바다 속에서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인습의 딱딱한 외피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번갯불인 광기를 통해서만 벗겨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위버멘쉬는 번갯불이자 광기이다.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U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그들 자신을 뛰어넘어 그들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사람에게 있어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 아닌가.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너희들은 한때 원숭이였다. 그리고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보다도 더 철저한 원숭이다.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들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런 자들은 스스로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독을 타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자들이다.…지난날에는 신에 대한 불경이 가장 큰 불경이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저 알 길이 없는 것의 뱃속을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 이제는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지난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영혼은 신체가 여위고 몰골이 말이 아니기를, 그리고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 그러나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허기져 있는 것은 바로 영혼 그 자체였다. 잔혹함, 바로 그것이 그러한 영혼이 누린 즐거움이었으니!
…너희들을 혀로 핥을 번갯불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들에게 접종했어야 할 광기는 어디에 있는가?
보라, 나 너희들에게 위버메쉬를 가르치노라. 그가 바로 번갯불이요 광기이다!'"
짜라투스트라에게 인간은 철저히 원숭이이다. 원숭이의 특징은 흉내에 있다. 흉내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동의를 신호하고 또 이 행위와의 일치를 암시한다. 이러한 일치를 구실로 해서 원숭이와 같은 인간은 창조를 행할 경우에 가해지는 불이익을 피하고, 자기의 이익 또는 편의를 장애 없이 획득하기 위해서 군중의 행동을 흉내 낸다. 즉 이러한 인간은 군중이 추종하는 도덕을 따를 뿐이다.
원숭이와 인간은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에 있어서 상당한 차별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게 되면서 새롭고, 생소하고, 잡다한 것들을 접한다. 인간은 효율적 대처를 위해서 이러한 잡다한 것을 단순화, 유형화, 일반화한다. 인간이 외부환경에 더 많이 접촉하게 되면 될수록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은 더욱 더 추상적으로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타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객관화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은 육체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쫓아내고, 정신은 물질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존재로 날조된다. 정신은 물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유령이 된다. 물질과 정신 간의 근본적인 분리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나타난다. 육체의 관점에서 보면 영혼은 물질로부터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공허하고, 생기를 잃어버린다. 따라서 영혼은 자신이 결여한 물질의 대용품으로서 허구적인 천상의 세계를 날조한다.
육체에 대한 잔혹한 금욕적 행위를 통해서 영혼이 육체를 압도하고 있다는 허구적 승리도 역시 가련한 쾌감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서만 풍요하고 순수할 수 있고 또 그 충만으로 해서 행복할 수 있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은 위버멘쉬에 의하여 초극될 수 있다.
창조자는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린 줄 타는 광대
# 핵심용어
▶이원론 (二元論, dualism) = 세계가 그것의 창조에서 일원적 혹은 다원적 설명모델들과 대립하면서 두 개의 서로 독립적인 원리들, 힘들 혹은 실체들(예: 존재와 생성, 선과 악, 정신과 물질)을 통해 규정되고 그리고 설명될 수 있는 종교적 혹은 철학적 학설에 관한 명칭.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이원론으로부터 출발했던 플라톤 철학의 이원적 요소들이 철학적 영향력이 있었다. 서로 분리된 두 존재의 영역, 즉 불변적이고, 참되고 그리고 완벽한 존재의 영역인 이데아가 있고, 이 영역에 근거해서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하고 그리고 변화하는 사물들이 다만 환영 같고, 모사 같은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식 이론적 이원론은 그의 인간상(인간학적 이원론)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정신 혹은 이성은 인간에 있어서 완전성, 이데아의 영역과 인간을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통해서 인간은 변화의 영역, 생성과 소멸, 가상의 세계에 속한다. 육체가 이데아를 관조하려는 정신적 부분을 방해한다. 육체는 영혼에 있어서 감옥이고, 감옥으로부터 영혼은 죽음을 통해서 해방되고, 구원된다. 이 절개가 파괴적으로 인간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데카르트 철학은 그러한 종류의 자기파괴와 절망의 이원론적 체계의 수미일관된 변형을 가져왔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의식존재(res cogitans) 그리고 연장된, 육체적-물질적 존재(res extensa)는 상호간에 엄격하게 분리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더 이상 하나의 동일한 본질, 인간 속에 그것의 공존 그리고 상호작용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방법론적인 귀결을 가진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자연과학 그리고 정신과학처럼 그런 식으로 분화된다.
1. 최후의 인간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조촐한 쾌락을 즐긴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실을 햇빛이 비치는 외부세계와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전개했다. 마찬가지로 니체는 플라톤처럼 비유를 사용하지만, 플라톤과는 대립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친다.
플라톤과 니체는 동일한 상황, 즉 두 사람은 기존의 사상과 전혀 다른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의 근대 철학자들은 기존의 사상적 틀 안에서 그들의 철학을 전개했기 때문에 주로 논증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사상의 지형이 바뀌는 거대한 전환점에서는 이러한 논증을 사용하기보다는 새로운 사상을 비유로써 나타낼 수밖에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쳤지만, 군중은 위버멘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방법을 바꾸어서 최후의 인간을 보여주어서, 자신의 상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군중을 반성하게 한다.
먼저 짜라투스트라는 아직도 사람이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춤추는 별(위버멘쉬)을 탄생시키기 위해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춤추는 별이 가진 혼돈은 대립을 고정시키지 않고, 긴장을 야기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머지 않아 위버멘쉬가 탄생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고하고, 그는 이제 최후의 인간을 보여준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최후의 인간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최후의 인간은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빡인다. 저들은 살기 힘든 고장을 버리고 떠나갔다. 따뜻한 기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댄다. 따뜻한 기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아직도 일에 매달린다. 일 자체가 일종의 소일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소일거리로 인해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려 하지 않는다. 그 어느 것이든 너무나 귀찮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다스리려 드는 사람이 있는가? 아직도 고분고분 따르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그 어느 것이든 너무나도 귀찮고 힘든 일이거늘. 돌볼 목자는 없고 가축의 무리가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하며 실제 그렇다. 어느 누구든 자기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제 발로 정신병원으로 가게 마련이다.…저들은 총명하여 일어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저들의 조소에 끝이 없을 수밖에. 저들은 다투기는 하지만 이내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저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조촐한 쾌락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건강은 끔찍이도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최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작게 만들고, 그들도 역시 작은 벼룩이 된다. 또한 벼룩처럼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하던지 간에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자기와 동일한 최후의 인간에게 동의를 구하는 형식인 눈을 깜빡인다. 최후의 인간은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없는 군집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웃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비기 위해서 아직도 이웃을 사랑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형제애, 만인평등은 니체 시대의 윤리학적 정치학적 이론의 슬로건이었다. 이러한 최후의 인간의 이상에는 상이, 모순, 대립이 없다. 따라서 긴장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혼돈도 없다. 최후의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균등화시키고 모든 위대를 왜소화시킨다. 최후의 인간은 어떠한 덕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할 만큼 왜소해졌기 때문에 고귀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을 더 이상 구별하지 않고, 따라서 이러한 구별이 없는 균등화된 상태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짜라투스트라는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군중이 반성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군중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에게 최후의 인간을 주면, 군중은 그에게 위버멘쉬를 주겠다고 한다. 최후의 인간은 반어적으로 군중의 마음에 있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군중은 최후의 인간상을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최고의 인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짜라투스트라의 정신은 맑기가 오전의 산과 같지만, 최후의 인간의 정신은 어둡기가 동굴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에게 위버멘쉬 사상을 전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2. 전통적 가치가 끊임없이 창조적 행위를 가로막는다
니체는 동물에서 위버멘쉬로 가는 크나큰 모험을 광대의 줄타는 행위로 비유하고 있다. 광대가 두 탑사이 시장과 군중 위에 걸려있는 줄을 타는 것은 군중에게 일상적이 아닌 놀라운 구경거리이다. 전통적 가치에 안주하는 군중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인 광대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려있는 줄을 타는 행위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크나큰 모험이다. 그러나 광대의 줄타는 행위는 전통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어릿광대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자에 의해서 줄에서 떨어진다.
"바로 그때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고 모든 사람의 눈을 얼어붙게 만든 일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광대가 줄타기 시작한 것이다.…그자가 마치 악마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길을 막고 있는 사내를 훌쩍 뛰어넘었던 것이다. 앞서 가던 사내는 그의 적수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을 보자 그만 넋을 잃고 허둥대다 밧줄을 헛디디고 말았다.…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 오래 전부터 그 악마가 나타나 발을 걸어 나를 넘어뜨릴 줄 알고 있었지. 이제 저자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구나. 그대가 막아주지 않으시겠는가?'
짜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벗이여,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거니와 네가 말하고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너의 영혼은 너의 신체보다 더 빨리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광대는 이제까지 전통적 세계관에 따라 맹목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통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동물과 위버멘쉬를 잇는 줄을 타고 간다. 그가 떨쳐버렸다고 생각한 전통적 가치관이 그의 머리에서 다시 떠오르자 그는 당혹감으로 인해서 머리와 밧줄을 잃는다. 그의 정신은 영혼불멸을 믿는 전통적 가치체계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결국 그는 육체를 잃게 된다.
니체는 이성을 육체 속에 있는 내장이라고 표현하고, 그리고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도 정신과 육체는 대립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가 파멸하면, 영혼도 역시 몰락한다.
광대는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잃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제 줄을 타다가 죽은 광대는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믿게 된다. 그래서 죽어가는 광대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서 대립되는 이원론적 가치관을 떨쳐버린다.
빛과 물의 합주에 의해서 무지개가 생기고, 마찬가지로 육체와 영혼의 긴장된 상호관계에서 위버멘쉬가 창조된다.
3. 짜라투스트라는 무지개, 위버멘쉬에 이르는 층계를 보여주는 자이다
놀라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서 모였던 군중은 더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되었다. 심층적인 측면에서 보면 줄을 타는 광대는 전통적 세계관에 대항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에서 사건이 끝난 뒤 밤 찬바람 부는 시장터에 홀로 남은 짜라투스트라에 관한 묘사는 참담한 그의 심정을 회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시장터에도 어둠이 깔렸다.…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내 밤이 되고 한 가닥 찬바람이 이 고독한 사람 위로 불어왔다."
짜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의 상징인 번개에 앞서 먹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무거운 물방울이다. 그러나 줄을 타던 광대만이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믿었던 유일한 사람이었고, 군중은 전통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어서,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에게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줄타는 광대가 죽어서 송장이 되자 군중에게 무의미한 것처럼 짜라투스트라도 마치 광대를 소개했던 변사처럼 무의미하고 고독하게 남겨진다.
이제 아침놀과 아침놀 사이의 깊은 휴식 끝에 짜라투스트라는 군중과 송장에게 더 이상 자신의 추종자를 구하지 않고, 더불어 창조할 길동무를 찾고자 한다.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동무가.…스스로가 원하여 내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려는, 살아 있는 그런 길동무가. 한 가닥 빛이 떠올랐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라는 군중이 아니라 그의 길동무들에게 말하련다!…나는 고작 가축 떼나 돌보는 목자가 되어서도 안 되며 송장이나 묻는 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군중과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죽은 자에게 말하는 것도 이것으로써 끝이다.
나 창조하는 자, 추수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들과 벗하리라. 나 그들에게 무지개를, 그리고 초인에 이르는 층계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보여주리라.…나 나의 목표를 향해 나의 길을 가련다. 머뭇거리는 자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자들을 뛰어넘어 가리라. 내 가는 길이 그들에게는 몰락의 길이 되기를!"
짜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 사상은 전통, 신앙, 도덕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실행되는 사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창조자는 창조를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창조자는 타인에 의해서 창조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창조의 결실도 스스로 수확해야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전통적 가치체계에 사로잡힌 자들과 이것을 옹호하는 자들과 결별하고, 그는 스스로 창조하는 자들에게 위버멘쉬 사상을 보여주려고 한다.
씨앗이 대지와 하늘의 조화로 인해서 익은 곡식이 되듯이, 빛과 물의 합주에 의해서 무지개가 생기고, 마찬가지로 육체와 영혼의 긴장된 상호관계에서 위버멘쉬가 창조될 수 있다.
무지개는 위버멘쉬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데, 무지개 사이에서 대립은 원환의 일부라는 점에서 직선에서처럼 극단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아니다. 무지개에서 대립은 원환의 일부로서 상호 간에 차이를 나타낼 뿐이다. 즉 무지개는 이원론적으로 양극화된 대립이 아니라 양 대립의 긴장 속에서 통일을 상징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무지개의 원환이 상징한 바와 같이 이원적 대립(선과 악, 참과 거짓)에 게으르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대립의 극복을 예시하는 자이다.
병들어 신음하는 자와 죽어가는 자들이야말로 신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생각해낸 자들이다. 사진은 로마 시스티나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 중에서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 추방을 그린 것으로 왼쪽에 뱀이 권하는 사과를 따먹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과 오른쪽에 천사에게 쫓겨나는 모습.
죽음은 삶의 마취제일 수도 자극제일 수도 있다
◆ 핵심용어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염세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의 삶의 의지(der Wille zum Leben)에 대한 대안으로 주조해냈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의지를 삶에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모든 존재들은 계속 삶을 유지하려는 자기 보존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삶의 의지와 연관된 염세주의에 반대하면서 니체는 삶을 힘에의 의지, 즉 세계에 반작용하기보다는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생명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열렬한 충동이라고 말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정치적 운용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심리학적 가설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실제로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 하에 가장 자주 찬미하는 것은 자기 훈련과 창조적 에너지다.
이런 의미에서 힘에의 의지로서 힘은 의지가 의욕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의욕하는 것이다. 니체가 우리 행위의 동기라고 말하는 것은 힘을 갖는 것이나 힘을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일들을 하기 위해 힘과 생명력을 증가시키려는 욕구이다.
1. 저편의 세계가 현세에서 삶의 의미를 좌우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얼룩소라는 도시에 연설가 그리고 스승으로서 체류한다. 짜라투스트라가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그의 제자라고 불리는 동반자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모여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의 변화'에 대해 말한다.
정신은 낙타와 같이 의무와 명령에 따라 무거움과 강함을 획득한다. 이 단계에서 정신의 좌우명은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정신은 낙타로부터 사자로 변화한다. 정신은 자유롭고,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을 위해서 정신은 전승된 가치를 의심하고 그리고 떨쳐버려야 한다.
이 단계에서 정신의 좌우명은 사자와 같이 '나는 하고자 한다'이고, 그리고 모든 이미 확정된 가치들과 덕들에 대한 '성스러운 부정'이다.
정신의 세 번째 단계는 사자로부터 어린이로 변화이다. 그래서 정신은 자신의 순진무구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정신은 자기 자신과 그 자신의 의지가 그에게 부가한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
이 단계에서 정신의 표어는 어린이와 같이 '성스러운 긍정'이다. 독자는 계속되는 짜라투스트라의 이야기에서 정신의 각 단계를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짜라투스트라는 현자로부터 잠과 덕에 관해 유익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현자는 잠을 자기 위해서 많은 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상 하루의 일상에서 잠은 작은 죽음이다. 잠을 죽음으로 생각하면, 잠을 잘 자는 기술은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이르는 기술이라고 하겠다. 열 번의 극복, 화해, 진리, 웃음, 유쾌함은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을 상징한다. 현자는 낮 동안의 모든 활동이 잠을 잘 자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이 활동들도 그리스도교의 가치들에 따른 행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자는 기존의 가치들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즉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자의 덕은 최후의 인간의 덕이다. 현자는 낮 동안에 덕스러운 활동을 한 사람은 신의 은총에 의해서 "부르지도 않은 덕의 주인이 한 순간"에 그에게 덮친다고 말한다. 또한 현자는 낮 동안에 이야기하면서도 잠을 자고 있다.
사실은 낮 동안의 활동이 밤에 잠을 잘 자기 위해서 있다는 것은 무의미의 극치이고, 낮의 활동은 잠을 자기 위한 수단이고, 삶은 죽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태어나자마자 죽으면 가장 행복한 삶이 된다. 이것은 극도의 삶의 무가치를 말한다.
"오늘날에도 여기 덕의 설교자와 같은 자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토록 솔직하지는 않다. 저들의 시대도 지나간 것이다. 저들은 더 이상 서 있지도 못한다. 벌써 누워 있지 않는가."
현자의 가르침은 현세에서 삶의 무가치를 말하고, 저편의 세계가 현세에서 삶의 의미를 좌우한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벌써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고 짜라투스트라는 중의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도 한 때 저편의 세계를 믿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삶의 피로감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 냈었다고 말한다.
"저편의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은 고통과 무능력, 그리고 더없이 극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자만이 경험하는 그 덧없는 행복의 망상이었다."
저편의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천상적인 사물들이 대지의 사물들보다 중요하다. 천상적인 사물들 속에서 그들의 정신은 부동적, 수동적, 맹목적이 된다. 따라서 이 정신은 대지에서 쓸모없게 된다.
짜라투스트라는 천상의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체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한 신체가 대지의 뜻을 정직하게 전해준다고 말한다.
"형제들이여, 차라리 강건한 신체에서 울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보다 정직하며 보다 순결한 음성은 그것이니. 건강한 신체, 완전하며 반듯한 신체는 더욱더 정직하며 순수하다. 이 대지의 뜻을 전해주는 것도 바로 그런 신체다."
2. 저편의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다
저편의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신체가 영혼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고 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영혼없는 신체는 단지 물질의 단순한 집합체로 생각하는 이원론자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
짜라투스트라는 신체와 영혼의 분리에 반대해서, 그는 신체 속에 이성, 정신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즉 신체는 이성보다 더 큰 이성으로서 자신의 신체의 부속되는 여러 가지 부분들을 이끄는 목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이성이나 감정에 이끌리는 가축 떼이기도 하다. 또한 신체는 작은 이성, 감정과 평평한 긴장 속에서 전쟁상태에 있기도 하고, 이러한 긴장을 극복하고서 평화롭게 있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체는 이성과 고정된 대립에 머물지 않고, 신체의 한 부분인 이성에 의해서 조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은 신체의 일부분으로서 신체를 잘 이끌도록 하는 도구이다. 다시 말해 이성, 정신, 영혼은 신체에 독립된 것이 아니고, 신체의 일부분이고, 신체의 도구이고, 이성은 신체를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신체의 부분이다. 신체와 이성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긴장상태를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성은 신체를 바탕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신체는 자신의 힘에 의해서 이성과의 긴장을 끊임없이 극복하면서 '힘에의 의지'의 원리를 구현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원론자들이 말하는 자아(Ich)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들은 자아가 정신적으로 사람의 고유성을 형성하고, 신체와 분리된 것으로 말한다.
"자기가 자아에게 명한다. '자, 고통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고통스러워하며 어떻게 고통을 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자아는 생각을 해야 한다. 자기가 자아에게 명한다. '자, 기쁨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기뻐하며, 앞으로 얼마나 자주 기뻐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그럴 수 있기 위해 자아는 생각을 해야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신체와 자아를 포함하는 자기(Selbst)로서 자아를 대체한다. 그에 의하면 자아가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이라면, 감각기능과 정신이 인식하는 것은 그 기능이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는 감각기능이 감지하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은 신체의 수단으로서의 기능이라고 말한다.
"자기, 그것은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제하고, 정복하며 파괴한다. 이 자기는 지배하는 존재인 바, 자아를 지배하는 것도 그것이다. 형제여, 너의 사상과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는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그것이 바로 자기다. 이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바로 자기이기도 하다."
짜라투스트라에 의하면 정신은 창조하는 신체의 일부분이다. 다시 말해 커다란 이성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으로 통합할 수 있고 그리고 동시에 신체의 통일로서 실현된다.
정신은 신체인 커다란 이성이 내재하는 의지의 한 부분인 손으로 창조하는 신체를 위해 활동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 자체의 산물인 저편의 세계를 만들었다.
3. 전사에게 죽음은 삶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자극제이다
삶의 고통을 피하고 영원한 안락을 위해서 죽음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죽음이 상존하는 전쟁터에서 삶을 살아가는 전사가 있다. 양자는 다 같이 죽음을 마주하지만, 한 쪽은 죽음에로 도피이고, 다른 쪽은 죽음과 대립해서 삶을 살아낸다. 죽음의 설교자에게 죽음은 삶의 고통을 피하게 하는 마취제이고, 전사에게 죽음은 삶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자극제이다.
"싸움터에 나가 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 너희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너희들과 같은 부류의 존재다. 너희들의 최선의 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도록 하라!…만약 너희들이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에서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위한 전사는 되어야 할 것이다.
전사야말로 그 같은 거룩한 과업의 길동무요, 선구자가 되니." 전사는 무리동물이 아니라, 대립의 극복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위버멘쉬를 지향하는 개인이어야 한다. 전사는 대립의 극복을 통해서 '힘에의 의지'를 현실화한다. 대립에 대해서 투쟁한다는 것은 대립들(선과 악, 참과 거짓 등)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짜라투스트라는 사상적으로 대립을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너희들은, 훌륭한 명분은 전쟁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고 말하려는가? 그러나 나는 말하련다.
훌륭한 전쟁은 모든 명분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고. 이웃사랑이라는 것보다는 전쟁과 용기가 위대한 일을 더 많이 해 왔다. 지금까지 불행에 처한 자들을 구해낸 것도 연민이 아니라 용맹이었다."
탁월한 적과 전쟁을 하는 것은 대립의 자기극복을 가능하게하기 때문에, 기존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모든 명분을 신성하게 한다. 따라서 이웃사랑이라는 기존의 대립에 고착된 행위보다 기존의 가치에 투쟁하는 것이 죽음에서 생명과 힘에의 의지로 가는 것이다.
전사에게서 대립을 극복하는 과정은 힘에의 의지와 삶이 고양되는 것이고, 또한 능동성을 계속적으로 발생시키는 최고의 희망이 되고, 결국에는 삶을 살아가는 원칙으로서 삶의 최고의 이념이 된다. 대립을 극복하면서 삶은 계속 고양되기 때문에 대립의 극복은 삶의 최고의 이념이 된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전사는 국가를 수호하는 계급으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에게서 전사는 위버멘쉬로 나아가는 전 단계로서 기존의 가치를 극복하는 활동성에 있다.
"이처럼 복종하는 삶,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랜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 어떤 전사가 자비를 구걸하랴! 나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노라. 나 너희들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노라, 싸움터에 나가 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전사는 강한 적과 마주하여 싸워야 하기 때문에, 전사에게 자비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전사에게 대립의 극복이 우선 과제이다. 그래서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오히려 마음속 깊이 사랑할 뿐이다.
이원론적 대립을 극복하고 '위대한 정오'를 찬미하다
1. 새로운 우상인 국가는 구성원들에게 정신의 낙타단계를 강제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초월적인 신에 대해서 의심하고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런 자신을 정신의 낙타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런 사람들의 자부심을 비웃듯이 "너희들은 낡은 신과의 전투에 지쳐 있고 지친 나머지 이제 새로운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우상이 바로 국가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옛 우상인 신의 죽음 이후 새로운 우상을 국가라고 말한다.
국가는 스스로 민족이라고 하지만 짜라투스트라는 민족과 국가가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차이를 나타내고, 국가의 거짓을 폭로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민족은 그 민족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창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 각 민족은 선과 악에 대한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한 민족은 다른 민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민족은 민족 구성원과 유기적 관계에서 형성돼 있다. 이에 반해서 국가정신은 구성원에 의해서 창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여러 민족들에게서 가져와서 인위적으로 자신의 정신으로 꾸며진 것이다.
즉 국가는 민족 구성원의 삶과 단절된 이질적인 상부 구조물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언어적 혼란, 이 징표를 나 국가의 징표로서 너희들에게 제시하는 바이다. 진정 이 징표가 함축하고 있는 것, 그것은 죽음을 향한 의지일 뿐이다. 죽음의 설교자를 불러들이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국가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선과 악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선과 악이 구성원들에게 적용될 경우에 국가는 혼란에 빠진다. 국가는 민족 간에 역사적으로 생긴 경계선들을 제거하고 다양한 도덕들을 유일하고 보편타당한 도덕에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다양성을 통제하는 가장 일반적이면서 가장 추상적인 규칙들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다양한 민족에서 살았던 국가 구성원들은 자신의 창조물과 이질적으로 분리된 선과 악 때문에 국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국가는 그리스도교의 영혼불멸이 아니라 법적·물질적 평등을 약속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서 죽음의 설교자를 불러들인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작은 이성의 자율성은 마비되고, 신체는 순수 물질화된다. 이러한 법적·물질적 평등의 추구에서 정신은 물질의 추상적 양으로 표현되면서 정신과 신체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창조성은 사라진다. 즉 물질에 의한 정신의 억압이 발생한다. 이러한 고착된 이원적 가치에서 죽음의 설교자가 나타난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에서 정신적 이념이 평등으로 고착됨으로써 정신적인 차이가 물질의 양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물질에 의한 정신의 억압 즉 대립의 양극에서 한 극의 고착으로 인해 삶은 직선적 대립으로 고착된다. 이러한 대립의 고착화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 나타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런 자들을 "창조하는 자의 업적과 현자의 보물"을 훔쳐내는 교양속물, "자신들의 담즙을 토해내고는 그것을 신문"이라고 부르는 저널리스트, 권력추구자로 지칭한다. 권력추구자는 먼저 권력의 지렛대인 많은 돈을 원한다. 많은 돈은 물질적인 욕구의 만족을 원천적으로 보증한다. 그러나 권력추구자는 실로 모든 계속적인 노력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조건을 얻으려고 헛되게 계속 노력한다. 실로 이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따라서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서 대립을 극복하려고 하는 힘에의 의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국가라는 우상 하에서 대립이 고착되어있고, 대립의 고착으로 인해서 물질적인 극만 비대해진다. 마치 한쪽에 쌓여있는 거름과 같이 양 극의 순환이 없는 물질적인 극은 악취를 풍긴다. 그러나 대립의 순환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대기와 바다는 맑고 악취가 없다.
"위대한 영혼들에게는 아직도 자유로운 삶이 열려 있다. 진정, 적게 소유하고 있는 자는 소유되는 일도 그만큼 적을 것이다. 복 있나니, 조촐한 가난은!"
대립의 양극이 원 운동하는 경우에 한 극에 지나치게 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조촐한 가난은 대립을 극복하게 하는 잠재력으로 작동한다. 대립의 한 극을 고착시키는 국가가 무너지면 대립을 자기 스스로 극복하는 무지개와 위버멘쉬가 나타난다.
2. 자기 자신과만 대화하는 위험에 벗어나기 위해서 코르크와 같은 벗이 필요하다
새로운 우상인 국가에서 보듯이 대립이 고정되어 있을 때, 무기력과 죽음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물질적 극에 고정되어있는 것과 다르게 은자는 고독 속에서 지식을 추구하는 정신의 한 극에 머무른다.
짜라투스트라는 은자가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독 속에서 물질적인 극과 다른 정신적인 극에만 머무는 위험을 경고한다. 은자가 정신적인 극에만 머물면서 자기 자신과만 대화하는 위험에 벗어나기 위해서 제3의 인물로서 벗이 필요하다. "이 제3의 인물은 마치 코르크와 같아서 나 자신과 나누는 나의 대화가 너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준다. 아, 은자에게 너무나 많은 심연이 존재한다. 그 까닭에 그들은 벗과 그 벗의 높은 경지를 동경하는 것이다."
은자에게 벗은 한 극에 고착되어 있는 것을 방지하는 반대 극이다. 그래서 은자는 현실에 대해서 인식하면서, 인식에로 침잠을 막아주는 생동하는 현실의 극으로서 벗이 필요하다. 은자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있는 많은 보물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 의식의 그물을 던진다. 그러나 은자의 그물은 완전히 자기 자신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그리고 자기 자신에의 몰두로 인해서 현실과 관계하는 객관적 인식을 마련하는 그의 본래적인 임무를 망각한다. 벗은 코르크처럼 은자가 완전히 자기 자신 가운데로 가라앉는 것을 방지하면서, 은자의 정신이 현실과 관계 맺도록 만든다. 따라서 벗은 은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위버멘쉬에로 이끌어 가는 대립극이다. 만약 한 사람이 벗이 가지는 대립성을 소실시키려고 한다면 벗에게 우정을 청하지 말고, 적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의 적이라도 되어달라!' 우정을 감히 청하지 않는, 진정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벗을 원한다면 그를 위해 기꺼이 전쟁을 벌일 각오라도 해야 한다." 벗이 진정 자기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안다면 벗과 적대하는 것을 불사하고 또한 벗을 위해 아름답게 치장해 벗이 현실과 이상의 긴장을 극복해서 위버멘쉬를 향한 동경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벗에 대한 연민으로 벗을 무기력하게 만들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짜라투스트라는 대립의 극이 무력해지는 다른 경우를 노예와 폭군이라고 말한다. "여인들의 가슴 속에는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와 폭군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연인들은 아직도 우정이라는 것을 모른다. 사랑을 알뿐이다."
여인들과 사내들은 긴장 속에서 대립을 극복하기보다는 한 극에 무기력하게 머무는 것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이 위버멘쉬가 되고자 한다면 그들은 대립의 한극에만 머무는 여자의 사랑과 남자의 동지 관계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상호관계 가운데서 최고의 관계인 우정에서 끊임없이 대립의 극복을 추구해야 한다.
3. 제자들이 짜라투스트라와 벗이 되어서 대립을 극복하는 위대한 정오를 함께 찬미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미 제자들에게 태양과 꿀벌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베풀었다. 그래서 태양이 원환을 돌듯이 다시 산으로 올라가려하고, 또한 꿀벌이 자신이 모은 꿀을 다 주고 다시 꿀을 모으려고 한다. 이제 그는 자신이 행하였던 것을 제자들도 스스로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처럼 자신이 했던 행위를 제자들이 그에게 준 지팡이의 금으로 된 손잡이를 비유로 말한다.
"제자들이 그에게 작별의 선물로 지팡이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금으로 된 손잡이에는 태양을 휘감고 있는 뱀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제 제자들이 그들 스스로 '힘에의 의지'의 원리에 의거해서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제자들이 준 지팡이는 그들 자신이 위버멘쉬 사상을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태양과 뱀은 원환운동을 통해서 대립을 극복하는 힘에의 의지를 상징하고, 태양은 하늘에서 빛나고, 뱀은 대지와 지혜를 의미한다. 뱀이 태양을 휘감고 있음은 천상과 대지, 정신과 신체의 통일과 '힘에의 의지'의 원리를 이해했음을 뜻한다. 짜라투스트라가 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는 것은 이 사상에 의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짜라투스트라는 금의 비유로써 자신의 베푸는 덕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한다. 금의 특징은 진기함, 비실용성, 광채 속에서도 은은함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가치관에서 신체는 정신이 없다면 텅 빈 질료 덩어리로 있고, 신체는 항상 정신의 보살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최고의 덕에서 신체는 상승의 주체가 된다. 신체가 베푸는 덕의 근원이고, 또한 신체가 씨앗으로서 정신을 품어서, 정신을 고양시키고, 또한 정신은 대지로서 신체를 더욱 비옥하게 한다. 이러한 순환은 이원론적 가치관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덕이다. 이 새로운 덕은 맹목적으로 순종되는 덕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의지'로서 스스로에게서 자율적으로 행해지는 의지로 실행되는 덕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제자들이 제자들(정신의 낙타단계)에서 형제들(정신의 사자단계)을 거쳐서 벗들(정신의 어린이단계)로 상승을 원한다. 이러한 이유로 짜라투스트라는 망설인 끝에 다시 한 번 혼자 길을 가려고 하고, 제자들도 한 사람씩 자신의 길로 가라고 말한다. 제자들이 스승과 같이 있으면 그들이 스스로 체득한 것이 아니라 스승에게 들어서 알게 된다. 그들은 들어서 안 것을 스스로 체험해서 안 것으로 착각해 정신과 신체의 괴리를 가져와 짜라투스트라의 원래 의도와 달리 다시 자신의 가르침(천상, 정신)을 그들의 체험(대지, 신체)과 분리해서 숭배하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로 인해 제자들이 짜라투스트라의 입상에 깔려 죽게 될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이 스스로 정신·천상과 신체·대지의 대립을 극복해서 '힘에의 의지'의 원리를 신체적으로 체득해서, 스승으로서 자기를 부정하고, 벗으로서 자기를 만나기를 원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이 자신의 벗이 되어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이원론적 대립을 극복하는 위대한 정오를 함께 찬미하기를 원한다. 이 때 짜라투스트라는 혼자 외치는 것이 아니라 벗인 그들과 함께 "모든 신은 죽었다" 그리고 위버멘쉬의 등장을 외칠 것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살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최후의 의지가 되기를!"
위대한 정오에는 태양인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대상(신체)과 그림자(영혼)가 통일되고, 이로써 이원적 분리가 허구임이 밝혀진다. 위대한 정오에서 인간은 분리된 대립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또한 이 변화가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인간은 위대한 정오에 대립의 극복을 인식하고, 그 스스로가 태양으로서 힘에의 의지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힘에의 의지의 구현체로서 위버멘쉬는 태양처럼 베푸는 덕으로 나타난다.
부산가톨릭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독일 브레멘대학
철학박사 하용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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