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가 사랑했던 단 한사람
소세양(蘇世讓 1486(성종 17)~1562(명종 17)
본관은 진주.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24세인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정자· 주서· 정언 등의 벼슬을 거쳐 수찬으로 있으면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하고, 대묘(大廟)에 위패를 두도록 했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이조정랑· 교리· 직제학 등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 그 뒤 왕자의 사부(師傅)와 승지 등을 지내고, 39세인 1525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갔고 1531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1533년 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35년 형조판서· 호조판서, 1537년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 1538년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에 타자 중종의 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베껴 다시 봉안했다. 1545년(인종 1) 대윤(大尹) 일파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尹任) 등이 몰락하자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냈다. 사직한 뒤에는 익산에 머물면서 여생을 마쳤다.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송설체(松雪體)의 글씨를 잘 써서 필명이 높았다.
퇴휴당(退休堂, 대나무 숲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한다는 뜻)이란 집을 짓고 태허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수령들이 인사 차 방문 시 은행나무에 관인을 걸어두고 인사를 했다고 해서 괘인정(卦印亭, 관인을 걸어놓는 정자)이라고도 하였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양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 등이 있다.
문정공(文靖公)의 시호를 받았는데, 文은 대제학을 지낸 사람만이 붙일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대제학이 6명 있었는데 홍문관과 예문관의 양 대제학을 지낸 사람은 소세양이 유일하다. 1999년 전주체련공원에 문학비가 세워졌다.(야음탄곡초사)
※ 황진이는 박연폭포, 서경덕, 명월(자신)을 송도3절이라 불렀다.
半月(반월) 黃眞伊(황진이)
誰斷崑山玉(수단곤산옥) 누가 곤륜산 옥을 떼어 내어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는가
牽牛離別後(견우이별후) 견우신랑 직녀아내 이별 후
愁擲壁空虛(수척벽공허) 시름에 겨워 허공에 던져 두었네
新月(신월).....7세때에 지었다 함. 소세양(蘇世讓)
誰斷蟾宮桂(수단섬궁계) 누가 섬궁의 계수나무를 깎아
裁成玉女梳(재성옥녀소) 여인의 빗 같은 저 달 만들었나
銀河一別後(은하일별후) 칠석날 은하에서 헤어진 뒤
愁亂탁空虛(수란 공허) 시름에 겨워 저 하늘에 던졌나
명월 황진이와 소세양의 이야기
임방(任埅, 1640-1724)의 수촌만록(水籿謹錄)에 보면
평소 몸가짐을 조심하는 소세양은 “남자가 여색에 빠지면 남자가 아니지”라고 했다. 어느 날 그는 송도 기생 황진이의 재주와 인물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한다. 내가 이 계집과 30일만 지내고 30일이 지나면 즉시 헤어지겠다. 그리고 만약 하루라도 더 머물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라고.....
소세양이 친구들에게 황진이를 유혹해 한 달간 동숙을 하리라 약속을 하고 송도에 와서 황진이를 찾았다.
소세양이 먼저 황진이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榴 - 석류나무 류(유)”.... 편지엔 단 하나의 한자만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본 황진이 역시 하나의 글자로 답장을 써서 보냈다.
“漁 - 고기잡을 어”였다.
“榴”의 뜻은 보면 碩(석), 儒(류), 那(나), 無(무), 游(유)가 된다.
해석을 하면..... "큰 선비가 여기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 "가 된다.
즉 "어서 와서 나랑 놀자" 라는 뜻이다.
황진이의 답장 “漁” 의뜻은...
高(고), 妓(기), 自(자), 不(불), 語(어)로.
해석을 하면..... "높은 기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하면..
"높은 기생인 나는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먼저 꼬시지 않으니 네가 먼저 직접 와서 말해라"가 된다.
둘은 어쨌든 한 달간 동숙을 하였고 이별 할 때는 황진이가 멋진 시 까지 남겼다.
奉別蘇陽谷世讓(봉별소양곡세양)
月下庭桐盡(월하정동진) 달빛아래 뜰 안의 오동은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네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과 한척사이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사람은 취하여도 술잔은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냉)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 향기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한 후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리움은 물결처럼 끝이 없이 흐르네
황진이가 누(樓)에서 읊은 위 시를 듣고, 소세양은 “그래 내가 사람이 아니지”라고 하고 사흘을 더 묶었다 한다.
그리고 소세양은 황진이의 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다음과 같은 시로 보답을 하였다고 한다.
달빛 아래 소나무만이 푸르르고
눈에 덮인 한포기 꽃들은 고개를 떨구었구나
강물은 하늘과 맞닿아 슬픈 줄을 모르고
쌓여가는 술은 그저 강물에 흘러갈 뿐
흐르는 강물은 나의 마음을 실어 보내주지 않고
저 멀리 절벽에서 살아남은 한포기 꽃은
아름다운 낙화를 보여 주는구나
내일아침 그녀를 보내고 나면
슬픔은 비가 되어 나의 몸을 짓누르리
한 달 후 슬픈 이별을 시로써 주고받은 후 헤어졌지만,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그 뒤로도 서로 인편에 시로써 안부를 전했다고 한다.
이때 황진이가 소세양에게 지은 시가 황진이 사후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린 그녀의 시구가 현대가요로 재탄생되어 들을 수가 있었다. 바로 이 노래가 이선희가 부른 “알고 싶어요.”이다. 님에 대한 내 사랑이 궁금하여 투정과 애교와 날 두고 떠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이다.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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