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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국화 옆에서>의 일왕 찬미 전쟁 찬미 / 김우종

by kimeunjoo 2010. 10. 26.

<국화옆에서>의 일왕 찬미 전쟁 찬미
                                                               김우종

  <차례>
제1장 서정주 <국화 옆에서>의 두 얼굴

  ㄱ. 가장 아름답게 위장된 국화


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국화
ㄷ. 무모한 시각 장애인視覺障碍人들
ㄹ. 민족 우롱 60년
ㅁ. <국화 옆에서>는 해방 후 친일문학
ㅂ. 국정교과서에서 삭제된 시

2. 어휘 분석
제1연
ㄱ. '생명파' 시인도 친일하고 전쟁 선동하나?
ㄴ. 잘못된 평가들
ㄷ. 인신어공人身御供
ㄹ. <귀촉도>와 소쩍새
제2연
ㄱ. 천둥 먹구름과 전쟁 실황
ㄴ. 국화가 일본 왕인 이유
ㄷ. 팥쥐와 계모의 무지
제4연
ㄱ. 무서리와 원폭
ㄴ. '살인자 '그루누이의 향수'와 국화향
ㄷ.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무서리
ㄹ. 왜 꼭 '노오란 꽃잎'인가
ㅁ. 왜 끝 연이 '무서리'인가
제3연
ㄱ. 거울 앞에 선 히로히토(裕仁)
ㄴ. 거울 앞에 선 아마데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
ㄷ. 젊음의 뒤안길에서 일어났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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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국화 옆에서>의 두 얼굴  
1. 한국문학사 최대의 스캔들 

  ㄱ. 가장 아름답게 위장한 국화
서정주가 <국화 옆에서>에 그린 국화는 두 가지의 상반된 얼굴을 지닌다. 아름다운 가면과 그 밑의 악마의 얼굴이다.
속은 악마지만 가면의 표피층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의 국화는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국화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실에서
인제는 돌ㅇ라 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는  '한 송이의 국화꽃'이 이처럼 '봄부터 소쩍새'가 밤마다 구슬프게 울어서 피어났다고 제1연에서 설명하고 있다. 꽃이 핀다는 것은 아름다움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쩍새가 울어서 이루어지는 어떤 성과를 아름다운 국화의 개화로 찬미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긴긴밤을 눈물로 지새는 아픔의 세월이 필요했다면 그것은 너무도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서 핀 아름다운 꽃이다.

주인이 온실에서 물 잘 주고 엄마가 제 자식 보살피듯 잘 가꿔서 핀 꽃이라면 특별히 감동받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서정주의 국화는 그렇게 밤마다의 구슬픈 울음과 그 고통의 결과로 피어난 꽃이라기에 가슴을 울린다. 그 감동적 효과가 꽃의 미적 가치를 더욱 상승시킨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다음에 서정주의 천둥과 먹구름의 험악한 환경에서 국화가 피어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경을 극복하고 이루어진 성과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를 더욱 아름답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엷은 커텐을 통해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좋은 그림이 걸려 있고, 의사와 간호사가 자주 찾아와 친절한 말을 건네주는 일류 병원에서의 출산보다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군사들에게 쫓기며 힘들게 살아남는 아기 예수의 이야기가 더 감동적인 이유는 그 탄생 과정에 시련이 있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국화는 그런 시련의 꽃이란다. 그래서 그 감동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켜 준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것은 마지막의 제 4연이다. 여기서 서정주의 국화는 그해 겨울 첫서리가 내리자 다른 꽃들이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 죽어 자빠진 자리에서 혼자만 고고하게 피어난 꽃이라기에 더욱 아름답다는 의미로 읽히기 쉽다. 꽃 가게에서처럼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수많은 꽃들 속에 함께 묻혀 있는 국화였다면 그것만 특별히 감동적일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서정주의 경우는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다른 꽃들이 ‘무서리?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몰사해버린 자리에 저 혼자 강인한 힘으로 그 추위를 이겨내며 피어난 것이라기에 가슴을 울린다. 그래서 그 감동이 아름다움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킨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세계의 어떤 국화도 이처럼 아름다운 수식어로 장식된 국화 꽃은 없다.

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국화 
그런데 이것은 매우 엉성한 분장으로 시늉만 한 아름다움일 뿐이다. 너무 엉성해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 밑에는 무서운 악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연꽃과 수선화가 피어 있는 맑은 호수를 들여다보다가 그 속에 있는 물귀신을 보고 놀라게 되는 경우와 같다.
서정주의 국화는 악의 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악한 꽃이다.
서정주의 국화는 그가 <귀촉도>에서 그린 이미지와 꼭 같이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나가서 억울하게 죽은 후 소쩍새가 되어 우는 그 피맺힌 한과 눈물과 피를 마시고 핀 것이기 때문에 악마의 붉은 입술같은 악한 꽃이다.
서정주의 국화는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오고 천둥같은 소리가 울려오지 않았다면 피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정주의 국화는 전쟁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수많은 죽음의 댓가로 피어난 꽃이다. 그러므로 그 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피 비린내가 나는 추하고 악한 꽃이다.
서정주의 국화는 이렇게 살아 있는 희생의 제물을 바쳐서 비로소 피어났던 악의 꽃이다.
한 송이 국화가 그냥 식물로서의 국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모든 생명들이 다 죽은 자리에서 혼자 살아남은 그것은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서리를 내리게 한 원인이 국화에게 있고 그런 짓을 해야만 혼자 피어날 수 있는 꽃이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화 옆에서>는 선한 꽃과 악한 꽃의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온갖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피어난 꽃은 도덕적인 교훈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와 달리 온갖 슬픔과 고통을 남에게 주고 그들을 희생시켜서 피어난 국화라면 더럽고 악하다.
그런데 왜 이 같은 이중 장치를 해 놓았을까?
네 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시에서 아름다운 국화의 이미지는 악의 꽃에게 입힌 의상의 역할을 한다. 악마에게 착한 천사의 옷을 입힌 것과 같다. 그리고 작자는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한다. 악마적 탐미주의인 셈이다.

둘째, 독사처럼 남을 물어 죽이더라도 기왕이면 꽃뱀일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으로 상대를 유혹한 다음에 물어 죽이면 되니까. 곱게 화장하고 향수 냄새 풍기며 유혹해야 멍청한 사내들이 잘 넘어가듯이 서정주가 반민족적 문학을 팔아먹으려면 그처럼 아름다운 꽃의 이미지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셋째, 이 시를 쓸 때는 일본이 물러 가버린 뒤였다. 종전되기 전이라면 직설법으로 침략전쟁과 일왕을 찬미했겠지만 그들이 가버린 뒤였기 때문에 본심을 조금쯤 가리는 위장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베일 밑으로 흉악한 악마의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넷째, 서정주가 <국화 옆에서>에서 말한 것은 이 같은 악의 꽃이다. 그리고 이것을 최고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의 작업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모든 반민족적 반인류적 행위를 아름다움을 위한 시인의 순교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서정주는 보들레르와 니체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보들레르의 글을 처음 사귀던 때나 지금이나 그가 우리 시문학 속에서 가장 뼈저리게 자기를 시에 희생한 사람이기 때문에 친밀감을 느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니체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도 밝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영겁회귀자-초인超人…(중략)…은 그 당시에 내 가장 큰 지향이기는 했던 것이다?라고.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시인이다. 그 때문에 형사적 처벌도 받았다. 그런데 서정주가 보들레르의 아류가 되면서 여기에 니체까지 접목시켰다면 그 문학은 무엇이 될까?
서정주의 국화는 이렇게 피어난 악의 꽃이다. 다만 보들레르가 그의 시에 스스로 ‘악의 꽃?이란 이름을 달고 그 시집 때문에 법정에 섰던 것과 달리 서정주는 그 ?악?을 아름다운 베일로 감추며 위장하고, 권력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막고 처벌을 피한 후 장수하다가 죽어서도 지금까지 우리 국민을 속여 오고 있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국민과 국가까지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는 프랑스의 나치 점령 시절에 살지도 않았지만 그의 <악의 꽃>에서는 그런 민족 배반 인류 배반의 피비린내는 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서정주는 우리 민족을 배반하고 인류를 배반했다. 그의 <국화 옆에서>는 잔혹한 침략 전쟁에 대한 찬미이며 총사령관 일본 “천황폐하?에 대한 찬미이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고향에서는 <국화 옆에서>를 기념하기 위해서 해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국화꽃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그 동네는 담벼락과 지붕 꼭대기까지 국화 그림이다. 어느 신문은 서정주가 죽은 지 몇 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의 <국화 옆에서>는 감미로운 가곡이 되어서 가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ㄷ. 무모한 시각장애인 詩覺障碍人들  

시각視覺 장애인도 잘 하는 것이 많지만 큰 거리에 나가서 교통정리만은 해서는 안 된다. 그처럼 시적 감각이 무딘 시각詩覺 장애인은 시를 함부로 논하고 교과서를 만들어 국민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 더구나 침략 전쟁 찬양과 반민족적 친일 행위가 서정주 정도에 이르는 경우에 그 무딘 상상력이 저지르는 것은 국가적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시간에도 TV에서는 현대시 100주년 기념행사가 중계되며 많은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의 시가 낭송되고 있다.
서정주의 음모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그 후 여러 문인과 교수들의 문학 안내가 결국은 진실을 모르고 따르는 순진한 국민들로 하여금 일본 ‘천황폐하?와 침략전쟁 찬미가를 자신도 모르고 합창해 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도 함께 부르고 있으니 이것은 너무도 부끄러운 민족의 스캔들이 아닌가? 독도 수호와 독도 침략자 찬가를 함께 부르면 어느 쪽이 대한민국 국민의 진심이라 말할 수 있을까?

ㄹ. 민족 우롱 60년 
서정주는 2000년 12월에 죽었지만 그의 국화 이야기는 지나간 역사의 옛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면 그가 부르게 한 침략전쟁 선동과 일본 왕 찬미가는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국화 옆에서>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친일 반민족행위자임을 알면서 여전히 그를 국민적 시인 급으로 대접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 민족적 과오다.

이것은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민족과 인류에 대한 학살 행위로서의 침략 전쟁과 그 최고 통수권자를 찬양하는 문학이 곳곳에서 거룩한 표정으로 낭송되고 암송 대회가 벌어지며 국민을 열광시키는 한 그것은 언제라도 다시 우리 민족과 인류의 평화에 대한 도전이 된다.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서 너 편 시를 고르면 거기서는 늘 윤동주의 <서시>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상반된 양심과 비양심의 극치를 보여 주는 현상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시인이 동시대에 등장하고 또 그들의 대표작이 그렇게 다 같이 사랑받아 온 예는 없다.

가장 순결한 양심과 더러운 비 양심은 김광균 <설야>의 흰 눈과 김기림이 <시론>에서 사용한 말을 빌리자면 ‘똥통에서 건져낸 낙태한 XX?같은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이것은 천사와 악마의 차이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이 두 가지를 우리가 다 같이 사랑해 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낯 뜨거운 스캔들이다. 천사와 악마를 다 같이 우리들 가슴속에 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이유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가 일본으로 가기 직전에 원고지에 써 놓고 간 <서시>는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시다. 이와 반대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는 그 생명을 말살해 버린 죽음의 묘지 위에 그것을 거름으로 해서 ?국화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얼마나 희한한 국화이기에 그것은 그렇게 피를 먹고 피어나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그보다 두 살 아래였던 윤동주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에게 이를 위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그 길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렇게 말하고 결국은 현해탄 너머 후쿠오카의 차가운 감방에서 옥사했다. 1945년 2월 16일 새벽이다.
그런데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그와는 정 반대의 길에 서 있었다. 윤동주가 그렇게 자기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에서)라고 말하며 인류 생명의 구원을 희구한 그 소중한 생명들을 수없이 학살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며 그 학살의 총사령관을 찬미한 것이다. 그런데 서정주의 시가 윤동주와 나란히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의 사랑을 받으며 거의 국민시의 수준에 있으니 이렇게 황당하고 부끄러운 일이 어디 또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민족적 스캔들이며 그 책임은 서정주만이 아니라 결국은 그를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격찬해온 일부 문인들과 교수들에게 있다. 그리고 일부 국민도 책임이 있다.

우리 국민 다수가 <국화 옆에서>에 살짝 감춰진 서정주의 기만과 음모를 잘 알면서도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해 온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반 국민은 전문가인 교수나 문인들의 해설과 국어 교사들의 가르침대로 따라가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서정주의 친일행위는 소문이라도 몇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전연 몰랐다면 그 무관심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유럽이나 일본이나 미국 등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거기서는 민족적 양심을 그렇게 배반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살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너그러운 것인가?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과오를 다시 반복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그 같은 과오는 시에 대한 잘못된 해석 태도도 원인이 되었지만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민족적 양심을 배반한 무리들이 해방 후에 오히려 더 힘이 뻗치는 지배적 권력을 걸머쥐게 되었고 많은 문인들도 그 분위기에 대한 저항력을 잃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민족의 역사에는 비극도 있고 영광도 있고 수 만 가지 사건이 다 있으며 그렇게 이리 저리 흔들리며 미래의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 역사지만 그런 역사적 사건 종목 속에는 <국화 옆에서>와 같은 것은 다른 나라에는 없다.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창피한 사건이다. 왜냐면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식민지 백성으로서 비참한 종살이를 해온 백성이 그 가해자가 물러 간 뒤에도 여전히 그들의 왕을 경배하고 찬미한 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 아무도 말리기 어려운 지경이다.
이 시는 국정 국어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그런데도 서정주는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성역이고 그가 죽자 국가는 최고의 문화훈장을 그의 영전에 바쳤다. 교과서에서 삭제시켜 달라는 요청에 따라준 국가와 훈장 달아준 국가가 따로 있는 셈이다. 그런데 친일문학이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삭제시켜 준 것은 군사 독재 정권이고 최고훈장을 달아 준 것은 민주정권인 국민의 정부 때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나라 같다.

<국화 옆에서>는 다른 많은 문인들이 저질렀던 친일문학과는 다르다. 그냥 일왕을 찬미하고 전쟁을 미화한 정도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찬미하고 일왕을 그런 의미에서 찬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가장 반민족 반인류적인 범의犯意가 농후하다.

일왕 찬미는 물론 친일문학이다. 그리고 친일문학은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흥미를 가질 필요도 없다는 다수 의견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어느새 친일의 역사적 과오를 캐지 못하도록 누군가에 의해서 끊임없이 세뇌되어 온 것이다. 일반인만이 아니라 문인들도 그런 경향이 많다.

ㅁ. <국화 옆에서>는 해방 후 친일문학  
그런데 <국화 옆에서>는 해방 전의 친일문학이 아니다. 이것이 발표된 것은 이미 일본인들이 항복하고 공포에 떨며 보퉁이 한 두 개씩만 겨우 챙기고 허겁지겁 물 건너 가버린 지 2년 3개월이 되는 1947년 1월 9일에 '경향신문'에 발표된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황당한 일이다. 발표시기가 이렇기 때문에 이것이 일왕 찬미가라고 하면 누구도 믿기 어려워진다.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도망가는 가해자들을 향해 계속 아부하는 친일문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해방 후 작품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정주는 해방 뒤에 버젓이 중앙의 일간지에 이것을 발표했으며 그 내용은 살짝 국화꽃 문양의 베일을 입혀서 가리는 시늉만 한 일왕 찬미가다. 이때 그는 수개월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이승만 곁에서 그의 전기를 쓰고 있으면서 이것을 발표했다.

일본 국민 다수는 패전 후에도 여전히 '천황폐하'를 마음속에서 받들었지만 서정주처럼 찬미가를 쓰지 않았다. 탐미주의에 기울어 있던 미지마 유키오가 '천황폐하' 중심의 군국주의시대 복귀를 선동하다가 할복자살한 미치광이이지만 그도 서정주 수준의 악마적 탐미주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 참담한 부끄러움은 이것이 발표된 후 지금까지 흘러 온 역사의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국화 옆에서>는 지금(2008년)까지 60년의 긴 역사를 우리 문학사의 일등칸에 앉아서 버티어 온 작품이다. 그리고 여전히 힘이 막강하다.

ㅂ. 국정교과서에서 삭제된 시 
<국화 옆에서>는 1990년쯤에 국정교과서에서 삭제되었고 지금도 그 상태다. 내가 국정교과서 개편 마지막 심의 때 이를 요청했고 교육개발원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후 국정교과서에는 지금까지 서정주의 문학이 실린 바가 없다.
1990년대 초에 국정 국어교과서에서 이 시가 삭제된 것은 서정주가 공개적으로 국가로부터 받은 유일한 모욕일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이에 의해서 다음 해에 노태우 정권이 만들어졌다.
새 정부는 국정교과서 개편작업을 문교부 편수국에서 한국 교육개발원으로 잠시 옮겼었다. 이때 새로운 국어교과서에 대한 마지막 심의가 양재동에서 열렸으며 여기에 국어교과서를 심의하기 위해 참여한 위원은 나 혼자뿐이었다. 이때 다른 과목보다도 특히 “국어 교육은 민족교육?이므로 민족을 배반한 친일문인의 글은 삭제되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국화 옆에서>는 약 40년 만에 교과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문인의 시가 윤동주처럼 조국의 해방을 위해 애쓰다가 옥사한 시인과 함께 나란히 교과서에 실려 있으면서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은 애국자에 대한 모독이며 우리 민족의 장래를 망치는 교육이 되기 때문에 삭제를 요구한 것이다. 그 후 이 같은 문교부의 조치에 시비를 걸며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칼럼이 중앙의 일간지에 발표된 일이 있지만 문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날이 갈수록 의미를 잃게 되었다. 검인정 교과서에는 이것이 마음대로 게재되고 있으며 지금은 국정 교과서 존립의 의미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어휘 분석 
제1연
ㄱ. '생명파 시인'도 친일하고 전쟁 선동하나? 
<국화 옆에서>는 잔혹한 침략 전쟁의 실상을 그려 나가며 일왕을 찬미한 시다. 그리고 이 그림의 표면에 아름다운 국화 무늬의 엷은 베일을 덮고 살짝 가리는 시늉만 한 것이다.

사발만한 유방을 다 들어내도 유두에 동전만한 스티커 하나만 붙이면 유방을 가렸다고 봐주던 출판물 검열이 있었듯이 이 시는 일왕 찬미를 다 들어냈지만 살짝 이용한 은유법 때문에 알 사람은 알고 모를 사람은 모르게 했다. 다만 알 만한 사람은 알더라도 베일을 씌운 것은 사실이니까 시비를 걸면 잡아떼고 피할 장치는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내용을 의심할 만한 사람이 있어도 맞설 수 없던 1947년의 특수 상황 속에서 이 시는 표피만 핥아가며 무리하게 칭찬만 하는 쪽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이다.

이렇게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조건하에서 나타난 칭찬이라면 그 어떤 것도 진실일 수가 없다.

ㄴ. 잘못된 평가들 
이 시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설이 붙고 있다. 어떤 생명이라도 모두 어려운 노력이나 시련의 대가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것이다. 거의 모두 그렇게 배우고 가르쳐 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시를 바로 읽을 자세만 되어 있다면 쉽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김현승 시인(전 숭실대 교수)은 이 시의 주제를 “생명의 신비성과 존엄성?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와는 정반대다. 생명을 가장 잔혹하게 말살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그런 결과로 태어난 악마의 자식을 찬미한 것이 <국화 옆에서>가 아닌가?
그런데 김현승의 해석은 혼자만의 새로운 해석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국어 참고서에 나타나고 있는 유사한 해석의 하나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로되 얼마나 많은 섭리와 준비 와 동원과 참여가 있어야 하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김현승 <한국현대시해설> 1974년 관동출판사)

이 시를 불교의 인연설로 해석한 다른 국문과 교수의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주만물의 모든 현상들이 서로 인연을 맺고 얽히며 힘이 합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으므로 역시 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을 주장한 것이다.
‘생명의 신비성과 존엄성?이라는 것은 그를 일반적으로 ?생명파 시인?이라고 불렀던 것과도 같은 맥락을 지닌 해석이다. 그런데 과연 그는 그렇게 생명의 신비성에 감동하며 그 존엄성을 주장한 시인이었을까?
아무리 하찮은 생명이라도 그것이 참으로 많은 신비한 섭리와 준비와 동원과 참여가 있은 뒤에 탄생하는 것임을 알고 그 존엄성을 존중하는 시인이 젊은이들을 왜 개죽음의 침략전쟁 터로 나가라고 선동했나?

ㄷ. 인신어공 人身御供 선동
  친일문학의 친일이란 연예인들이 일으킨 한류 열풍 같은 문화적 공감과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제말기의 친일문학은 민족 해방 운동과는 반대로 민족의 영원한 예속을 위해 일본의 침략 정책을 찬양하고 우리로 하여금 이를 위해 목숨과 제물을 바치도록 선동한 문학이다. 한 일본 작가는 이를 인신어공人身御供이라고 표현했다. 어공은 일왕에게 바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민족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일본 젊은이들의 운명도 꼭 같았다.
통신마저 끊어진 전군에게 “최후의 일병까지 싸우고 유구한 대의大義에 살라?고 무기한 전투명령을 내리고 자결한 우지마 사령관의 죽음은 여자 어린애들을 포함해서 수습할 길 없는 단말마의 양상을 낳았다. ….(중략) …. 그 후 한없는 희생의 강요, 본토 결전의 인신어공人身御供이 되고 있었다.
                               (<마쓰이 류우지의 장편소설 <청춘의 유서>에서)

이것은 일본이 후퇴를 거듭하던 오키나와 전투의 양상을 일본작가가 말한 소설의 한 장면이다. ‘여자와 어린애들까지 모두 수습할 길 없는 단말마의 양상?이라고 한 것은 젊은 군인들만이 아니라 살아 있던 모든 일본인의 죽음을 의미한다. 소위 전원 ?옥쇄 玉碎?라고 말한 실상을 증언한 것이며 여기에는 물론 그곳에 있던 한국의 젊은 병사들과 위안부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 육군대신 도죠히데키가 만든 전진훈陣訓前 ?살아서 포로의 욕을 당하지 말라?를 갓 난 어린애들에게까지 강요해서 죽인 것이다.
이처럼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도수장으로 끌려 나가 도축되는 짐승들의 운명이며 이를 선동한다는 것은 살인행위의 공범이며 반민족적 반인류적 행위다. 그래서 반민족행위 처벌법(반민족행위 특별법)도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길거리에서 허우적거리는 게으른 조선의 청년들?이라고 동족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자식들을 어서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어머니들을 선동하고 기만한 서정주의 시와 산문들은 어떻게 봐야 하나? <국화 옆에서>에 대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나타낸 것이라는 학술적인 평가를 내리고 생명파 시인이라고 가르쳐 온 논문과 저서를 낸 사람들은 이런 서정주의 반생명 문학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을까?
<국화 옆에서>의 제1연에서부터 그런 생명의 존엄성 운운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를 보자.
이 시를 읽으면 일단은 아름다운 국화꽃이 그려진다. 그 꽃은 가녀린 새의 슬픈 울음소리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아름답기는 하지만 슬픔을 간직한 꽃이다. 화려한 장미나 모란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슬픔을 간직한 꽃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바르게 해석하고 논리적 사고력과 상상적 사고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이 시속에 그려진 아름다운 국화 꽃밭의 풍경은 착각을 유도하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국화 종목에 속하더라도 시골 길가에서 만난 국화와 장례식장의 국화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그려진 국화는 모양도 다르겠지만 느낌도 다르다. 그처럼 모든 단어는 그것이 쓰인 장소와 시기와 이유와 방법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물론 문학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그렇지만 이를 공표하고 가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작자와 독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작자는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쓰고 발표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며 발표작은 만인에게 바르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시도 언어 예술이다. 언어를 표현 매체로 삼으니까 언어예술이다. 그리고 시인은 거기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일반인은 따르기 어려운 전문적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어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섬세한 감각 없이는 단 한 개의 단어라도 함부로 남용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서정주는 그런 의미에서 남달리 언어예술의 기법에 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입장에서 제1연에서는 중심 소재가 되고 있는 ‘국화?와 ?소쩍새?의 정확한 의미부터 바르게 해석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실인지를 봐야 한다.
이 해석이 내려진 것은 국화꽃이 그냥 쉽게 피어난 것이 아니라 매우 어렵게 피어났다는 개화 과정에 대한 설명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울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생명이라도 매우 힘든 노력의 결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보편적 진리를 서정주가 나타냈다는 것이다. 김현승의 해석도 그것이고 다른 교수의 불교적 인연설도 그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생명 존중 사상이라면 이런 식의 존엄성 부여부터가 엉터리다. 정당한 주장이 될 수 없다. 힘들게 태어나지 않고 산모가 어떤 고통도 받은 일 없이 호강만 하다가 최고급 의료원에서 무통 분만 했더라도, 또는 철없는 쾌락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에 불과하더라도, 또는 강간 살인범에 의해 태어났더라도 생명은 다 같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생명 존중 사상이다. 여기에 그 생명이 얼마나 어렵게 태어난 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모든 생명을 고귀하게 존중해야한다는 참된 생명정신에 위배된다.

<국화 옆에서> 제1연도 국화꽃이 얼마나 어렵게 피어난 것인가 하는 과정 설명이다. 국화꽃이 그냥 쉽게 핀 것이 아니라 봄부터 그렇게 소쩍새가 울었기 때문에 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렇게 소쩍새가 봄부터 밤마다 울지 않고 쉽게 피었다면 국화꽃의 존엄성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사실은 생명의 존엄성이란 평가도 많은 문인과 교수들이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이지 서정주 자신이 밝힌 주장도 아니다. 시의 내용은 그와는 정반대다. 한 송이 국화꽃이 힘들게 피어났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힘들게 탄생하는 모든 생명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휴머니즘이나 불교적 생명 사상은 서정주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오히려 서정주는 그런 생명들은 모두 하잘 것 없는 것들로서 짓밟아버려도 좋다는 주장이다. 그런 짓밟기의 과감하고 힘든 과정을 통해서 피어나게 될 단 하나의 생명인 ‘한 송이 국화 꽃?만을 그는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소쩍새의 울음'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국화꽃을 피게 한 어떤 과정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힘든 과정인 것도 인정된다. 봄부터 늦가을 서리 내릴 때까지 밤마다 울었다면 소쩍새들도 참으로 힘들었을 터이니까.
그렇지만 탄생을 축하하고 그 존엄성이 인정되려면 힘들었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노력 자체가 존엄해야 한다. 고귀한 정신이 스며 있는 노력이어야 한다.
힘든 것은 많다. <죄와 벌>에서 라스코리니코프가 전당포집 노파와 그 조카를 죽인 것도 대단히 힘든 살인이었고 그 때문에 그는 살인 후 열병환자처럼 신음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행위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 때문에 살인이 미화되거나 정당화 될 수 없고, 그 결과로 전당포 집에서 들고 나간 장물들이 미화되고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을 미화하고 정당화한 것은 라스코리니코프 자신뿐이었다. 서정주도 이런 라스코리니코프와 같은 유치한 논리를 그의 친일 시에 도입한 것이다.

ㄹ. <귀촉도>와 소쩍새



소쩍새와 죽은 넋들
이 시에서 봄부터 그렇게 울었다는 소쩍새 울음은 가엾게 죽어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해 한이 맺힌 망자亡者의 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어 멀리 가버린 후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 망자의 울음이다. 서정주 자신이 그런 의미로 소쩍새 울음을 시어화詩語化해서 상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용례用例가 그렇고, 특히 이를 다른 시 <귀촉도>에서 그가 사용한 시기가 거의 동시적이기 때문이다.

또 이 시들의 소쩍새 울음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일치한다. 전쟁은 끝났는데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한숨과 눈물의 세월을 보내는 많은 가족들이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즉 제1연은 그렇게 중국 땅에서 태평양에서 죽어서 그 넋이 소쩍새가 되어 한 맺힌 울음을 토하게 만든 많은 생명들의 댓가로 저 혼자 고고하게 살아남은 일본 천황폐하를 아름다운 국화꽃에 비유한 것이다.
1947년의 <국화 옆에서>와 1948년 시집 <귀촉도>는 같은 해방직후가 된다.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굽이 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1948년 <귀촉도> 제3연에서)

이 시의 제1연에서는 '진달래 꽃 비오는 서역삼만리西域三萬里가 나오고, '흰 옷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巴蜀三萬里'란 말도 나온다. 이별의 슬픔을 표현한 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는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저승 세계, 극락의 세계이며 작자는 그 죽음의 길을 고운 진달래꽃으로 장식하여 이별의 슬픔과 가는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한껏 심화했다.
여기서 '다시 오지 못하는 파촉 삼만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고국 또는 고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님이 '귀환 불능점인 파촉으로 가버린 것이다'라고  어느 교수의 <서정주 평전>(2008년) 내용은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작자 자신이 시에서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라 했는데 거꾸로 파촉으로 갔다고 해석했다.
이 시는 중국에서 촉나라가 망한 후 진나라로 끌려가서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버린 많은 병사들이 소쩍새(귀촉도)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귀촉도 귀촉도歸蜀道 歸蜀道' 하며 피맺힌 울음을 울었대서 그 이름이 귀촉도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전쟁과 죽음과 이별의 이미지를 따온 것이다.
작자는 이 시의 말미에 귀촉도와 소쩍새, 접동새, 자규는 모두 같은 새 이름이라고 주석을 붙여 놓았다.
그렇다면 그는 <국화 옆에서>에서처럼 소쩍새란 단어를 써도 되었겠지만 '촉나라로 돌아오는 길’이란 한자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의미하고 그 전설을 통하여 내용을 더 구체화하고 싶어서 ?귀촉도'를 썼을 것이다.
'소쩍새'와 달리 '귀촉도'에는 전쟁과 죽음의 의미가 구체화된 전설이 붙는다.
그러므로 이 시는 전쟁 직후라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 때는 바로 2차 세계대전 직후가 된다. 1931년의 만주침략부터 따지면 15년 전쟁이 끝나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는 돌아오지만 죽은 자는 소식도 없이 그 혼이 소쩍새가 되어 밤마다 피를 토하며 뒷동산에 찾아와 울던 때가 된다.
이 무렵에 전쟁터에서 아들이나 아비나 형제자매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기다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눈물바다를 이루는 대단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돌아오지 못하는 가족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당시의 대중가요 <귀국선>은 그 같은 민족의 감정적 감정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들려준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울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던가 타국살이에
몇 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새날이 크다.
            (1946년 손로원 작사)

 

태평양의 그 넓은 바다와 육지에서 살아 돌아오는 귀국선의 뱃노래는 이렇게 감격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은 귀국선에 타는 대신 날개를 달고 진작부터 고향의 뒷동산까지 날아와 있었다. 소쩍새가 되어서 날아 와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국화 옆에서>에서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었나 보다'라고 말한 소쩍새이며 <귀촉도>에서는 서역 만 리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청상과부를 울리고 있는 귀촉도다.

신이나 삼아 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이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귀촉도> 제3연)

<귀촉도>와 <국화 옆에서>에 나타나는 이 새는 이처럼 다 같이 8.15 직후에 서정주의 시에서 동시 등장한 것이며 그것은 비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귀촉도>에서는 전사자들의 죽음이 유족에게 얼마나 큰 슬픔을 주는 것인지를 나타낸 것인데 반하여 <국화 옆에서>에서는 그런 죽음들이 원료가 되어줌으로써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이 태어날 수 있는지를 말하며 그 살인행위를 정당화하고 살인자를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우리 민족의 생명과 자국 국민들을 희생시킴으로써 홀로 살아남은 ‘천황폐하?를 위대한 인간의 새로운 탄생이라고 추켜세우며 그 살인행위를 정당화 하고 살인자를 미하하고 있는 것이 <국화 옆에서>다. 이것은 아마도 일본인들이 봐도 크게 당황할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이라도 자국의 왕을 그렇게 악마로 만들어 가며 추켜세우지는 않으니까.
소쩍새가 다른 곳에서 쓰인 사례를 보자.


소녀를 이리 말고 능지처참하여 박살하여 죽여주면 죽은 뒤에 원조怨鳥라는 새가 되어 초혼도 함께 울어 적막공산 달 밝은 밤에 우리 이 도령님 잠든 후 파몽이나 하여 지이다. …<춘향전>

내 님을 그리자와 우니다니 산 접동새난 이슷하요이다. ….<정과정곡 鄭瓜亭曲>

두견이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 김영랑 <5월의 아침>

접동새, 우는 접동새야/ 네 우지 말아라/ 무슨 원한이 그다지 골수에/ 사무치길 레/ 밤중만, 빈 달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느니 …신석초 <바라춤>

춘향전에 나오는 원조怨鳥는 소쩍새를 말하는 것 같다.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긴 촉나라 망제가 죽어서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우는 원조가 되었다는 전설의 새는 소쩍새다. 그러므로 춘향전이나 이 전설에 나타나는 소쩍새의 울음과 그 밖의 예문에 나타나는 것은 대개 억울하게 죽은 원귀의 울음이다. 그리고 '피나게 운다.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운다. 피어린 울음' 등 모두 피가 빠지지 않고 있다.

<정과정곡>은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접동새(소쩍새)의 울음에 비유했기 때문에 원귀의 울음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전설이나 시에 나오는 소쩍새의 울음에는 원망의 뜻이 있고 그것은 죽은 자의 울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정주의 <귀촉도>에 나오는 이미지와 일치한다.

소쩍새가 밤새도록 울다 가버린 나무 밑에 가보면 핏자국이 있다고 한다. 이것도 소쩍새가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운다는 전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물론 그 핏자국은 소쩍새가 밤에 잡아먹은 들쥐 같은 짐승의 피겠지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나보다?는 이렇게 보편적으로 쓰이는 의미대로 정직하게 받아들이면 봄부터 그처럼 억울하게 죽은 자의 원과 한이 맺힌 울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정주의 한 송이 국화꽃은 그 죽은 자의 슬픔과 원망과 피를 먹고 피어난 꽃이며 이것은 잔혹한 악마주의자에 대한 찬양이다. 다만 이 꽃이 일본왕을 의미하더라도 서정주의 이 같은 비굴하고 추악한 아부가 실제 일본왕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될 수는 없다. 일본왕이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켰더라도 그 결과 더 위대해지고 더 아름다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 지위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앉도록 조치되었기 때문이다.

제2연  
ㄱ. 천둥 먹구름과 전쟁 실황 
제2연도 한 송이 국화꽃이 물이나 잘 줘서 쉽게 평범하게 핀 것이 아님을 말한다. 먹구름 속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많이 났기 때문에 피었다는 것이니까 김현승의 해석대로 탄생 과정의 신비함이 나타나고 있으며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힘들게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런 신비성이나 힘든 과정 때문에 그 생명이 존엄하다는 주장은 전연 논리적 타당성이 없다. 생명은 태어난 과정과 상관없이 똥물에서 태어난 구더기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이 참된 생명 사상이다.

그리고 굳이 그 태어난 과정에 의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가리려면 그 과정 자체가 바른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먹구름 속의 천둥 번개는 그런 이미지가 없다.
먹구름과 천둥소리에 가장 가까운 비유적 풍경은 전쟁이다. 총소리 대포소리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융단 폭격이 바로 먹구름과 천둥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다. 이보다 더 가까운 이미지는 절대로 따로 없다.
천둥과 먹구름은 무대가 하늘이다. 그런 하늘의 무대를 그처럼 먹구름으로 만들고 번쩍번쩍 불이 일게 하고 온 세상이 무너질 듯 굉음을 낼 수 있는 것의 가장 가까운 비유는 전쟁밖에 없다. 길바닥의 뻥튀기는 귀청이 떨어진다 해도 이에 비하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부엌의 프로판 가스 폭발도 그 규모는 하늘의 먹구름과 천둥에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전쟁 속에서는 그야말로 하늘로 먹구름이 치솟고 불길이 치솟고, 몇 십리 밖에서 일어난 전쟁은 검은 하늘에 천둥 번개치는 경우와 너무 비슷하다. 그러니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다는 것도 가장 가까운 이미지대로 바르게 읽으면 전쟁을 했기 때문에 그 꽃이 피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전쟁이 그 요상한 구미호 같은 국화꽃의 탄생을 위해 꼭 있어야만 했던 필수적 과정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문학작품에 대해서도 아부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아리송하고 애매모호하고 몽롱하고 어리둥절한 과찬을 한다. 우리는 이런 아부를 멈추고 정직하게 그리고 아주 쉽게 작자가 말한 대로 가장 가까운 단어 풀이를 해야 한다. 그러면 먹구름과 천둥소리는 곧바로 전쟁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전쟁임을 전연 짐작하지 못한다면 그는 전쟁 영화도 한번 못 봤거나 병역 기피자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힘든 과정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만 했었다면 그 꽃은 참으로 비싼 꽃이다. 그렇지만 존귀한 꽃은 아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처럼 비도덕적인 꽃이며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보들레르를 훨씬 능가하는 잔혹한 악마주의적 꽃이다. 보들레르를 격찬하며 그를 아름다움의 창조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킨 가장 훌륭한 시인인 것처럼 말한 서정주는 여기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꼭 같은 시 또는 그 이상으로 악마적 탐미주의 문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화해 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반역행위에 대한 변명이 되니까.

ㄴ.국화가 일본왕인 이유                                                        

그러면 그 국화꽃이 왜 일왕 히로히토냐를 말해야 되겠다.
이 시가 발표되던 1947년 당시의 이미지대로 가장 쉽게 받아들이면 일왕 히로히토가 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면 무조건 대한민국이듯이 ?국화꽃이 피었습니다.? 했으면 무조건 일왕 히로히토다. 매일 동쪽의 일본 궁성을 향해서 90도 허리 굽히고, 그러다가 떠들기라도 하면 얻어 터져가며 뼈저리게 배운 것이 그것이니까 서정주가 그때 국화꽃이 피었다고 시로 말했으면 무조건 일왕을 연상시켰다고 봐야 한다. 물론 아니라고 말할 노인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식민지시대의 민족적 슬픔을 전연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역사를 잊은 건망증 현상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화 옆에서> 가 발표된 이듬해 1948년에는 일본에서 <국화와 칼>이 출판되어 280만권이 팔렸다. 미국의 여류 인류학자 베네딕트가 정부 측의 부탁으로 쓴 일본 연구서다. 일본에서 그만큼 소동이 일어나니 한국에도 알려지고 지금 젊은 세대들도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책이다. 그만큼 국화가 일본 왕실 또는 일본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이니까 <국화 옆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해석이 따르게 된다. 그런데 왜 이를 부인하며 애매모호하게 고귀한 생명 탄생이라고 추상적인 빈말들을 하는 것일까?

가장 일반적인 반론과 변명은 이런 것이다.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이 국화라는 사실만으로 <국화 옆에서>의 국화를 일본 왕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만일 그런 식의 유추가 가능하다면 다른 모든 문학 속의 국화도 일본 왕이냐고 반문한다. 아마 전국의 장례식장 마다 조문객들이 죽은 자의 영전에 한 송이씩 바치는 국화도 모두 일본 왕이란 말이냐고도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사실로 이런 의문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반론을 위한 반론, 또는 변론을 위한 변론보다도 시를 바로 이해하려는 정직성이 있다면 이런 질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어휘는 사전적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면서 하나의 문장과 문단과 작품 전체 속에서 저마다의 다른 의미를 함께 지니게 된다. ‘소쩍새?가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과 달리 <국화 옆에서>에서는 그 작 품 전체를 그의 세계로 삼고 거기에 맞는 의미를 지니게 되듯이 ?국화?도 작품 전체 속에서 그 것만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앞에서 인용한 <귀국선>의 대사 중에는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이 있다.
무궁화는 대한민국 국화이므로 태극기나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유代喩로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집집마다 정원에 관상용으로 무궁화를 심었더라도 집집마다 대한민국을 심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무궁화?가 오랜 세월동안 조국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귀국선상에서 <귀국선>이란 제목으로 부른 노랫말 중 하나의 단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조국을 의미한다. <국화 옆에 서>의 ?국화?도 그렇게 소쩍새와 먹구름과 천둥과 무서리와 거울 앞에 선 누님 등이 총 출연한 무대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다. 그러므로 이 국화가 일왕을 상징한다는 것은 일왕실의 문장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이 시세계 전체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국화에 대한 결론이다. 이것을 다른 작품 속의 국화나 장례식장의 국화등과 다 같은 국화라고 한데 섞어 비빔밥을 만드는 논법은 여간 유치한 것이 아니다.

 ㄷ. 팥쥐와 계모의 무지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콩쥐를 찾아 낸 것은 개울가에서 주운 신발이 콩쥐 발에 꼭 맞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왕자가 유리구두 (사실은 모피 구두)의 주인공을 찾아 낸 것도 잃어버렸던 한 짝이 신데렐라 발에 꼭 맞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한국 중 어느 쪽이 그 옛날에 이 신발짝 스토리를 먼저 쓰고 나중에 훔친 것인지도 궁금하지만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신발에 꼭 맞는 주인공이 나왔으면 가짜는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국화 옆에서>의 국화가 일본왕이 아니라는 주장들이 그렇다. 꼭 맞는 신발 임자가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며 추잡한 불륜이다. 팥쥐와 그 계모의 탐욕이다.
서정주의 국화는 소쩍새가 봄부터 그렇게 울어대서 피어났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렇게 작심하고 소쩍새가 울었다는 투다. 그렇다면 우선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실제로 그런 화초는 세상에 없으니까 은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쩍새의 은유적 의미를 앞에서 설명했다.
 서정주 자신이 그와 같은 시기에 쓴 <귀촉도>에서도 그랬듯이 그것은 전쟁 속에서 억울하게 가엾게 죽어서 멀리 서역만리로 가버린 사람의 구슬픈 울음이며, 한 송이 국화꽃이 그래서 피어난 것이라면 그 은유적 의미는 일본왕 밖에 없다.
그런 전쟁을 15년간 해온 이본의 임금님이 1947년 바로 그 시기에 그렇게 남들 다 죽은 무덤에서 새 얼굴로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것은 서정주의 주관적 해석일 뿐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객관적 사실은 꼭 같다. 이렇게 꼭 맞는 신발짝을 부인하려면 다른 신발을 가져오고 반론을 제기하면 될 것이다.
국화는 일왕 히로히토다. 제1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2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으로 재생했다면 이것 역시 생명의 존엄성과는 반대다. 전쟁은 사람 죽이기니까.
같은 시기에 같은 서울에 살면서 곧 전쟁터에서 죽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자기 한 목숨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허락된다면 십자가에 매달리겠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었는데 서정주는 같은 시기에 그 같은 생명의 집단 학살자들에 가담하더니 해방 뒤까지도 그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4연  
ㄱ. 무서리와 원폭 투하 
제3연은 마침내 국화꽃의 정체를 저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 일본의 건국 신화를 인용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논리 전개의 편의상 제4연부터 보자.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제4연)
 
제4연에는 주제를 위한 주요한 제시어가 두 개 있다. '노오란 네 꽃잎'과 '무서리'다.
이것은 원폭 투하로 세상이 몽땅 죽음의 공동묘지가 된 자리에서 혼자 살아남은 일왕을 나타내는 극적인 마지막 무대를 나타낸다. 그래서 제1연 제2연과 함께 전쟁 스토리의 마지막 대단원 구실을 한다.
무서리는 그 해에 처음 오는 묽은 서리다. 된서리와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작자는 된서리의 뜻으로 쓴 것 같다.
무서리이든 아니든 서리는 영하로 기온이 하강해야 내리는 것이므로 첫 서리가 내리면 다른 꽃들은 다 얼어 죽고 해가 나면 걸레 조각들처럼 축 늘어진다. 끓는 물에 데쳐낸 시금치도 그처럼 축 늘어진다. 국화는 이렇게 다른 꽃들이 모두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뒤에 홀로 싱싱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피어 있다는 것 때문에 더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자연의 경우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렸다면 무서리는 노오란 꽃잎이 피어나게 한 원인이다. 그러니까 무서리가 내리지 않았다면 노오란 꽃잎은 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 속의 국화는 이렇게 피지는 않는다. 다른 꽃들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남들이 죽거나 말거나 그와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앞마당에도 피고 뒷동산에도 피고 그러다 가버린다. 그런데 이 시의 노오란 국화는 무서리가 내려서 다른 꽃들이 모두 몰사했기 때문에 핀 것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라고 했으니까 이 국화는 남들이 다 죽어야만 피는 악의 꽃이 아닌가?
혹시 노오란 꽃잎이 피려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것은 국화꽃의 개화를 알리는 징조를 말한 것이지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 무서리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 세상에 무서리가 내리고 다른 꽃들이 다 그렇게 몰사를 당해야만 피는 꽃은 없다.
국화는 무서리가 내리기 전부터 피어 있다가 무서리 때문에 남들 다 죽은 자리에 혼자 살아남을 뿐이지 그때 그렇게 남들이 죽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다가 피는 꽃이 아니다. 어느 꽃이든 그 꽃들이 아무리 양심이 없더라도 남들이 죽어주기만 기다리다가 피는 경우는 없다.

ㄴ. '살인자 그루누이의 향수'와 국화향

   


이런 의미에서 제3연도 제1연 제2연과 함께 너무도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체 주제가 전쟁의 이미지로 모아지고 그런 죽음의 피와 눈물과 원한과 가족들의 슬픔을 마심으로써 아름다운 새 생명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 새 생명은 물론 일왕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로 만들어진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영화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아름다운 여자들을 납치하여 찜통 속에 넣고 이를 원료로 해서 진짜 명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체포되어 10만명이 모인 광장에서 처형을 가다리게 되지만 군중은 모두 그가 뿌린 향수에 취해서 서로 껴안고 달콤한 사랑에 도취한다.
서정주가 피어나게 한 아름다운 국화는 이와 같으면서도 그 범죄는 그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제조 과정은 전 인류의 몰살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한 송이의 국화는 최고의 위대한 아름다움이며 그런 예술을 위해서는 그따위 하찮은 벌레들은 아무리 죽여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국민 절대 다수는 그 향수에 취한 탓인지 제조과정에 숨겨진 작자의 악마정신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루누이가 살인죄로 광장의 처형대에 올려졌는데도 달콤한 향수에 취하여 부끄러움 모르는 사라의 행위만 즐기듯이 <국화 옆에서>의 국화 향기에만 취해서 그 베일 밑에 숨겨진 악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국화 옆에서>이야기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된다.

ㄷ.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무서리 




'무서리'는 단 한방으로 14만명의 생명을 죽인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말한다.
그것은 1945년 8월 6일 아침이었다.
이 날 미군의 B 29폭격기는 히로시마의 오타 강 위쪽 6000미터 고공에서 원폭을 투하했고 인구 약 40만명 중 25프로가 그날로 즉사했다. 폭풍과 함께 지열이 6000도로 상승하고 온 세상이 순식간에 날아가 벼렸으며 방사선 낙진으로 그 후에도 사람들이 계속 죽었다.
폭탄은 원자다시 나가사키에도 투하되었다. 두 차례의 원폭 투하의 피해자들 중에는 물론 징용으로 동원된 사람들을 비롯한 한국인들도 많았다. 한국인 피폭자 약 7만명 중 4만명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그 후 2만여명이 귀국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시에서는 그런 숫자까지 밝힐 필요는 없다. 그냥 전쟁 속에서 남들은 다 죽었는데 히로히토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하면 된다. 다만 무서리가 내려서 하룻밤 사이에 다른 풀들 다 죽었는데 국화만 혼자서 살아남았다고 하면 가장 적절한 감동적인 은유법이 된다.
일왕 히로히토의 히로시마 시찰 장면을 보면 서정주의 무서리와 국화가 그대로 떠오른다.
 



그는 원폭이 투하된 후 군복 차림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었다. 다른 때처럼 금빛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지는 않은 모습이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원폭 투하 후 9일 만에 8.15 항복 선언이 있었으니까 군복 차림이면 원폭 투하 후 약 일주일 사이에 찾아간 것이다. 뜨거운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며 불타버린 폐허를 시찰하는 히로히토… 그야말로 국민이 다 죽고 난 공동묘지에 혼자 씩씩하게 살아남은 모습이다. 무서리가 내려서 다른 꽃과 풀잎들이 하루 밤 사이에 다 얼어 죽고 축 늘어진 자리에 혼자 살아 있는 국화와 과연 무엇이 다르랴.
서정주의 상상력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놀랍다.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를 찾아 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믈 것이다.
8.15 항복 선언(실제로는 선언문에는 항복이란 말은 단 한 마디도 없다.) 후 일본의 도쿄만 해상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 조인식이 있었을 때 일왕은 체면을 유지하고 그 대신 시게미쓰重光 마모루 외무대신을 보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상해에서 왼쪽 다리를 잃고 살아남은 외교관이 절뚝거리며 나타났으니 한국인에게는 더욱 감개무량한 장면이다.
그 후 전범 재판이 열리고 A급 전범들은 사형이 시작되었다. 시게미쓰 등 몇몇은 나중에 석방되어 사형을 면했지만 특급 전범자인 일왕은 그런 재판도 안 받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훗날 사형당한 전범들도 야수쿠니 신사에 합사되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말썽이 일어났었다.
이때 최고 통수권자였던 일왕은 천황폐하'의 명예를 그대로 유지하며 혼자 살아남았으므로 그는 혼자 살아남은 국화가 된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상징표도 국화이고.
맥아더 사령관이 그렇게 일왕만 특별히 재판 없이 살아남게 했다. 다만 일왕은 신의 위치에서 내려와 인간의 위치에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런 일왕의 변화는 그가 남들 모두 동사한 자리에서 혼자 요행히 살아남은 국화에 비유 될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한 서정주의 인식은 달랐다. 그는 일왕의 변신을 더 멋지고 위대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지배자, 정복자에게만 허락된 수많은 인명 학살의 결과로서, 비록 항복은 했더라도 더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본 것이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많이 학살과 파괴를 저지르고도 패배한 후에는 살아남아 센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것을 여전히 멋진 모습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 정신은 아주 다르다.
김동인의 <광화사>에서 화가가 소녀의 목을 졸라 죽였기 때문에 먹물이 눈동자에 찍혀서 명화가 탄생 된 것, 또는 <광염 쏘나타>에서 천재음악가가 살인과 방화들을 함으로써 역사에 남을 명곡이 만들어졌다는 것처럼 이것은 전쟁을 찬미하고 우리 민족을 배반한 악마주의자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ㄹ. 왜 꼭 '노오란 꽃잎'인가? 
제4연은 국화의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제1연 제2연에선 그냥 국화꽃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제4연에서는 '노오란 꽃잎'이라고 색깔을 밝혔다.
일본 왕실 문장紋章이 노오란 황국이기 때문에 이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다.
'메이지 천황' 때부터 특히 황국을 그들의 문장으로 애용하더니 그가 죽은 후 그를 신으로 모신 메이지 신궁의 도리이(대문 같은 것) 이마에는 노오란 국화 문장이 붙여졌다.
문장기법에는 강조법이 있다. 첫째 둘째 연까지는 그냥 국화라 하고 마지막에 노오란 국화라고 색깔을 말했으면 그것은 전형적인 강조법이다. 국화 색을 분명히 알려주는 강조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 시의 끝 연에 해당한다. 마지막에 가서 분명하게 일왕 히로히토라는 것을 다짐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색중에서 오직 황색을 선택하고 그 색을 끝 연에서 특히 강조법으로 사용한 의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서정주 고향의 300억 송이 황국 축제를 비롯해서 온 나라에 전염병처럼 노오란 색이 번져 가는 추세지만 친일파를 찬미하는 문인들이 이렇게 설치기 전까지는 황국 세상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화투짝이 있고 9월 국화가 노랑이지만 그것도 일본인이 만든 것이며, 들판에서 우리를 반기는 들국화는 대개 보랏빛이고 흰색도 많다. 그러므로 '친일파 처단하자' 소리가 미 군정 정책으로 억지로 입이 봉해진 상태일 때 가장 적극적이던 친일문인이 그냥 국화도 아닌 황국을 강조한 것은 일왕 찬미를 노골적으로 밝히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ㅁ. 왜 끝 연이 '무서리'인가? 
무서리 내린뒤의 국화
그리고 제3연은 전쟁의 진행 과정을 더욱 확실하게 설명한 것이다. 왜냐면 그 전쟁은 마지막의 원폭 투하로 개끗하게 결론이 난 것이니까. 서정주가 마지막 연에서 무서리가 내렸다고 한 것도 이처럼 전쟁 진행과 결말을 정확하게 순서대로 말하며 스토리의 대단원을 장식한 것이다.

제3연  

ㄱ. 거울 앞에 선 히로히토 裕仁 




제3연은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여기 나오는 누님과 거울은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아마데라스오미카미와 거울임을 김환희란 분이 인터넷을 통해서 수년전에  밝혔었다. (필자도 잘 몰랐고 문단에서도 언급된 바를 보지 못했지만 이분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며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표면적으로 제 3연은  화끈한 연애질로 젊은 시절 다 보내고 귀향한 여인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데 이 베일에 가려진 밑그림은 일왕 히로히토다. 실제로 거울 앞에 선 것이다. 화장을 하려고 선 것은 아니다. 40년대 한국 여인이 화장을 하려면 방바닥에 주저앉아야지 서서 하지는 않 는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 옆에서>의 제3연은 시로 쓴 소설이다. 시도 이야기를 담으면 더 인기가 높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이 젊은 날의 정열적인 사랑의 기쁨과 슬픔과 오랜 방황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뜨거운 사랑으로 청춘의 세월을 보낸 추억을 갖고 싶을 것이다. 특히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결혼 후 집구석에서 부엌데기노릇 여편네 노릇만 해 온 과거의 여인들이라면 이런 시를 통한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자기도 실컷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연애'를 간접적으로 해 보고 한을 풀고 싶은 보상심리가 많았을 것 같다.
시 속의 여인은 고향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오랜 방황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이젠 그리운 고향에 돌아 온 여인이다. 눈가에 살짝 주름이 지고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 그렇지만 예전보다 더 아름다움의 깊이가 있다. 오랜 세월 겪어 온 시련으로 전에는 없었던 내면적 성숙함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옆에는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한 남자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내 누님이라고 했으니 남자 동생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야위고 수척해진 모습을 동정하면서도 다른 모든 풀잎 들이 푸르죽죽하게 다 죽어 자빠진 뒤에 홀로 고고하게 피어 있는 국화꽃처럼 더 아름다워졌다고 찬미한다.
그런데 제1연 2연 4연이 모두 일본 왕이 전쟁 저지르고 끝낸 다음의 모습을 그린 것이듯이 3연도 그가 전쟁 저지르고 끝낸 다음의 이야기가 된다.
이 시를 바로 읽으려면 패전 당시의 일본왕의 모습과 그들의 건국신화를 상상해 봐야 한다.
일본왕 히로히토는 항복 후 맥아더 장군을 예방했었다. 이때 맥아더는 후줄근한 군복차림으로 예복 차림의 히로히토를 맞아 주었다. 참담하게 일본왕실 가문 망신을 주고 나라를 망친 모습이다.
일본을 이렇게 망쳐 놓았으면 히로히토는 그 다음에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을까?

ㄴ. 거울 앞에 선 아마데라스오미카미  


 
그 다음 순서는 당연히 조상 앞에 나가서 그 사실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도 결혼하면 사당의 조상께 고하고, 과거 급제처럼 크게 출세해도 고하고, 집안을 망쳐 놓았어도 조상께 고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다. 그처럼 일본 왕 히로히토는 1924년 결혼식 때 조상에게 고하기 위해 그 앞에 나갔었고 1926년 즉위식 때도 그랬었다. 그것은 그의 조상 아마데라스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식을 거행하는 것이며 그곳에는 그 조상을 상징하는 신기神器 거울이 있다. 아마데라스오미카미가 캄캄한 동굴에서 나올 때 들고 있던 거울(야다노가가미)이다.(삽화 참조) 다른 신들이 동굴입구에 걸어두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아마데라스오미가미가 거울 앞에 섰을 때 해가 반사되어 온 세상이 밝아졌다는 건국신화 때문에 일본기도 해 그림이 되고 때로는 햇살이 퍼지는 문양도 쓰인다.
히로히토가 나라 망친 후에도 그곳에 갔다는 기록을 찾지는 못했지만 즉위식이나 결혼식도 그 앞에서 하며 조상께 고했다면 항복 후에도 당연히 그랬다고 상상할 수 있다.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란 바로 그 모습과 일치한다.
'내 누님'이라면 남자 동생을 설정해 둔 표현이다. 남동생은 누구인가? 일본의 건국신화에서 그것은 스사노오노미코도를 말한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고사기古事記에 의하면 이 두 남매는 한반도의 가야국에서 도일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일제말기의 한일 동조론同朝論도 이런 역사서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만일 일제말기의 친일파들이 따라 부르던 대로 서정주도 한일동조론을 여기서 인용했다면 “내 누님'은 한국인 스사노오노미코도의 누님이다. 그러니까 서정주가 일본 왕 선조 아마데라스오미가미를 '내 누님'이라고 말해도 논리적으로 틀리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선 여인’이 일본왕의 시조 아마데라스오미카미라는 것은  이미 김환희씨(직함 미상)가 인터넷에서 밝힌 바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신화와 관계없이 제 1연 2연 4연이 일왕이 저지른 전쟁 실황의 시적 이미지라고   분석한 것과  달리  다만 신화 속의 아마데라스오미카미와 서정주의 국화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힌 것인데 이것은 정확하고 귀중한  판단이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선 누님'도 우리는 작자가 말한 대로 정확히 읽어야겠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선 누님’에서 우리는 젊은 시절 사랑의 정열을 다 불태우고 귀향한 누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이라 했으니 그것은 참으로 기쁨과 설레임도 많았고 아쉬움도 많았던 뜨거운 정열의 사랑임을 상상하게 되며 '뒤안길'이라 했으니, 그것은 남녀관계가 대개 그렇듯이 남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지닌 과거사를 상상하게 해 준다.
여기서 주제를 설명하는 가장 주요한 제시어는 ‘거울 앞에 선 누님'과 '젊음의 뒤안길'이다.
여기서 '인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을 얼굴이나 들여다보려는 누님으로 읽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젊은 시절 다 보내고 귀향한 누님이라면 그 사이에 얼마나 얼굴이 변했는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얼굴을 보려면 서 있지 말고 앉아서 봐야 한다.

거울은 문간에도 붙여 놓고 장롱에도 붙여 놓고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의자생활을 하지 않던 시절이라면 여자는 거울을 앉아서 본다고 해야 자연스럽다. 큰 화장대라도 앉아서 사용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얼굴 보려고 거울 앞에 서 있다고 한 것은 오래간만에 귀향한 한국 여인의 모습으로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결국 얼굴 들여다보는 여인이 아닌 것을 말한다.
국화와 소쩍새 울음과 천둥과 먹구름과 무서리 등 모든 핵심소재가 공통적으로 지닌 이미지가 일왕과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한 것이라면 제3연도 여기에 알맞은 이미지가 쉽게 들어날 것이다.
일왕 히로히토는 아마데라스오미가미의 직계 후손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데라스처럼 생긴 히로히토다. 손주 새끼니까 할머니를 닮을 수밖에.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고 닮은꼴임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있다. 실제로 이세신궁의 거울 앞에 와 서 있는 것이다. 나라를 망쳐 놓았으니 그렇게 거울 앞에 서는 것이 순서다.
아마데라스오미카미는 여신이다. 스사노오노미코도 素盞嗚尊의 누님이다. 그러니까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이 된 것이다. 특히 이 남자 동생은 친일파들이 주장하던 대로 한일 동조론에서 보면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은 '거울 앞에 선 우리 한국인의 누님'도 된다.
히로히토의 다음인 아키히토 일왕도 68세 생일 때 기자회견에서 일본 천황의 모계 혈통에 백제계의 피가 섞여있다고 했었다.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어머니 다카노노니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임을 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서정주가 전연 밑도 끝도 없이 일본의 아마데라스오미가미 귀신을 내 누님이라 부르고 히로히토를 그 누님같이 생긴 녀석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ㄷ. 젊음의 뒤안길에서 일어났던 일들 
이런 히로히토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큰 사건을 많이 일으켰다. 그래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날도 많았을 것이다.
연애도 잘 하면 아름답지만 나쁜 연애질이면 남들에게 많은 슬픔을 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겐 아름다운 로맨스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되며, 그러다 아무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이나 들여다보며 옛 추억이나 씹고 살 것이다.
사실로 지금 야스쿠니신사 참배하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공언하는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모두 그런 추억을 씹으며 사는 군국주의자들 아닌가? 물론 그들은 일왕 찬미가가 여전히 이 땅에서 합창되고 있는 한 다시 군가를 울리며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시절에 대한 추억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

히로히토가 그렇게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젊음의 뒤안길 시절은 언제인가?
일본은 그의 이름으로 1931년에 만주를 침략해서 삼켜 버렸다. 만 30세가 되었으니 가장 정력이 왕성하던 젊은 시절이다.
그리고 10년 후인 1941년에 미국과 영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햇다. 만 40세 때다. 그리고 44세 때 항복했다. 그러니까 가장 정열적인 사랑에 빠지고 그 때문에 가슴이 설레이며 일도 많이 저질렀을 때에 그는 연애 대신 전쟁을 한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일본왕의 30세 기념행사와 40세 기념행사로 불꽃놀이 하듯 시작되어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짓밟아 버렸다. 물론 히로히토가 자기 혼자 모든 것을 진행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그가 최고 통수권자였던 것이 사실이고 그는 이 때 마치 푼수 없이 날뛰며 욕망을 불태우는 여인처럼 일을 저질러 나갔다. 만주를 삼키고 다음에는 햐쿠닝키리百人斬殺의 일본도 학살 경쟁 등 살인마의 광기로 30만 난징학살을 감행하고 731부대에서는 생체실험을 감행하고 아시아 전체를 지옥으로 몰아갔다. 대동아공영권을 만든다는 것이었으니 원대한 목표에 대한 '그리움'도 많았을 것이고 실패로 인한 '아쉬움'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다가' 다 망해버려서 맥아더 장군 앞에 찾아가 깊은 절하며 목숨 살려 준 고마움에 대한 인사 나누고 돌아온 히로히토. 그때 나이 만 44세이니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불혹의 중반에 들어선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신이 아니다. 다음해 1946년에 일본 헌법은 히로히토가 일본국의 상징적 존재로서만 남는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새로 탄생한 것이다.
서정주가 다음 해에 <국화 옆에서>를 발표하며 말한 '한 송이 국화꽃의 피어남'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딱 맞는다.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음에 그 죽음의 묘지에서 원한이 맺힌 소쩍새들의 울음소리로 피어나고 피를 먹으며 피어났고 그래서 새 헌법에 의한 인간 북귀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새로 태어났다고 서정주는 말한 것이다.

시의 내용 전문이 이렇게 정확하게 일왕 히로히토가 일으킨 전쟁실황과 패전 후의 결과까지 완전히 일치한다. 콩쥐가 잃어버렸던 신발 한 짝이나 신데렐라가 잃어버렸던 신발 한 짝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적 사실과 시의 내용이 딱 들어맞는다.
그런데 그렇게 항복한 일왕이지만 그는 여전히 일왕이니까 국화꽃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그의 샤머니즘 신당神堂에 모시고 있던 신이니 아름답게 노오란 국화로 표현한 것이다.

서정주는 스스로 미당未堂이라 했다. 그가 샤머니즘의 의식 세계에 있으면서 이렇게 일왕을 자기 문학의 신당에 모셔 오고 있었으니 그도 반쯤은 무당임을 자부하면서도 아직 미숙한 미당인 ‘미당? 이라 했을 가능성이 많다.
무당집에서는 맥아더장군을 모시기도 했다. 일본에선 이순신 장군도 모시고 안중근 열사를 가미다나神棚에 모시는 집도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애매한 신보다는 실제로 가장 존경하거나 가장 실력이 있고 자신의 운명에 영향력을 미치는 현실적 신을 모신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는 미당이 ‘천황폐하?를 모시고 친일문학을 한 것도 그의 사악한 욕망을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일왕이 실권을 잃고 인간 선언을 한 이상 이미 신당에 모셔질 가치가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찬사를 보내며 작별을 고하고 다음으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이승만의 마포장에 출입하며 그를 만나고 곧 대통령이 될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 그 같은 일왕과 이승만의 교체 행사를 의미한다. 벽에서 하나는 내리고 다른 하나를 거는 정중한 의식이었다.
그 후 광주의 피바다를 만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될 때 그를 극찬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이 같은 악마적 친일문학 기법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그루누이의 향수'다. 그루누이는 많은 미녀들을 납치해서 찜 통 속에 넣고 삶아서 우려낸 물로 명품 향수를 만들어 냈다. 한국의 독자들은 지금까지 그 향수에 취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향수는 일본 왕이 30세 때 일으킨 만주사변으로부터 40세에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끝나는 1945년 8.15 때까지 15년간 희생된 수많은 생명의 피와 눈물을 원료로 해서 만들어진 향수다. 서정주는 그 향수에 국화 상표를 붙여서 내다 판 것이다.
그루누이의 향수가 달콤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정주와의 KBS 스튜디오 녹화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선생님, 지금 우리가 시를 안 읽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시만 안 읽습니다. 서생님의 시에는 우리 모두의 아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내게 고함을 지르면서 녹화 도중에 벌떡 일어나서 나가 버렸었다.

"시가 사회의식만 찾으면 모두 망쳐 버린단 말이오"

그로부터 20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지금도 우리 문단에 살아 있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침략전쟁, 천황폐하 찬미가'를 부르는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휴먼메신저>2008년  겨울호.  다음에는 해방 후에 감히 이 시가 발표될 수 있었던 친일배경과  악마적 탐미주의에 대하여 논함)

(야스쿠니 신사의 국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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