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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유안진 시인 시모음

by kimeunjoo 201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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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을 줍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시집 '다보탑을 줍다'에서>

 

 

기러기 서릿길                    

유안진

헤매어온 인생에서 묻어나는 늦가을 냄새와
헤매임이 남아 있는 눈빛에 얼비치는 초겨울 빛깔로
만났다고 하랴
헤어졌다 하랴
헤매였던 곳곳의 은혜와 굴욕을 삭인 쉰 목청으로
저녁 바람이 불고
늦게 핀 들국화 이우는 떨기 앞에
목놓아 큰 울음도 바쳐봐야 한다
그런 다음 침묵으로 길을 묻는 無心
청년 예수도 젊은 싯다르타도
서릿길 이런 때 詩聖이 되셨으리

 


문병가서                                     

 

유안진

밤비에 씻긴 눈에
새벽별로  뜨지 말고
천둥번개 울고 간 기슭에
산나리 꽃대궁으로 고개 숙여 피지도 말고

꽃도 별도 아닌 이대로가 좋아요.

이 모양 초라한대로 우리
이 세상에서 자주 만나요
앓는 것도 자랑거리 삼아
나이 만큼씩 늙어 가자요. 
                         
들꽃 언덕에서 / 유안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용서받는 까닭은 / 유안진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내는 것이 있다

땅바닥을 기는 쇠비름나물
매미를 꿈꾸는 땅속 굼벵이
작은 웅덩이도 우주로 알고 사는
물벼룩 장구벌레 소금쟁이---- 같은
이들이 떠받치는 이 지구 이 세상을

하늘도 오늘도 용서하신다
사람 아닌 이들이 살고 있어서.

 

 

귀뜨임 / 유안진         

이제는 안다
웅장하게 달려오면 밀물 소리이고
처절하게 흐느끼면 떠나가는 썰물 소린 줄을
머얼리서도 안 보아도 알아버렸다
알아버려 서글프다
그지없이 서글픈
귀나이로 가고 있는가.

마음 착해지는 날/유안진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기 적                 

                      유안진


진실은 없었다

모든 게 진실이었으니까

좋음만도 아니었다 아름다움만도 아니었다 깨끗함만은 더욱 아니었다

아닌 것이 더 많아 알맞게 섞어지고 잘도 발효되어

향기는 높고 감칠맛도 제대로인 피와 살도 되었더라

친구여 연인이여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도 떫고 아린

우정도 사랑도 인생이라는 불모의 땅에 태어나준

꽃이여

서로의 축복이여

기적은 없었다 살아온 모두가 기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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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잎으로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며
뭐니뭐니 해도
사랑은 아름답다고

돌아온 꽃들
낯 붉히며 소곤소곤
잎새들도 까닥까닥
맞장구 치는 봄날

속눈썹 끄트머리
아지랑이 얼굴이며
귓바퀴에 들리는 듯
그리운 목소리며

아직도 아직도 사랑합니다
꽃지면 잎이 돋듯
사랑진 그 자리에
우정을 키우며

이 세상
한 울타리 안에
이 하늘 한 지붕 밑에

먼 듯 가까운 듯
꽃으로 잎으로
우리는 결국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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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길을 잡다 외 3편 / 유안진

 

뒤축 접힌 막신을 끌고 나가면 동네를 어슬렁거리게 된다

한번만 더 신고 버리자던 헌신을 신었더니, 전에 살던 아파트에 와 있지 않던가

차를 몰고 나가면 퇴직한 직장 길로 가곤 한다

김유신의 애마가 천관의 집으로 직행했다더니

18년 몰아온 내 차도 26년 근무지로 길을 잡아

차를 돌릴 대마다 새 차를 결심하곤 한다

아쉬운 대로 새 신부터 샀다

 

미끄럼 방지 신바닥을 믿고 눈길 얼음길도 걷다보면 낯선 곳 아니던가

긴장과 당혹스러움은 살아본 적 없는 곳에서 살아본 적 없는 방식으로 사는 흥분이 되는 듯

잘못 든 길 잘못 찾은 곳에서의 허탈한 헛웃음도 웃어본 적 없는 새 웃음 같았고

때로는 몇몇 세기를 성큼 끌어당겨 살려고 못 타본 노선의 차를 타고 상상 속 행성으로 가고 있거나

낯선 일터에서 외계인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처음을 처음처럼 체험하는 기분이 되곤 했다

 

이래서 새 차는 힘들지만 새 신은 가끔 사 신어야 해.

 

 

조금은 양식거리로 / 유안진

 

 

용서해 주시옵고 용서해주시옵기를

 

지워서 잊어버려 주시옵기를

 

그러나

스스로를 용서해버릴 만큼은

 

저절로 다 잊어버릴 만큼은

마시옵기를

 

조금은 남겨두시옵기를

 

용서 구할 거리를 또 만들지 않을 만큼은

 

때때로 울 수 있을 만큼은

 

흐린 자국 몇이라도.

 

길에서 파는 미래 / 유안진

 

불시착한 정류장에서 우연히 듣는 ‘겨울나그네’는

중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이름표를 목에 건

매화 앵두 살구 복숭 목련 진달래의 묘목들

입양을 기다리는 전쟁고아들 같이

맨발에 맨 종아리 홑옷 넝마 걸친 채로

겁먹은 듯 떨고들 섰다

바구니에 담겨 서툴게 겨우 촉 튼 알뿌리의

다알리아 글라디오라스 릴리 투우립 칸나 히야신스도 본다

한 마을에 시집온 다국적 새댁들의 이름 같은

눈 빛깔 피부색 머리카락 색은 달라도

푸르고 붉고 향기 높은 꿈은 다리지 않으리니

 

어디에 심어지던지

민들레 꽃씨처럼 한 세상 잘 차려 잘 살거라

비발디의 ‘사계(四季)’보다 찬란하거라

드볼작의 ‘신세계(新世界)’보다 장엄하거라.

 

 

사시(斜視)로 본다 / 유안진

 

피사의 사탑(斜塔)만큼

지구의(地球儀)의 기울기만큼

불편한 듯 위태로운 듯

사람과 귀신 사이 도깨비처럼

하늘이나 땅보다는 반 공중에서

목 디스크 아닌 허리디스크로 기울어져

떨떠름한 눈길로 삐딱하게 꼬나보며

옥의 티가 아니라

티 있는 옥돌이 마땅하다 싶어져

시각은 저절로 삐딱해져 버렸지

기울러져 돌아가는 지구에 붙어살자면

최소한 지구처럼 23.5도쯤 기울어져야지

중심잡기 위해서 기울어져야 했던 피사의 탑처럼

삐딱해야 바르다고

반듯하게 돌아가는 삶이라고

신발 밑창도 삐딱하게 닳아버린 제 몸을 보여주곤 하니까.

 

 

 

사리(舍利)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의
사리(舍利)처럼 남을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가을 편지                                               
 

들꽃이 핀다
나 자신의 자유와
나 자신의 절대로서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풀벌레도 외친다.
내일 아침 된서리에 무너질 꽃처럼
이 밤에 울고 죽을 버러지처럼
거치른 들녘에다
깊은 밤 어둠에다
혈서를 쓰고 싶다. 

 

 
겨울을 기다리며                                       
 
겨울이 오면
나는
바람이 될 거야


더는 못 참는 침묵에서
더는 못 감출 이름을
마음껏 소리쳐 불러보는 목소리가


밤낮 주야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 거침없이
목놓아 외쳐대는 북풍의 목청이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에
미쳐버린 겨울바람
그 목소리 될 거야, 되고 말 거야. 

 

  

꽃 지는 날에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꿈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낙엽 쌓인 길에서                                      
 
한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또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눈물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뼈가 녹아 물이 되고
살이 녹아 물이 되고
살아가는 길
긴 여과의 과정에서


하늘이 쪼개지고
땅이 울부짖는
날이 날마다


사랑도
시도
그리고 학문도
배신을 일삼는
수치와 약점일 뿐


녹아도 녹아도
녹지 않는 뼈와 살
오직 그 하나
나의 참뜻은


마지막 그날에
생애를 걸러서
우러나는 한 방울


신이 정녕 계실진대
무심한 하나님
그로 하여 나는

 

 

눈사람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이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하나 지어 눈맞춤 하리라 


  

들국화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랏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띄우고
마중나오신 성녀


 

멀리 있기                                                
 
멀리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리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아침 기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 수 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어 있어
늘 미안한 자격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약속의 별                                               
 

몹시 외롭고 쓸쓸해지는 때는
걸어온 옛길로나 돌아가게 되나봅니다
못내 초라하고 서글퍼지는 때에도
보물찾기하듯
그 길섶을 뒤적이게 되나봅니다


긴긴 겨울밤 얼어붙은 깜깜 하늘에는
왠지 낯익은 듯
눈물 머금은 별 하나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약속 하나, 언약 하나, 맹세 하나를

 

내 어려서 철없던 꼬맹이적에
심심해서 별이나 헤아리며
혼자 놀던 어느 밤에
문득 아름다운 별 하나에 넋이 빠져
단박에 나의 별로 점찍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별
이담에 나도 너처럼 빛날 거야」
턱을 괸 두 손 풀고 발딱 일어서며
나 혼자 중얼거려 약속했습니다
그 별도 기뻐서
더 크게 더 밝게 빛났습니다
그 이름은 놀림말로 개밥바라기라고 하지만
초저녁엔 금성이고 장경성(長慶星)이고 태백성(太百星)이며
새벽녘엔 샛별이고 명성(名星)이고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르는 줄은
한참 뒤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애들한테 따돌림받고
슬퍼지는 외토릴 때


손등으로 눈물 닦다가도
고개 들면 웃어주는 별


「힘을 내!
하마 잊었니 우리의 약속을?」
그때 이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밤중에 잠이 깨어도 문 열고 내다보며
눈맞춤도 눈흘김도 눈쌈도 하였고
신새벽 뒷간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짓궂게 놀려대어도 나는 행복했습니다


꿈이 너무 많고
너무도 화려하여
눈물도 웃음도 변덕스럽던 여학생때는
단짝 친구랑 나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영원한 우정을
기막힌 야망을


여름밤 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놓고
손가락을 걸어서 우린 언약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아득한 훗날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의 우정은 언약의 별같이
밝고도 찬란할 것이라고
언약의 별 같은 인물이 되자고
새끼손가락을 세 번 잡아당겼습니다


애인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여
숫되고 서툴던 내 처녀적에
별 하나에 사랑을 맹세해 주던 이여
별 하나에 포부를 다짐해 뵈던 이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몰라도
지금의 하늘에는


맹세의 그 별이
그날처럼 밝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피곤할 때
더러더러 생각날까요
뜨거운 그 호소 그 맹세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까요


덧없고 부질없어라
우정과 사랑이면 더욱 그러하여라
세월이 지나간 휑하니 빈 자리에는
그 약속, 그 언약, 그 맹세 모두
어처구니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달픈 퇴근길에 헛발을 디디다가
잠 안 오는 밤중에 안경알을 닦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약속의 별 하나
아이적 내 별이여, 우정의 우리 별이여
영원을 맹세하던 첫사랑의 별이여


어느 한 가지의 약속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은
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미안할 뿐입니다
아이처럼 다리 뻗쳐 마구 울고 싶습니다.

 


 

작정                                                      
 

모르며 살기로 했다.
시린 눈빛 하나로
흘러만 가는 가을 강처럼


사랑은 무엇이며
삶은
왜 사는 건지


물어서 얻은 해답이
무슨 쓸모 있었던가


모를 줄도 알며 사는
어리석음이여
기막힌 평안함이여


가을하늘빛 같은
시린 눈빛 하나로
무작정 무작정 살기로 했다.


  

조각달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키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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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프단다             

유안진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는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봄비 한 주머니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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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거짓말                                           
 

<사랑합니다>
너무도 때묻힌 이 한마디 밖에는
다른 말이 없는 가난에 웁니다.
처음보다 더 처음인 순정과 진실을
이 거짓말에 담을 수 밖에 없다니요.
겨울 한밤 귀뚜라미 거미줄 울음으로
여름밤 소쩍새 숨넘어가는 울음으로

 

<사랑합니다>
샘물은 퍼낼수록 새물이 되듯이
처음보다 더 앞선 서툴고 낯선 말

 

<사랑합니다>
목젖에 걸린 이 참말을
황홀한 거짓말로 불러내어 주세요. 

 

지란지교를 꿈꾸며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표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를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참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때는 여왕보다 품위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스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여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壽衣)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유안진 柳岸津 (1941. 10. 1 ∼  )                                                               


1941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대전여자중학교, 대전호수돈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마산제일여자중·고등학교와 대전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0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였고, 1976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신여자대학교·단국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가르치다가 1981년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가 되었다.

 

1965∼1967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달〉 〈별〉 〈위로〉가 3회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1970년 첫 시집 《달하》를 출판하였다.
이향아·신달자와 함께 펴낸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1986)에 실린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기도 하였으며,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주로 발표하였다. 1996년 펜문학상, 1998년 제10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시집 《절망시편》(1973), 《물로 바람으로》(1976), 《날개옷》(1978), 《달빛에 젖은 가락》(1985), 《영원한 느낌표》(1987),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1993), 《누이》(1997)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1985), 《그리운 말 한마디》(1987), 장편소설로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1990), 《땡삐》(1993), 아동교육 전공서적으로 《한국전통 아동심리요법》(1985), 《한국전통의 육아방식》(1988), 《한국전통사회의 유아교육》(199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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