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던 이영도와 유치환
행복(幸福) --청마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그대 그리움이 --정운 이영도--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 양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미완의 사랑이라고 해 두자. 그들의 사랑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이루어진 것인지 그 것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 그 들의 사랑 이야기 이영도와 유치환의 이야기를 해 본다. 이영도 시조시인으로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 출생. 1916. 10. 22에 태어나 1976. 3. 5 졸.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다. 통영여자고등학교, 부산 남성여자고등학교,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거쳐, 1970년 부산여자대학(지금의 신라대학교)에도 출강하였으며 부산어린이회관 운영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1964년 부산어린이회관 관장이 되었고, 〈현대시학〉 편집위원을 지내면서 영남시조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대구에서 펴내던 문예동인지 〈죽순 竹筍〉에 시조 《제야(除夜)》를 발표함으로써 문재(文才)를 인정받았고, 한국 전래의 기다림을 고유의 가락에 실어 감각적으로 읊어 시조를 발표했다. 1954년 첫 시조집 〈청저집 靑苧集〉을 펴냈고, 1968년 오빠 이호우와 함께 2번째 시조집 〈석류〉를 펴냈다. 대표작 〈황혼에 서서〉는 종교적인 애정을 노래한 것이고, 그밖에 〈낙화〉(죽순, 1946. 8)·〈폭포〉(영남문학, 1948. 10)· 〈나목 裸木〉(현대문학, 1967. 3) 등을 발표했다. 수필집으로 〈춘근집 春芹集〉(1958)·〈비둘기 내리는 뜨락〉(1966)· 〈머나먼 사념의 길목에서〉(1971) 등을 펴냈는데, 구도자적인 면과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면을 함께 보여주었다. 문학을 통한 사회봉사로 1966년 늘월문학상을 받았다. 1979년 이영도 여사 기념사업회에서 정운 시조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단란(團欒) --정운 이영도--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繡)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는 듯 둘렸다.
한 점 군살을 붙이기를 용납 않는 깔끔하게 깎아 놓은 밤 같은 작품이다. 얼마나 진솔한 작품인가. 시가 왜 꼭 난해해야 하는가. 왜 꼭 많은 어휘가 동원되고 윽박질러야 하는가. 시조는 민족시요, 국민 시가다. 봄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읽는 이의 가슴에 타이르듯 젖어들게만 하면 된다. 말은 짧게 하고 뜻은 길게 하면 되는 것이다.
애모와 회한으로 점철된 우리네 토착적 정서를 가장 절실하게 노래함으로써 민족시전에 한그루 청목을 세워 많은 숙과를 얻어 내고 스스로도 시단의 교목으로 우뚝 했던 사람. 그는 시조를 목숨의 기도로 삼아 애락과 무상을 다스리고 격정과 통분을 달래었으며 고독을 법열로, 번뇌도 향으로 승화시키면서 단아한 용자와 청고한 품격을 솔빛처럼 간직했던 분이다. 정운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그의 오라비 이호우이고 또 한 사람은 평생 그를 연모했던 청마 유치환이다. 이호우(爾豪愚).
그는 시조시인 영도(永道)의 손 위 오라비이다. 1940년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시조 〈달밤〉이 〈문장〉에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발표한 〈개화〉·〈휴화산〉·〈바위〉 등은 감상적 서정세계를 넘어서 객관적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노래하고 영탄하던 종래의 시조와는 달리 평범한 제재를 평이하게 노래했으며 후기에는 인간의 욕정을 승화시켜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조를 썼다. 작품집으로 1955년에 펴낸 〈이호우 시조집〉 외에 누이동생 영도와 함께 1968년에 펴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가 있다. 옛날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의 시조가 있었는데 지금도 실려 있는지 모르겠네요 청마 유치환
청마는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청마의 장형이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청마는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이곳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권재순을 만나 누이, 오빠로 지내다가 결혼을 했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기 때문에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영도의 오누이가 시조시인이듯 유치진· 유치환· 유치상(柳致祥) 삼형제도 어우러진 문인이었다. 유치진이 1923년 무렵 동인지 토성(土聲)을 발간할 때는 아우 유치환이 참여했고, 유치환이 37년 통영과 부산을 중심으로 동인지 생리(生理)를 간행할 때는 아우 유치상이 참여했다. 이 삼형제는 일본 도쿄(東京)에 유학할 때는 학년을 달리하면서 도요야마(豊山) 중학(5년제)을 같이 다니며 함께 자취를 했었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유치환은 한의(漢醫)를 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자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하여 27년에 졸업을 하였다.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하였는데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때 결혼식에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권재순과 결혼한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는 지성인이 직장을 가지고 삶을 영위할 자리가 마땅찮으니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기술이나 익히자는 생각으로 사진기술을 배우며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의 작품을 보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 후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24세 때「문예월간」2호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여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34년에서 40년까지 한해 10편 이상 20편까지 발표했지만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생활 능력이 있어야 했다. 32년 거처를 평양으로 옮겨 사진관을 열어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1934년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기고 30세 되던 37년 고향으로 돌아가 통영협성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계기로 이후 교육계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 문제가 얽힌 데다 통영경찰서에 근무하던 남 순사란 사람으로부터 그가 일제의 예비 검속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음을 귀띔 받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재건해 보려는 의도로 40년 만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 가형인 동랑 유치진이 개간한 땅이 있었는데, 청마는 그것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을 했지만 청마는 어린 아들 하나를 잃어 땅이 얼어 삽도 들어가지 않는 흥안령 가까운 북만주 광막한 허허벌판 밭두렁에 묻고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고향 통영으로 귀환하였다. 통영여자중학교 교사(1945. 10. ∼ 1948)가 된 그는 11월에 윤이상, 김춘수 등과 같이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그의 부인이 경영하는 문화유치원 포함, 4동의 적산을 인수하고 '연극 부락' 중심의 예술 활동을 벌인다. 39세 때는 제 1회 시인상을 받았으며 41세 때인 1948년엔 청년문학가 협회 회장직을 맡아 반공 민족 문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청마는 1946년께 이윤수 시인 등과 함께 '竹筍(죽순)' 동인을 했다. 대구 서문로에서 名金堂(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을 내고 있던 이윤수는 1946년 5월 1일자로 해방 이후 최초의 시동인지인 '죽순' 창간호가 나오자 점포 앞에 '죽순시인구락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청마가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죽순' 동인을 통해서이다. 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스믈 아홉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둔 미망인으로 시조와 자수를 가르치며 언제나 한복을 곱게 입고 올림머리를 하고 다녔다.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명편 연모의 시를 썼다.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 같이 요지경 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 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시인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들을 연모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에서 시를 길어냈다. 청마는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자성의 빛을 비치기도 했지만, 여인들이란 시인에게 항상 얻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였던 것이다. 20여 년간 한 여인, 오직 이영도만을 향한 마음을 담아 청마는 5백여 통의 편지를 썼다. 과부였던 이영도는, 기혼자였던 유치환을 향한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20여년을 흔드는데 어느 여자인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랴 마침내 이영도는 그에게 마음을 열어 유치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3년 동안 이들은 편지만 오가는 플라토닉한 사랑을 했다. 보다못한 청마의 아내가 만날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집을 비우며 이영도를 불러 함께 지내보라고 하고는 친정으로 가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청마의 인정미를 엿보게 하는 이런 일화가 있다. 청마는 김소운과 각별히 지냈다. 충청도 서천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소운이 화신에 근무하던 청마를 불러내 다방에서 마주앉아 청마 앞에 전보를 내밀었다. 청마가 전보를 읽고는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소운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청마는 자신에겐 가진 것은 없고 유치원에 근무하는 아내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했다. 유치원 보모이던 권재순의 월급이 40원이던 시절, 청마는 20원을 아내에게 얻어 소운의 손에 쥐어주었다. 청마가 세상을 뜬 1967년 2월 13일 오후 9시 30분 향년 60세,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 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 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 문인을 만나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렀는데 청마는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에 사이다를 마셨다.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부산의 좌천동 앞길에서 버스에서 내려 수정동 댁으로 가기 위해 중앙로 건널목을 건너다가 시내버스에 치였다. 밤 9시 30분경이었다. 청마는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부산예총5일장, 영결식은 교장으로 있었던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정이었고 장지는 독지가가 내어준 하단의 승학산 산록이었다. 승학산 기슭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유택에서 10년 넘게 지내는 동안 경향(京鄕)의 참배객도 찾아들고 부산문인협회에서 마련한 비석도 섰다. 그런데 그곳에 대신동의 동아대학이 옮겨오면서 청마의 유택도 학교부지에 들게 되었다. 이장을 하게 되었다. 이장을 할 때는 몇몇 문인들이 참여했다. 동해바다가 멀리 바라보이는 위쪽 자리였다. "그러면은 너는 오늘 이 시간까지를 진실로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왔으며 또한 살아 있는지, 천길 벼랑 끝에 딛고 선 절망의 공허감에 시방 잇빨을 갈고 내닫는 차 쇠바퀴에 반드시 두개골을 부딪고 말리라" 청마는 죽기 십여 년 전에 마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과 같은 이런 글을 남겼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의 標ㅅ대 끝에 哀愁는 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旗ㅅ발] 전문(조선문단, 1936.1) 국정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유명해진 '旗빨'이다. 그 '기빨'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했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그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는 생명의 원형이었을까? 거제시에 청마의 무덤이 있다.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청마의 8대조부터 살았다는 이곳 방하리는 청마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1997년 4월 5일 양산시 백운 묘지에서 모친의 무덤이 있는 이곳 지전당골 선산에 유골을 이장, 매년 한식날마다 거제시의 '동랑·청마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성묘를 지내고 있다. 모친의 무덤 앞에는 청마가 생전에 지어 바쳤을 사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생명'에 대한 열애란 참으로 '인간'에 대한 열애가 아니겠는가? 청마는 진정, 절제된 영혼과 육체로 인간에 대한 들끓는 그리움에 오열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청마가 죽고 난 뒤 이영도는 그와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 책으로 펴냈다 청마가 그에게 보낸 ‘행복’에서 제목을 뽑아 책의 이름은 ‘사랑하였음으로 행복하였네라’였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대단한 논쟁이 있었다. 청마의 사랑과 진심을 팔아먹는 배신행위라느니 아름다운 사랑의 자취를 남기려는 그리움의 표시라느니 그러나 누가 있어 이를 속단하랴! 다만 우리는 그들의 지순한 자취 만을 느껴볼 뿐이다.
이균상의 박사학위논문'유치환과 김춘수 시의 대비연구'를 보면 이들에 대한 언급이 자세히 언급되어있음
시인 이영도
무제 / 이영도
20여 년간 한 여인, 오직 이영도만을 향한 마음을 담아 청마는 5천여 통의 편지를 썼다. 과부였던 이영도는, 기혼자였던 유치환을 향한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20여년을 흔드는데 어느 여자인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랴 마침내 이영도는 그에게 마음을 열어 유치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3년 동안 이들은 편지만 오가는 플라토닉한 사랑을 했다. 보다못한 청마의 아내가 만날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집을 비우며 이영도를 불러 함께 지내보라고 하고는 친정으로 가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청마가 죽고 난 뒤 이영도는 그와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 책으로 펴냈다 청마가 그에게 보낸 ‘행복’에서 제목을 뽑아 책의 이름은 ‘사랑하였음으로 행복하였네라’였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대단한 논쟁이 있었다. 청마의 사랑과 진심을 팔아먹는 배신행위라느니 아름다운 사랑의 자취를 남기려는 그리움의 표시라느니 그러나 누가 있어 이를 속단하랴! 다만 우리는 그들의 지순한 자취 만을 느껴볼 뿐이다.
<인터넷에서 발췌한 글>
행복(幸福)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의 ‘행복’
20년 동안 청마 유치환이 정운 이영도 여사에 하루도 빼지 않고 보낸 편지는 5000통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의 애타는 사랑이 죽음 앞까지 이어졌고 이미 이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과연 이런 애타는 로맨스가 행복하였을까?
1975년도인가 수학여행을 부산 범어사로 갔던 기억이 난다. 범어사의 뒷편 암자 오르는길... 학같은 모습의 여인이 혼자서 산길을 오르다가 우리 일행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암자 있는 곳을 물었다. 그녀는 회색빛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색 자체가 범상치 않았고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선골(仙骨)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오르는 길이 바윗길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인도하게 되었고 어머니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나는 이런 분이 나의 어머니였으면 하는 생각을 따스한 손길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마냥 기쁜 산길...
암자에 오르고 보니 그 곳은 비구니 스님들의 처소였다. 아쉬운 안내를 마치고 작별을 하는데 아쉬운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스스럼없이 나를 안아주는 것이었다. 정을 받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생소하고 어색한 포옹이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녀와의 이승에서의 단 한번의 만남... 그리고 그녀가 이영도 여사 였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누나가 소장하고 있던 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것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운 이영도 여사와 청마의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내 머리의 중심 쪽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들의 애타는 플라토닉 러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각양각색이겠지만 이들의 애타는 몸부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들이 간 저 세상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애타는 부유(浮游)의 땅이 아닐까?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간절한 사랑으로 정신을 불태우는 고문을 당하며 간 저들을 과연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사랑이야 애절하고 슬프고 행복한 감정이 교차하는 인간의 묘하고도 지묘한 감정이지만 이렇듯 일생을 애타는 사랑으로 몸부림치다가 간 이들은 사랑의 형벌을 받는게 아닌지...
겨울도 봄도 아닌 어설픈 날 저녁 생각에 잠겨본다. 정운! 부디 목마른 사랑의 아픔과 이승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안식을 취하소서...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불행하였네 라는 나의 생각이 가슴을 친다. 사랑을 할 수도 없고 아니할 수도 없음이거늘... |
정운(이영도)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같이 까딱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드는지고
덧없는 목숨이여
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
요지경같이 요지경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 -노래여, 뉘우침이여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 52년 6월2일 당신의 마(馬)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의 사랑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 13일 저녁,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붓을 영영 놓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 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 유치환 -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에게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20년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마땅히 서한집의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가야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운영해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76년 3월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더 크게 만들겠다던 문학상 기금은
정운의 타계로 붓지 않고
구상.김준석.임인규등 문학상 운영위원들의
합의로 "정운시조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글참조 : 중앙일보 -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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