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라지꽃 앞에서, 싸리꽃 앞에서, 칡꽃 앞에서, 애기원추리꽃 앞에서, 이름도 모를 버섯들 앞에서 매일 똥을 눴다. 그러고는 삽으로 꼭꼭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똥을 땅에 돌려주었더니 땅은 또 많은 것을 내게 선물하였다."
안도현(48) 시인이 털어놓는 창작 과정의 비밀이다. 그래서 탄생한 시가 '공양'.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벌의 날갯질소리 일곱 근/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편/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 두 치 반/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공양' 전문)
안도현이 펴낸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한겨레출판 펴냄)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시적인 것을 반죽하고 구부러뜨린 손맛이 생생하게 묻어나는 시 창작 노트다. 그러나 '좋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한 비법이 수능시험 답안지처럼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이 없고 다만 '시적인 것'을 탐색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로 유명한 시 '너에게 묻는다'를 예로 든다.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42쪽)
촛불이 연탄보다 더 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상투성에 굴복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단 세 줄의 이 시는 어느 한순간에 쉽사리 쓰인 듯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남모를 고뇌가 담겨 있다. 수없는 행갈이의 시행착오와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쩨쩨하고 치사한' 고민 끝에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 시집 후기에서 "시가 나를 끌고 다녔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책 곳곳에는 '시가 그를 어떻게 끌고 다녔는지'에 대한 흔적이 담겨 있다. 그 흔적이야말로 시적인 것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안도현은 "아, 당신도 시를 써라"를 말로 시 창작 강의를 마치지만 그건 책 속에 찍은 마침표일 뿐 시적인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이 불어가는 골목길, 광고 전단이 붙은 전봇대에서 시가 되기 위해 파닥파닥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정철훈 기자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
[ZOOM IN] 안도현 시인 | ||||||
안도현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준엄하게 묻는 시인
그때부터 모두가 안도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자칭 회장이다. 전염은 빠르다. ‘안도현 사교’의 좀비가 된 그들은 불쌍하다. 본인들은 무지무지 행복하다. 푸른색을 띤 정체불명의 액체는 그만큼 효과가 강력하다. 모두가 앞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강시처럼 스카이콩콩을 하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그들은 기꺼이 안도현 사당에 모여서 자신의 인생을 신탁한다. 안도현의 모든 시 문장들은 정언 명령으로 돼 있다. 그것의 외형적인 문장 형식이 질문이든 영탄이든 관계 없다. 가령 보라.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은 뜨거운 것이다” 같은 시 문장을 읽을 때 독자들은 긴장하고, 긴장이 겹치면 그냥 자지러진다. 다시 말하지만 자지러진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하고 운을 뗀 다음,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라는 문장으로 외나무다리를 놓고, 다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라고 끝맺음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유행가일 것이라는 혐의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냥 빠져든다. 모르시는가. 자지러질 때는 항상 그렇듯 한 번 빠진 발을 빼낼 수가 없다. 자지러진다는 것, 안도현의 절규 앞에서 자지러진다는 것, 그것 때문에 한겨울 연탄불마저 식어버린 구들장을 맨몸으로 견뎌낸 인생들이 어디 한둘일 것인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교주가 하사한 피죽 한 그릇에 감읍하면서 이튿날 헐벗은 맨발로 동냥에 나서는 앵벌이 소녀를 닮아버린다. 아무도 갖지 못한 안도현의 절규를 우리는 비웃고 부러워한다.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버린 손가락에 침을 묻혀 오늘도 우리는 안도현의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성인의 말씀을 듣는 듯한 호사한 착각이 스며든다. 잉크 밥을 오래 먹은 나도 그 정도는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리 해도 도저히 써지지 않는 어떤 벽 같은 것을 느끼면서 사당 마당에 부복한다. 교주가 나올 시간이다. 안도현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안도현을 잘 알고 있는 듯이 행세를 해야 내 밥이 벌리는 시대에, 매일 밤 그렇게 익숙한 어조로 그의 시를 읊는 한밤 라디오의 음악 쇼 진행자들처럼, 나도 느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잡은 손을 흔들어댄다. 너는 시인, 나는 부엉부엉 미네르바, 하고 농담을 할 수는 없었다. 이른 저녁이었다. 아침에 반팔을 입을까 긴 팔을 입을까 잠시 망설였을 봄 날씨였다. 서울 광화문통에 있는 어느 골목길에는 오양수산이라는 수상쩍은 횟집이 있었고, 1층에 방 한 칸을 내어 우리는 죽 앉았다. 안도현, 김요일, 함민복, 박후기. 우리는 요즘 우리가 얼마나 술을 절제하고 사는지에 대해 잠깐 얘기했다. 함민복은 재작년에 1년 동안 술을 먹지 않은 적이 있다고 했고, 안도현은 지난 2달 동안 끊었다고 했다. 스스로 가증스러웠다. 2009년의 비루하기 그지없는 정치적 분위기로 볼 때 대한민국 백성 치고 누구 하나 가증스럽지 않은 인간이 없었으니 시인, 기자인들 어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랴 싶었다. 브레이크를 힘껏 밟고 있다가 액셀레이터로 발을 옮겨야 타이어 타는 냄새를 맡으며 급발진을 할 수 있기는 하다. 약간 어수선했다. 교주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기자가 먼저 소주폭탄을 섞어서 한 순배를 돌렸다. 샴페인 소폭이라며 가증을 떨었다. 첫 질문.
어머니 고희 잔치 때 가족신문도 만들어 ▶1961년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동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어떤 마을이었습니까? “예천과 안동 사이라고 보면 됩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영주의 소백산을 발원지 삼아 내려와 있는 강 마을입니다. 사람들이, 양반들이 살던 곳이라고 해요. 마을이 작았습니다. 어디서 멀리서 살다가 모이게 된 대여섯 가구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인연은 없습니다. 그곳에 큰집이 있습니다. 지금은 방학 때 왔다갔다 하는 것 말고도 가끔 갑니다. 산소도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없어졌고요. 농사지으려는 분이 그 집을 치워버렸습니다. 황지黃地동 소망실이란 동네로 불렸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때 소주폭탄을 두 잔째 비우고 있었고, 벌써 취기가 올라온다고 말했다.) ▶큰아들이시네요? 큰아들은 문학하기에 불편하지 않나요? “물려받은 게 없으니……(불편한 것도 없는 셈이지요.) 물려받은 것보다 갚아야 할 게 많았으니까요. 책임져야 할 일도 많고요.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후로 글 쓰면서 극단으로 가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핑계이긴 한데. 가진 것은 없고, 책임은 져야 했고, 어정쩡한 상태였죠.” ▶극단으로 가지 못했다고요? 무슨 뜻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큰아들은 첫 번째 태어났다는 것 말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는 사람일 텐데, 나는 아무것도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밑으로 동생은 셋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가급적 튀는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 하고, 집안에서는 흐트러진 자세 말고 똑바로 살아야 했습니다. 1989년에 전교조로 교직에서 해직됐을 때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몇 년 동안 모르고 계셨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그러셨고요.” ▶지금 후배시인이 이 자리에 세 분 계신데,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이 신경 쓰입니까? “신경 쓰이죠. (후배들을 향해) 아시죠? 시인들은 알아도 말 안 하고, 들어도 반절만 듣고.” (이 대목에서 기자라는 직업이 묘해졌다. 동료시인들의 눈과 귀는 신경 쓰이고, 기자의 귀와 펜대는 신경이 전혀 안 쓰인다는 뜻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옛날에 영국 귀부인이 인도 하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때 짧게 스쳐 지나간 심리적 분위기는, 안 시인이 기자를 아주 신뢰한다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거나 둘 중 하나다.) ▶아버지 안오성 씨, 어머니 임홍교 씨 두 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아버지가 분가를 하셨어요. 안동시 풍산면으로 가서 가게를 했어요. 잡화가게였죠. 상호가 ‘해정海正상회’였습니다. 그곳 장날이 3일, 8일이고, 안동은 2일, 7일이었거든요. 안동 시내에 가서 물건 떼다가 풍산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팔기도 했지요. 그 가게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망했습니다. 농협을 통해서 연쇄점 개념이 들어올 때인데, 그 연쇄점에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물건이 들어오면서 우리 가게는 안 되기 시작했죠. 그래서 가게를 접고 우리집은 경기도 여주로 이사를 갔고, 나 혼자 사촌형을 따라 큰집이 있는 대구로 갔습니다. 당시 여주에는 안동댐의 수몰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예천농고를 나오셨는데 그곳에서 수박 참외 같은, 당시 말로 특수작물을 경작하셨지요. 초기에는 하우스 수박을 보급하셨습니다. 땅도 사고, 10여 년 간 농사를 하셨습니다.” ▶안 시인은 아버지와 많이 닮았습니까? “아버지는 나보다 큽니다. 1미터 80이 넘습니다.” ▶그래요? “예. 나는 결정적 시기에 못 먹고 가스 먹고 연탄 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시인 되는 길에는 찬성하셨습니까. “아버지는 말이 없고 잔소리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글 쓴다 할 때도 네가 좋으면 해라 하셨지요. 한량이셨고 술집 좋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성실한 분이셨는데, 저하고 대화를 길게 해본 적은 없습니다. 부딪쳤다면 문학 때문에 부딪쳐야 했겠는데…….” ▶보수적인 분이셨군요. “아니요. 아버지는 박정희를 싫어했어요. 라디오가 많지 않던 시절에 대통령 선거 중계방송을 밤새 들으실 때 보면 어머니는 박정희 편이었고, 아버지는 DJ편이었습니다.” ▶부친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마흔일곱에 가셨습니다. 내가 집나이로 마흔아홉인데, 나는 성공한 것이지요.” ▶네? “자식이란 싸가지 없는 존재잖아요. 슬픈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어쨌든 우리 아버지는 나를 제대로 된 시인으로 만들어 주려고 일찍 돌아가셨나 보다 해요.” ▶어머니는요? “선볼 때 고개도 못 들고,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전형적인 농촌 출신 여자죠. 50 되기 전에 바지 입은 적이 없는 분입니다. 지금은 빨간 점퍼에 까만 바지를 입으시지만요. 전형적인 조선여자입니다. 지금은 안동에 사시고, 작년에 칠순이셨습니다.” ▶잔치 좀 했겠습니다. “예. 시끌벅적하게 했어요. 어른들이 바라는 잔치가 있습니다. 그걸 수렴하고, 또 우리 방식을 합쳐서 했지요. 내가 큰아들이니까 전주에서 고지해서 버스 빌리고 1박 2일로 안동으로 갔죠. 안동 주변에 있는 하회마을, 봉정사 들르고 또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기행을 겸해서 1급 가이드도 붙이고 했습니다. 안동 권씨(아, 안동 김씨였나, 나중에 확인해드릴게요) 재실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가을에 소리도 들으면서 재밌게 보냈습니다. 타블로이드 4쪽 분량으로 가족신문을 만들기도 했지요. 일종의 안씨 연대기였습니다.” ▶자화자찬? “아니요. 기획 취지는 어머니에게 효도하자느니 잘 모시겠다느니 이런 말은 절대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막내동생이 제수씨 전에 사귀던 아가씨 얘기를 다 해버렸던 옛날 에피소드 같은 것들을 털어놓는, 그런 글들을 담았습니다.” 고교 때 문예 입상 경력 50여 회- 개그맨 이경규도 그때 만나 ▶아양국민학교, 경북사대부중, 대건고 등을 나왔군요. 특히 대건고 시절 안도현의 활약이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홍승우, 서정윤, 박덕규, 권태현, 하응백, 이정하 같은 문우들을 알게 된 것도 그 시절이고요.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미술반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3 때 교지에 삽화를 그리는데, 교지 담당 선생님께 불려가 귀싸대기를 두 대씩 맞았어요. 일이 더디다고요. 그때 괜히 욱한 마음이 생겨서, 미술반이라 괄시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시를 한 편 쓰면 복수가 되겠구나 싶었죠. 시를 좋아했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막연히 도전하게 됐습니다. 부모와 일찍 떨어져서 살다 보니 다른 보통 애들한테는 없는 결핍 같은 것이 나한테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취방에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었지만 닥치는 대로 책을 보게 됐거든요. 복수한다는 마음으로 투고했는데 안 실려 버렸어요. 그래서 고교 가면 꼭 문예반 들어가서 시 한 편을 쓰고 졸업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시는 안 실렸지만 삽화는 실렸나요? “예. 지금도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고교 시절 시를 써야 한다, 쓰고 싶다 하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문예반 분위기가 특이했습니다. 특별활동은 대개 형식적으로 하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다닌 대건고는 보충수업, 야간수업, 자율수업 같은 게 없었습니다. 가톨릭계이기도 했고요. 모여서 작당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대구 시내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요, 봄 가을에 한 번씩 시화전 하는 것 말입니다. 시내에서 여학생을 만날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요. 우리 선배들은 지나친 자존심을 가졌는데, 가령 경북여고 시화전이 열린다 하면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어서 그 시를 쓴 여학생을 반드시 울려야 한다, 못 울리면 ‘빳다 맞는다’ 했지요. 말하자면 개똥 문학을 한 거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 말이란 것, 그러니까 언어라는 것이 재미있어진 거죠. 또 하나는 상을 받고 싶었고요. 으스대고 싶은 욕망도 큰 거고요. 당시에 김춘수 선생께서 단골 심사위원이었는데 백일장 대회 때 친구가 김춘수 선생이 화장실 가는 것 봤다고 하면 그게 부럽고 나는 왜 못 봤을까 아쉽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고교 때 상을 얼마나 탔어요? “1학년 후반부터 한 50번은 받았습니다. 서울에서 백일장이 열리면 여학생들이 나하고 얘기하고 싶어했을 정도였어요. 그때 백일장에서 만났거나 서로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던 문사들이, 선후배는 빼고, 이산하, 대전 윤대녕, 전주 남진우, 그리고 개그맨 이경규도 있었습니다. 부산에 있는 어떤 고등학교 문예반장이 제일 친한 친구가 이경규라면서 소개해줬어요. 늘 웃기고, 좋은 중국집 잘 알고, 새로운 기획도 잘하고 했습니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그때부터 꿈이 코미디언이었다고 했더군요.” ▶공부도 잘 했나요? “고등학교 때는 그런 재미에 푹 빠졌죠. 문학의 밤, 시화전 같은 것요. 중학교 때까지는 그런대로 공부를 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성적이 내려가더군요. 2학년 때 어떤 선생님은 특기 계발보다 학과 공부에 충실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상은 자꾸 받아오는데 성적이 영 시원찮았거든요. 어떤 월요일 운동장 조회 시간에는 그동안 눈비 때문에 못 받았던 상까지 다 합해 한꺼번에 5번 받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지금보다 더 유명했군요.(웃음) 그리고 청년 안도현의 원광대 시절이 펼쳐집니다. 대구의 《국시》 동인이기도 하면서 또 원광문학회도 결성했죠.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이, 또 3년 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됐군요. 약관의 시절에 너무 화려한 것 아닙니까? 아니 그보다 서울로 대학을 안 가고 왜 원광대를 택했습니까? “이미 경희대 특기생으로 가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당연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만 예비고사 성적이 2,3점이 모자랐어요. 재수해서 갈 수도 있었는데 왠지 일단 대구를 떠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5년 정도 있다 보니 왠지 공간이든 사람이든 마음이든 바꿔야 한다는 생각, 그 자리에 있으면 고여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원광대는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같은 선배가 나온 곳이라는 생각, 또 신춘문예를 통과하면 4년간 장학금을 준다고 해서 그곳으로 결심했지요.” 광주의 좌절과 전봉준의 좌절을 오버랩시킨 당선시 ▶20대, 젊은 안도현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대구에서는 시만 잘 쓰면 최고였어요. 이하석 선생이 시는 만드는 거다, 쓰는 것이 아니다 하셨지요. 충격이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전라도 가니까 전체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어요. 시는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구에서는 제일 위에 김춘수라는 이름이 앉아 있었는데, 전라도에는 김춘수는 없고 미당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80년 광주’가 있었지요. 나는 이리라는 곳에 있었지만요. 내가 고2 때 광주여고 교사이자 현역시인이던 송수권 선생께 시와 편지를 쓴 적 있는데 그분이 장문의 답장을 보내셔서 대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어요. 몇 번이나 편지를 주고받았고, 대학생이 된 80년 5월 15일 광주에 처음 갔습니다. 그분에게 술도 얻어마시고, 잠도 자고, 그러다 계엄 확대됐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는 광주에 못 들어갔죠. 그런데 계엄 선포된 이후 학교 못 가고, 친구하고 정문 앞 솔밭에서 새우깡 안주로 소주 마시다 경계 중이던 계엄군한테 걸려 무릎 꿇리고 좆나게 맞고, 그게 또 한 계기가 돼서 시위대 쫓아다니고…… 문학이 만만한 게 아니구나, 나 혼자 문학이 아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중학교 교지 담당 교사에게 손찌검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에서 이번에는 저항심으로 이동했군요? “문청이 얼마나 저항심이 있었겠어요. 졸업할 때까지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죠. 문학의 밤을 하는데 정현종 선생이 오셨어요. 그때 강태형 문학동네 사장이 지은 문학의 밤 주제가 <이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시>였는데 그 정도 비유조차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대학 운동권이라는 것도 없었고, 절대적 침묵을 강요받던 시절이었지요. 숨어서 김지하를 베끼곤 했습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어떻게 나온 겁니까? “80년부터 계속 중앙지 신춘문예에는 떨어지고 마음은 쏠려가는데 그것을 카프처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그 작품을 쓰게 된 것이죠. 광주의 좌절과 전봉준의 좌절을 오버랩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습니다. 신춘문예는 공식 통로잖아요. 자기검열도 있었고요. 그런 것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지금 그 시절에 대한 ‘자아비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나는 고 2학년 때부터 ‘문지’와 ‘창비’를 다 알았습니다. ‘문지’를 열심히 읽다 보면 내 시가 ‘문지’처럼 변하고, ‘창비’를 읽다 보면 ‘창비’처럼 변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거냐 저거냐를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라는 시기를 만나면서였습니다. 나중에 김현 선생은 나에게 아쉽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에 역사와 사회에 기울어진 시를 발표하니까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나로서는 작파보다는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그후 문학을 가지고 운동하는 후배도 있었지만 나는 문학 자체가 운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교, 대학, 그리고 신춘문예 등등의 화려한 문학적 아우라를 이미 황홀지경으로 갖고 있는 안도현은 젊은 총각 선생님으로 이리중학교에 부임하네요. 1985년이죠. 이때가 첫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도 내고 《시힘》 동인을 결성했을 때인데, 1988년에는 이광웅, 정양, 김용택, 이병천, 박남준 등과 함께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를 만들었지요. 정치적으로 아직도 굵은 밧줄에 몸도 마음도 꽁꽁 묶인 듯한 시절이었을 텐데 그때 어떻게들 사셨습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그때 황지우 형이 민음사 주간으로 있었는데, 어디에 발표된 제 시를 보고, 《세계의문학》에 작품을 내라고 하더라고요. 황지우 형은 그때 최고로 잘 나가던 시인이었고요. 시집 낼 만한 시가 없다고 하니까 <오늘의작가상>에 투고했던 작품을 갖고 시집을 내자고 했습니다.” ▶문학적 정체성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아, 네. 그걸 정리하자면 나는 계속 끼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장도 도시와 농촌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 같고, 어릴 때 기와집과 슬레이트 집 사이에 있었고, 문학을 하던 시절은 창비와 문지 사이에 끼어 있었고요.” ▶첫 번째 중학교 교사 봉급을 받았던 때를 기억하나요? “술을 먹겠구나 했는데,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민중 교육지 사건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아는 시인 이름들이 죽 있는 거예요. 나는 뭐하고 있는가, 나도 시인인데 하는 충격을 받았죠. 나는 감옥에 가본 적도 없죠, 운동입네 하고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한번 감옥에 가보고 싶어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80년대 중반에는 ‘현장으로 간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노동 현장으로는 갈 수가 없지만,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현장이다 하면서 교육 현장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86년 《세계의문학》에 「이리중학교」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고려대의 김흥규 선생님이 월평을 크게 다뤄주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가면 표창장 받겠구나 했는데, 웬걸요 교장실에서 불러 갔더니 왜 이런 시를 썼느냐, 문교부에서 연락이 왔다, 학교 현장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경위서와 각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매일 불려가고 매일 버텼죠. 그때 내가 선생님들 회식 때 호주머니에서 시를 꺼내 낭송하곤 했는데 어떤 할아버지 선생님이 손수건을 꺼내 울기도 했고, 그때 기분이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들떠 있었죠. 그렇게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교감선생이 전주에 있는 도교육청에 갔다 와서는 제 손을 잡고 최근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겁니다. 그 날이 바로 1987년 6·29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나는 6·29 혜택을 직접 받은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아무튼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견디는 중에 앞으로 살아갈 길이 보였다고 할까요.” 자기 검열을 해제한 예술성을 지향 ▶그리고 1989년에 전교조 가입, 해직, 그리고 1990년대 전반부는 전교조 이리익산지회에서 교육문예창작회 시절이 전개되는군요. 김진경, 도종환, 배창환, 조재도, 정영상, 조성순, 조현설 같은 이름이 보입니다. 그때에도 안도현의 시세계는 래디컬한 전투성을 보인다거나 하는 측면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요, 제가 잘못 봤나요? “80년대 후반 어떤 모임에 갔는데 사회자가 ‘우리 시대 민중시인인 안도현’이라고 소개하는 겁니다. 정말 미칠 뻔했습니다. 대중시인이라는 말도 견딜 수 없지만요. 민중시인으로 명명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첫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젊은 날의 ‘코피’입니다. 훌륭한 선수는 코피 안 터뜨리고 싸우거든요. 근데 내가 서울로 갔으면 시운동을 했을 겁니다.” ▶시문학의 골수 독자들 말고 일반 독자들이 안도현이란 이름에 열광하고 비로소 그에게 대중적인 사랑을 쏟게 되는 계기는 아무래도 시집 『바닷가 우체국』(1999), 그리고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1996)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이제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책들에 대해 평가를 스스로 좀 해주시죠. “사실은 그런 책 말고, 1997년에 낸 『그리운 여우』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한 고비가 됐다고 봅니다. 그 전까지 역사와 신화에 쏠렸던 것들을 홀가분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쓰고 싶은 시를 쓰게 된 것이지요. 80년대에는 제 시를 제가 검열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가 통일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이 시가 힘든 사람들에게 뭔가였는데, 자기 검열을 해제한 것이 그 시입니다. 거창한 얘기를 해야 시인가. 자의건 타의건 민중시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때 가야 할 길을 찾아가야 했고, 나를 갱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이후의 반응을 보니 안 모씨가 현실에서 발을 떼고 구름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신경림 선생이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그 전 시보다 더 좋다고요. 지금도 별것 아니지만 제대로 시를 썼던 것은 그때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은 『연어』도 교사였기에 쓰게 됐던 것인데, 왜 우리에겐 『어린 왕자』가 없는가, 소설, 시, 에세이가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인 양식에 대한 생각이 컸어요. 시인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문학을 연성화했다, 책 팔아먹기 위해 했다는 공격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수입은 꽤 됐을 것 아닙니까? “저는 시인이자 교사였습니다. 돈을 수십 억을 벌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그냥 일반 봉급쟁이 버는 정도를 일 년 정도 받았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연탄 이야기가 나오는 「너에게 묻는다」를 참 좋아하잖습니까? “연탄이라는 대상을 선점한 기쁨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만큼 좋은 시인가 싶고, 그 시가 널리 알려진 것은 인터넷 덕분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지금 와 돌아보면 대중성이라는 것과 예술성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생각하긴 했습니다. 문학을 기왕에 하는 것이라면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겠다고 옛날부터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성공이 한쪽은 놔두고 한쪽만 강조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억울하십니까? “앞으로는 좀 바꾸려고 합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대중성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전략인데요. 쉽다, 편하다, 따뜻하다 같은 말은 더 이상 듣기 싫습니다. 어렵다, 애매하다, 불투명하다 같은 말을 듣고 싶습니다.” ▶독자들이 떨어져 나갈 위험도 있을 텐데요. “몇 년 동안 외부 강연 때문에 시달렸습니다. 줄이고 줄였지만 많을 때는 한 달에 15번 한 적도 있습니다. 평균 1주일에 2번, 전국 곳곳에서 했습니다. 독자 서비스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겠군요. “아닙니다. 한 5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청자가 누구냐 하는 계층에 따라 반복하면 됩니다. 그게 너무 괴롭습니다. 내 스스로 지겨워졌습니다. 여성잡지, 일반교양잡지 등에도 똑같은 질문에 대답해야 하고요. 내 자신을 소비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간 나오면 기자간담회를 하고 사인회도 하는데 결국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려는 안간힘입니다. 그게 기계화됐다는 생각도 들고, 재미도 없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시인으로서 나의 회복입니다. 나는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를 회복해야겠다, 외부와의 관계를 어느 선에서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와 남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시가 좋은 시 ▶언제 결혼했습니까? “결혼한 것과, 결혼식과, 같이 산 것과 아이 낳는 것은 다릅니다. 대학 때 만났고요. 국사교육학과 친구입니다. 박성란, 62년생입니다. 사고를 친 거죠. 제가 감옥 못 간 것 후회하고, 당구 못 배운 것 후회하는데요, 대학 때 작위적인 미팅을 한 번도 안 했고, 선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내를 일찍 만났고, 아이들도 일찍 태어났습니다. 딸은 안유경 25세, 북경대 중문과 졸업하고 지금은 고려대 대학원 다닙니다. 아들은 대학 1학년인데 성균관대 인문계열입니다. 둘 다 전주에서 서울로 가고 나니까 휑합니다. 얘들하고 찌그락뽀그락 사소한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 갈등 사라진 자리가…….” ▶대학교수로서 시인으로서 생활에는 만족하세요? “예. 학교는 제대로 출근하면 봉급 나오니까요. 내가 전업시인 생활을 8년 해봤잖아요. 자유로우면서도 갇혀 있는 것이 전업입니다. 써야 먹고 사니까요. 만족한다기보다는 괜찮아요. 시를 방해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교수라는 직함보다는 술이라든지 망상이라든지 하는 것이 자유로우니까요.” ▶요즘 한 달 봉급은? 한 달 인세는요? “정확히 계산 안 해봤어요. 연봉으로 5,6천쯤 될까…… 인세가 많아요. 강연 때도 적지 않게 줍니다. 아내에게 이실직고할 때도 있고 도서 구입비로 쓸 때도 있고요.” ▶진부한 질문 하나만 할게요. 경상도 출신 시인이 전라도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불편하다거나 후회한 적은 없나요? “전혀 없어요. 초창기에도 전혀 없었어요. 다만 ‘돌발 어휘’는 말고요. 가령 ‘안거’, ‘야냥개 떤다’ 같은 말들요. 나는 그런 말들이 걸리는 대로 다 시에 씁니다. 전라도, 좋아요.” ▶좋은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니 좋은 시란 어떤 시입니까? “(동석자들을 가리키며) 이 형들한테 물어 보세요. 연애를 많이 해라, 술을 많이 마셔라? 그런데 시를 30년쯤 써왔다는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어느날 시 잡지의 제일 앞에 제 이름과 시가 실릴 때가 있습니다.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아무튼 20대 때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좋은 시라는 것은 나와 남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시였습니다. 탁 찍어서 말한다면, 백석 같은…… 지금도 백석 시는 좋아요.” ▶좋은 시를 쓰면 좋은 시인입니까? “결국 좋은 시를 쓴다고 좋은 시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문학을 한다는 것이 좋은 시만 쓰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살아가는 일과 글 쓰기를 끊임없이 일치시킨다는 말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둘을 교통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 세대 선배시인들에게 가장 고마운 것과 가장 불만인 것은 뭡니까? “제가 대학 후배들한테 선배란 밟고 지나가라고 있는 것이지 우러러보라고 있는 게 아니다 하고 말합니다. 문학을 포즈로 하는 선배들도 계시지만, 문학은 오래 하는 것 같아요. 자기 삶을 오래 밀고 가는 게 문학이고, 그게 아닌 것은 대체로 가짜라고 봅니다. 기형도 형이 살았으면 계속 같이 재미있게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아쉽지만 장정일이 더 오래 밀어붙였으면 아주 훌륭한 작업을 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 잘 밀어붙이고 있는 시인으로는 송찬호를 꼽고 싶습니다.” ▶본인에게 누가 인기 대중시인일 뿐이다, 하고 비판을 하면 뭐라 대답합니까? “대답 안 하죠. 시로 보여줘야 하니까. ‘대중’이란 말, 참 괴로운 말인데요.” ▶왜요? “이런 거예요. 대중이 좋아하는 시인이다, 용서합니다, 대중적인 시인이다, 용서합니다. 그러나 대중시인이다, 하는 말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시문학사는 엄혹한 데가 있어요. 대중과의 접점을 어떻게 찾을까, 대중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대중의 혓바닥을 빨았다면, 그것은 아니죠. 앞으로 시를 어렵게 쓰려고 해요. 혁명 시기에 대중을 만났다는 것과 조금 다른 얘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죠.” ▶정말로 시 쓰는 일을 사랑합니까? “시 알잖아요. 김광일이란 인간도 시 알잖아요. 시가 좋아서 문화부 간 것 아닙니까? (우리는 사실 많이 취한 상태에 있었다.) 시를 읽고 쓰는 재미,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꼭 오르가슴을 느껴야 섹스인가. 그 직전까지 떨리는…….” 받아 적기가 불가능했다. 인터뷰를 끝냈다. 초입에 말한, 그의 시 때문에 순진한 독자들이 자.지.러.진.다.고 한 말에 안 시인이 불쾌한 반응을 보여도 하는 수 없다. 그 역시 ‘돌아버리게 만드는’ 시가 좋다고 했으니까 쌤쌤이다. 그러나 진짜로 돌아버리는 현상은 시인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다. 독자들도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나는 좋은 시를 만났을 때 얼마나 돌아버릴 준비가 돼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 돌아버리게 되고, 좋은 그림을 보아도 돌아버리게 되고, 좋은 시를 읽어도 돌아버리게 되는 바이오 신약이 곧 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향정신성向精神性’을 빼버린, 순치된 마약 같은 것이 필요하다. 아니면 향정신성만 남고 마약이 빠지던가. 오늘 안 시인에게 들은 말 중에는 “그들에게 없던 결핍이 나에게는 있었다”는 말이 오래 남았다. 아니 남을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는 ‘가증스러운’ 말이긴 한데, 그래도 그 말이 참 좋은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풍족해진 연후에 안온한 얼굴로 되돌아보는 낡은 결핍이 아니길 빌지만, 또 그러면 어떤가. 피폐해진 현재 상황에서 떵떵거렸던 할아버지 세대를 되돌아보는 산문적 클리셰보다는 낫지 않은가. 김광일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문화부장 역임. 현재 편집국 부국장. 저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간지럽고 싶다, 한없이』 『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이 있음. 김광일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논설위원, 문화부장 역임. 현재 편집부 부국장. 저서 『우리가 만난 작가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간지럽고 싶다, 한없이』 『시보다 매혹적인 시인들』이 있음. 본 기사는 계간 시인세계에 실렸던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문화저널21 & 계간 시인세계 제공 munhak@mhj21.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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