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버스유화20호 작품명 : 애무
파격적인 행보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중광 걸레스님
기괴한 작품을 많이 남기시고 소주와 막걸리를 타서 즐겨 드신 주(酒)선생님
고향은 제주도 26살 통도사로 승가에 입문하였으나 승속을
넘나드는 기행 으로 1979년 승적을 박탈당했다
고인은 음주와 흡연등로로 건강이 쇠한 뒤 2002년 9일 오후 지병으로 타계했다 세수67세
많은 일화를 남기고 가신님
천상병 시인 이외수 시인 걸레스님 세사람의 글을 합하여 (도적놈)이란
책을 내기도 하였지요 자칭 도적놈 셋이라 하여 자유분방을 추구하였던 걸레스님
그 분이 가신지도 7년의 세월....꽃은 피었다 지고 세월은 스러져
사람은 가도 그 향기는 남네 이 시대의 소피스트여....!
어느 봄날. 중광스님이 하나님처럼 모시는 시인 구상 할아버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응, 잘 있지. 다섯 시쯤 동대구역에 내려 한정식 집으로 갈 거야. 걸루 와.” 할아버님은 김수환 추기경, 조각가 고 문신 선생 내외, 중광 스님과 함께 대구에 오셨다. 추기경님은 바로 교구청으로 들어가시고 남은 분들끼리 음식점으로 오신 것이다.
식사자리는 반가운 안부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했다. 유독 스님만이 안절부절, “빨리 일어서자”며 주위 사람들을 채근했다. 대구의 술집이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할아버님도 건강 때문에 문신 선생 내외분과 함께 일찍 숙소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스님은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멕시코 룸살롱으로 진군했다. 알고 보니 대구 마산 간 고속버스 승무원(그 때는 고속버스에도 스튜어디스가 탑승했다)인 묘령의 아가씨와 만날 약속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염불 보다는 잿밥’이라더니 스님은 술과 안주는 거들떠보지 않고 아가씨 보살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밥값과 술값을 책임져야할 대구 사람들은 난감했다. 스님으로부터 그림이라도 한 폭 그려 받아야 그런대로 본전을 건질 텐데 스님은 전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스님의 왼손은 아가씨의 젖무덤을 더듬고 있었고 매직잉크를 쥔 오른손은 안주쟁반 위에 황칠만 해대고 있었다. 부아가 치민 나는 황칠접시를 뺏어 인조대리석 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스님은 “저 놈이 사람 잡겠네”라고 한 마디 하고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H씨에겐 석가모니 얼굴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씌운 그림을, K씨에겐 달마선사를, 멕시코 여주인에겐 해바라기를 그려 주었다. 그리곤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넌 엿이나 먹어.”하는 투로 털이 숭숭 난 남성에 잔뜩 풀을 먹여 “옛따"하고 나에게 밀어 주었다. 그날 밤에 그려준 그것이 가장 중광적인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지금도 내 서가의 한 쪽 구석에서 면벽 가부좌 한 채로 참선 중이지만 빳빳한 풀끼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스님 것을 닮은 모양이다
식사자리는 반가운 안부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했다. 유독 스님만이 안절부절, “빨리 일어서자”며 주위 사람들을 채근했다. 대구의 술집이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할아버님도 건강 때문에 문신 선생 내외분과 함께 일찍 숙소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스님은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멕시코 룸살롱으로 진군했다. 알고 보니 대구 마산 간 고속버스 승무원(그 때는 고속버스에도 스튜어디스가 탑승했다)인 묘령의 아가씨와 만날 약속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염불 보다는 잿밥’이라더니 스님은 술과 안주는 거들떠보지 않고 아가씨 보살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밥값과 술값을 책임져야할 대구 사람들은 난감했다. 스님으로부터 그림이라도 한 폭 그려 받아야 그런대로 본전을 건질 텐데 스님은 전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스님의 왼손은 아가씨의 젖무덤을 더듬고 있었고 매직잉크를 쥔 오른손은 안주쟁반 위에 황칠만 해대고 있었다. 부아가 치민 나는 황칠접시를 뺏어 인조대리석 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스님은 “저 놈이 사람 잡겠네”라고 한 마디 하고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H씨에겐 석가모니 얼굴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씌운 그림을, K씨에겐 달마선사를, 멕시코 여주인에겐 해바라기를 그려 주었다. 그리곤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넌 엿이나 먹어.”하는 투로 털이 숭숭 난 남성에 잔뜩 풀을 먹여 “옛따"하고 나에게 밀어 주었다. 그날 밤에 그려준 그것이 가장 중광적인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지금도 내 서가의 한 쪽 구석에서 면벽 가부좌 한 채로 참선 중이지만 빳빳한 풀끼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스님 것을 닮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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