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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작가가 그린 자화상>시인 김기택의 ‘이 얼굴이 너니?’

by kimeunjoo 2010. 1. 7.
      <작가가 그린 자화상>시인 김기택의 ‘이 얼굴이 너니?’  

      김기택



      주름
      어느 새 얼굴을 다 차지해 버린 이 주름들은 나름대로 이력이 있다. 저마다 이름을갖고 있다. 내가 짜증을 낼 때마다 단골로 잽싸게 달려와 자리를 차지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웃을 때마다 찾아오는 놈, 뭔가 생각하려 할 때 마치 지식인처럼 보이려고 폼을 잡는 놈도 있다. 이놈들은 기막히게 눈치가 빠르다. 늘 내 기분을 미리 읽는다. 나와야 할 때와 들어가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안다.

      내 감정이나 생각보다 반 박자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가 표정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먼저 주름이 생기고, 그 주름에 따라 내가 화를 내거나 즐거워하거나 우울해지는 식이다. 웃는 주름들과 짜증난 주름들, 권태로운 주름들, 슬픈 주름들은 조화롭게 잘 섞여 50대의 한얼굴을 만들고 있다. 어떤 주름들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가리지 않고 활동한다. 이 주름들은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똑같이 활동했으리라.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이들의 기억력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수염  
      불가사의다. 내가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보기 좋게 살찐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수염은 저 홀로 튼튼하고 기름진 것일까? 내 피부는 희고 건조하고 약한 편인데, 그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이런 우량 품종이 나올 수 있을까? 언젠가 전기면도기가 고장 나서 한번 사용했던 일회용 면도기로 수염을 깎은 일이 있다.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깎고 나서 세수를 하는데 얼굴이 꺼끌꺼끌했다. 턱 언저리를 만져보니수염은 그대로였다.

      수염이 오히려 면도날을 깎은 것이었다. 수염이 아니라 차라리 철사였다. 단식을 한다 해도 수염이 시들거나 성장이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 절로 탄식이 나왔다. 내 소심한 성격과 박약한 의지가 반에 반만이라도 내 수염을 닮았더라면, 나도 ‘하면 된다’고 큰소리치며 한 자리 꿰차는 ‘의지의 한국인’이 되었을 텐데.

      탈모  
      “당연히 대머리 아저씨 머리에 있어야 할 대머리가/ 어느 날, 내 거울에 와 있는 것을 본다./ 죽어도 저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발음하는 주둥이가 달린/ 대머리 얼굴을쳐다본다./ 암처럼 비행기 사고처럼 당연히 남의 일이어야 할 대머리가/ 내 목 위에뻔뻔하게 붙어있는 것을 본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참 많았겠구나.”(졸시, ‘대머리’).


      드디어 나에게도 왔다. 신기하다. 늘 멀리서 존경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던 근엄과 위엄과 경륜이 별 볼일 없는 내 머리까지 찾아와 주었다니! 덩치가 작은데다 동안이고내성적이어서 내 얼굴은 늘볼품없었는데, 이제 열등감에서 벗어나라고, 중년의 품위를갖추라고, 시간이 다 알아서 내 얼굴에 볼품을 만들어주는구나. 수천 년을 머리에서머리로 전해오는 이 ‘빛나는’ 전통의 반열에, 아, 영광스럽게 나도 서게 되는구나.

      탈모가 오기 전, 거기에는 8대2로 가르마를 한, 사무원이라는 직업을 고집스럽게 나타내는 머리가 있었다. 그 머리는 내 명함이고 신분증이고 월급이었다. 늘 청결하게다듬고 단정하게 모양을 내주어야 했다. 이제 머리가 얼굴을 바꾸어 버렸다. 마음대로 생각도 직업도 신분도 바꾸라고, 스스로 해체해 버리고 있다. 결코 바뀔 것 같지 않던 내 머리를, 나를, 내 고집이 머리의 과감한 변화 때문에 바뀌고 있다.

      한 오십대의 얼굴에 내가 들어가 있다. '나'라고 굳게 믿어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지금껏 십만 번 이상은 거울을 보았으며, 그때마다 이 얼굴은나였다. 시간이 무수히 나를 변형시켜 과거와 전혀 다른 얼굴이 되었어도, 나는 이얼굴로 돌아다녔고 온갖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이제 가끔은 이 얼굴이 너무 낯설다. 나는 내 고정관념에게 슬며시 물어본다. 정말 이 얼굴이 너니?

      ▲작가 김기택은... 1957년 안양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꼽추’‘가뭄’이 당선돼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사무원’(1999),‘소’(2005),‘껌’(2009)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이수문학상, 지훈문학상 등 수상.


      - 자료출처 : 2009.02.27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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