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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시와 산문 - 김기택

by kimeunjoo 2009. 12. 20.

가려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관을
도로 꺼내려고
소복 입은 여자가 달려든다

막 닫히고 있는 불구덩이 철문 앞에서
바로 울음이 나오지 않자
한껏 입 벌린 허공이 가슴을 치며 펄쩍펄쩍 뛴다

몸뚱어리보다 큰 울음덩어리가
터져 나오려다 말고 좁은 목구멍에 콱 걸려
울음소리의 목을 조이자

목 맨 사람의 팔다리처럼
온몸이 세차게 허공을 긁어대고 있다 가려움

긁어도 긁어도 긁히지 않는
겨드랑이 없는
손톱에서 피가 나지 않는 가려움



개 3

좁고 구불구불하고 우중충한 골목길 안
판잣집 양철지붕 아래

발자국 소리가 지나가기만 하면 짖어대는
앙칼진 소리가 있다

누렇고 비쩍 마르고
귀는 빳빳하게 솟은 놈이리라

소나기 내리면
내리치는 빗방울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쿵쾅쿵쾅 더 크게 만들어서 우는
양철지붕처럼

주먹과 구둣발이 두드리면
심장처럼 쿵쿵 떨리는 소리를 내는
양철대문처럼

온몸을 두려움으로 만들어 짖고 있다

이빨이 다 보이도록
문틈이 구멍이 모든 갈라진 틈이 짖고 있다



건강이 최고야

건강은
너무 건강한 건강은
건강이 너무 많아 어디다 써야할지 모르는 건강은
겨울에도 반팔 입고 조깅하고 찬물로 샤워하는 건강은
몸에 좋다는 것 찾아 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강은
음모처럼 막무가내로 돋아나 아무 때나 아무데서나 뜨거워지는 건강은

범행을 완강히 부인해 왔다. 그러나 경찰이 렌터카에 묻어있는 두 어린이의 혈흔을 확인하고 범행 동기를 추궁하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운전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서 혼자 2병 넘게 먹은 것 같다."고 진술을 번복했다가 다음날 다시 말을 바꾸어 "술에 취해 차를 몰고 가다가 아이들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반항해서 죽였다."고 범행을 일부 시인했다. 사건 초기 탐문 수사에서도 경찰은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에서 건강을 검문한 적이 있었으나 너무 건강해서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영계의 흰 넓적다리 속에 삽입되는 순간 발기되는 이빨. 부드러운 근육의 탄력으로 이빨을 조여 오는 육질. 쫄깃쫄깃하게 저항하다가 뜯겨지는 난폭한 뿌리들. 끈적끈적하게 분비되는 침들. 맛의 오르가즘을 느끼고 부르르 떠는 엄지발가락. 혀를 꽉 껴안고 전율하는 닭살.) 으으, 먹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 핫크리스피 치킨!
아, 잠깐, 잠깐만. 건강이 막 나오려고 그래. 아으, 참을 수가 없어. 가만히 좀 있어봐. 쌀 것 같단 말이야.

얘들아, 학원 갔다 이제 오는구나. 이 귀여운 얼굴로 몇 시간 동안 칠판만 쳐다봤니? 건강도 생각해야지. 이 아저씨는 너무 건강해서 미치겠구나.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핫크리스피 건강 알지? 한 마리 사줄게 따라 올래?


  <산문>

   말하기와 말하지 않기


시 쓰기는 말하려는 욕망이지만 동시에 말을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내면에서 나오려고 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꺼내야 한다는 면에서 그것은 말하려는 욕망이지만, 눈앞에 있는 실제의 사람과의 소통이 아니며 이 세상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말하지 않으려는 욕망이기도 하다. 시가 소통하고자 하는 대상은 눈앞에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 허구적인 사람, 가상의 사람 또는 내 안에서 살거나 자연 속에 있는 무수한 목소리들과 귀들이다.
말은 식욕이나 성욕을 닮았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할 일정한 양의 음식이나 발정을 다스려줄 성행위처럼 사람에게는 몸에서 나와야 할 말의 총량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와야 할 말이 밀어내는 대로 그것들을 몸 밖으로 꺼내는 것인지 모른다. 지나치게 내성적이거나 대화할 상대가 없거나 여러 요인으로 억압되어 말들이 몸 밖으로 배출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몸 밖으로 배출한 말의 양이 정해진 총량에 훨씬 못 미친다면, 몸은 이상 행동이든 강박증이든 어떤 다른 출구라도 찾아서 그 대가를 구하고야 말 것이다. 핸드폰, 인터넷,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통신기술, 영상 매체 등 이 시대에 호황을 누리는 산업은 말과 관련된 산업인 것 같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나는 종종 말이 나를 속이고 있음을 느낀다. 말은 끊임없이 듣는 이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그 귀에 달린 마음의 모난 부분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고, 그 마음이 이해하거나 판단하거나 계산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야 한다. 내 말은 다른 사람의 말로부터 받은 상처를 기억한다. 그래서 말이 흉기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달래거나 단속해야 한다. 상대방의 귀가 듣고 싶은 말을 하려고 내 혀는 끊임없이 최적의 단어를 고르고 거기에 보기 좋은 장식을 단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새 내 말은 아주 먹기 좋고 달콤한 아부가 되곤 한다. 상대방의 말인들 다르겠는가? 끊임없는 동상이몽이 만드는 웃음과 재치와 유머를 곁들여 헛말을 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말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왜곡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참아야 한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할 말 안 할 말을 잘 가리기이며,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좋은 인상을 주면서 제 의도를 전달하기이며, 핵심을 잘 에두르거나 피하기이며, 필요한 한 마디의 말에 불필요한 백 마디의 윤활유를 바르기이며, 결국은 많은 말을 하면서도 하나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기이다. 나는 이런 방면에 서투르지만, 단련이 전혀 안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헛말을 하는 사이, 해야 할 말은 억눌린 채 쌓인다.
하루 종일 말을 하고 나면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 말이 하고 싶어진다. 그러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판단하거나 오해하거나 득실을 계산하는 귀가 아니라 허공처럼 그냥 다 들어줄 수 있는 가상의 귀가 있어야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어줄 흙구덩이와 바람과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숲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말은 말이되 음성이 없고 혀가 없고 발음이 없다. 그 말은 말하는 자의 감정이나 정서는 많지만 말하려는 내용은 별로 없다. 그 말은 공기를 진동시켜 작동하지 않고 몸을 진동시켜 몸 안에서 작동한다. 그 말은 몽상이나 백일몽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말이 아니지만, 실제로 글로 옷을 입고 종종 낭송으로 육체를 얻는다는 점에서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말은 말에서 의미가 되기 이전의 부분, 말의 의미가 닿지 않는 부분을 사용하고자 한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부분, 즉 침묵에 가까운 부분을 사용하고자 한다. 말의 침묵에 해당하는 부분은 의미보다는 정서나 감각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의미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지의 암시를 통해 전달되므로 듣는 이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캐내거나 만드는 의미이며, 또한 '확정되거나 결정되지 않고 늘 발생 중'인 의미, '미리 존재하는 사유를 드러내지 않는 야생적 의미'(김화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듣는 귀에게 의미의 이해와 판단과 계산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듣는 귀로부터 자유롭다.
시 쓰기 또는 시로 말하기는 말로 지친 말을 쉬게 하는 말하기이며, 말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말하기이다.

(문학사상, 2009년 1월호)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태아의 잠 』『 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 』
        『 소』『 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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