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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구직 - 시:김기택

by kimeunjoo 2009. 12. 20.

            구직


            여러 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 되면 미련 없이 거둬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대중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 번 입어 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 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성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고쳐주는 세상 아닌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 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 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 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 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들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이 있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태아의 잠 』『 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 』
                    『 소』『 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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