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시 모음
* 겨울에 그리는 수채화 *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면 당신의 곱고 하얀 마음을 눈 속에서 찾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더 하얗게 되면 당신의 그 고운 마음씨들이 하얀 꽃가루처럼 날아가서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숨어 버릴 테지요.
개울물이 꽁꽁 얼어 버리면 당신의 맑은 노래 소리를 겨울 내내 듣지 못할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더 반짝거리면 당신의 그 맑은 노랫소리는 퐁당 깊은 물속에 들어가서 물고기들의 자장가로 변해 버릴 테지요.
찬바람이 씽씽 불어버리면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늘에서 볼 수 없을까봐 걱정됩니다. 온 세상이 너무 추우면 당신이 베푸는 따스함들이 살금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어린이들의 말동무가 되어 있을 테지요.
* 겨울에 읽는 하얀 편지 *
당신을 향해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간 밤새도록 당신이 써 보낸 하얀 편지가 하늘에서 왔습니다.
잠 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걸음 소리도 내지않고 조용히 조용히 그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큰지 온 세상을 덮으며 "사랑해!"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도 내가 그립답니다. 당신도 내가 보고 싶답니다. 당신도 내가 너무 너무 기다려 진답니다.
새 날을 맞이하며 창을 여는 순간부터 한참을 일하는 분주한 낮시간에도 당신은 언제나 나를 생각한답니다.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눈물 방울져 떨어지면 닿는 곳 점 점이 쉼표가 되어 쉬어가면서 읽고 또 읽습니다.
넘어져 하얀 편지속에 폭 안기면 당신은 나를 더욱 꼬옥 안고 "많이 사랑해!" 하는 느낌이 옵니다.
하얀 편지를 읽는 이 행복한 시간. 내 마음속에서 피어난 하얀 입김으로 "나도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
* 눈 오는 밤의 이별 *
우리! 이 밤 슬픈 이별의 길을 걷자. 초가지붕 가득히 겨울을 싣고 너의 옷자락을 매만지며 눈물을 가득 익혀 떨구어 보자.
눈송이 하나에 추억 하나 쌓여지고 가로등의 불빛도 지쳐가는데 날이 밝으면 모두가 지난 일이 되고 너의 일기장엔 내 이름마저도 지워질 텐데......
우리! 이 밤, 너와의 걷는 이 밤이 하늘에서 가득히 흰 눈이 내려 깨끗한 추억으로 내 가슴에 묻히기를 원하는구나.
벌써 뿌옇게 새벽이 일어나고 쌓이는 눈따라 아쉬움만 더 하는데 너를 싣고갈 기차는 하얀 숨을 고르고 밤새 걸었던 길에는 우리가 걸어왔던 흔적마저 지워 버린다.
이제는
서로의 미래를 위해 헤어질 시간 눈속에서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는 너의 눈에서, 내 가슴에서 이렇게 눈이 되어 녹아내린다.
* 하늘 소리 *
뽀얗게 눈오는 길에 서서 사락 사락 하늘 소리를 담는다
시린 손끝이 색깔을 내고 부딪치는 연약함은 한방울의 물도 못되는데 호 호 내뿜는 따스함엔 그마져 그냥 돌아 눕는다
묻히기 싫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든 노란 단풍 하나는 발끝까지 와서는 지치고 포기했나보다
손을 귀에 대고 듣는 하늘 소리는 그냥 보기만 했던 저 세계의 신비한 소리보다 내 어머니가 날 부르는 소리 차가 기어가는 소리
하늘에는 우리들의 소리들로 가득차있다.
* 겨울여행이 남긴 스케치 *
모과나무 서 있는 마당 한쪽 이젠 더 갈 곳 없는 가을 사연 몇 장이 모질게 따라오는 찬바람을 피해 하얗게 몸을 숨기며 퇴색의 잠자리에 들고 있다
널어놓은 빨래들은 북어같이 흔들거리고 며느리가 많이 떨었던 모양. 소죽 삶는 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졸고 있다 이 집 어른 마실 갔다오기 전에
저걸 걷어야 할 텐데......
잠깐 따스함에 마당에 떨어진 뒹굴고 있는 고드름 몇 조각 위로 넘어가는 햇볕이 마지막 빛을 뿌리고 곧 불어올 차가운 눈바람만 믿고 아직 달려있는 추녀 끝의 몇 놈은 의기양양 뾰쪽한 날을 세운다
지붕 위로 흰 연기 뭉실 동네에는 밥 냄새로 가득한데 "손님. 방이 따시남유?" 호롱불 피워오는 주인의 목소리에 객 앞으로 달려오던 산골 땅거미가 마루 밑으로 들어간다
* 겨울이 그려준 하얀 보고픔 *
밤새 소복 소복 하얀 눈이 내려 보고 싶은 당신 모습을 그렸습니다.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큰 줄 알고 온 세상이 다 보도록 크게 그렸습니다.
어제까지 길을 막던 저 언덕은 오뚝한 당신의 코가 되었습니다. 처량해 보이던 마른 풀들도 오늘은 당신의 머리카락입니다.
유난히 큰 까만 눈은 아니어도 수줍어 속눈썹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환하게 미소띤 얼굴은 아니어도 내가 좋아 쳐다보던 그 모습입니다.
조용히 부는 눈바람은 당신이 나를 향한 속삭임 같고 앙상하여 볼품없었던 나무들도 당신의 손에 들린 하얀 꽃송이 같습니다.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아는 하늘은 내 가슴에 새겨져 있는 모습과 같이 간밤에 그렇게 그렸습니다. 하얗게 그리움으로 그렸습니다.
* 하얀 계절의 기다림 *
하얀 눈으로 쓰신 편지에 아직은 아니라 시니 강가 돌 틈 사이로 아쉬움 걸어놓고 기다리렵니다.
하얀 목련이 활짝 웃을 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물소리가 신나게 노래할 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릴까요.
기다림으로 쌓인 하얀 밭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대면 따스함이 느껴지는 건 당신의 숨결이 가까이 있음입니다.
오늘은 창문을 활짝 열고 서운한 맘 모두 쓸어내고 방안 가득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로만 채우렵니다.
* 하얀 계절의 일기 *
어제 이 강가에서 만났던 노래는 반짝이는 옷으로 갈아입고 돌틈속에 숨었답니다. 모질게 구는 바람이 무서워 조롱 조롱 그렇게 숨었답니다.
하얗게 하얗게 쌓인 눈밭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도 남은 낱알 찾던 철새의 소리도 숨구멍만 조금씩 내놓은 채 빠끔이 숨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한 움큼씩 고운 햇살을 주면 천사들의 따스한 손길 따라 뾰족 뾰족 생명들이 고개를 들고 숨었던 소리가 날아다니고 초롱 초롱 보고픔이 꽃이 필 테지요.
앙상한 나무를 마구 때리는 바람도 이젠 지쳐 힘이 없나 봅니다. 숨바꼭질했던 나무의 새 순들이 바람소리보다 더 크게 껍질을 벗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 하얀 겨울의 노래 *
겨울에는 하얀 눈이 있어 좋습니다. 하얀 눈꽃이 조용히 내리면 매섭게 설치던 찬바람도 아침에 보이던 산새들도 덩달아 가만히 숲으로 와서 사락 사락 노래를 들으며 쉬다 갑니다.
겨울에는 하얀 노래가 더 좋습니다. 두 손을 입에다 호호 모으고 가만히 혼자서 부르면은 하얀 입김으로 피어올라 처마끝 고드름 녹는 소리와 살랑살랑 박자를 맞추며 날아갑니다.
겨울에는 봄을 기다려서 좋습니다. 하얀 목련이 마당에 필 때면 조용히 잠자던 봄바람도 숨었던 화사한 꽃 노래도 은근히 우리네 곁으로 와서 두근두근 사랑의 가슴을 두드립니다.
겨울에는 내 님 마중가기 좋습니다. 강물이 추워서 서로 안으면 님이 부르시는 노래라도 멀리서 희미한 모습이라도 들리든 보이든 그날이라면 걸음 걸음 날으듯 저 강을 건너렵니다.
* 겨울로 가는 바닷가에서 *
꿈같은 사랑의 미련 때문에 하얗게 진이 다하도록 파도가 발버둥을 치며 소리소리 지르고 있다.
까맣게 흔적이 없는 늪에 앉아 푸념조차 퇴색해버린 몽돌을 붙잡고 묻고 또 물으며 지난 계절의 흔적을 뒤져봐도
당신이 내게 한 황홀한 고백이, 내가 당신에게 속삭이던 밀어가 까만 젖꼭지 같은 잔돌이 되어 이제는 좌르르 다른 소리를 내는데
아침에 보이던 환한 얼굴은 어디 가고 흰 머리칼로 물기 가득 뿌리면서 잔뜩 몰려온 바다 안개들이 날름날름 그 소리마저도 삼켜버린다.
*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빨간색 머플러로 따스함을 두르고 노란색 털 장갑엔 두근거림을 쥐고서 아직도 가을 색이 남아있는 작은 공원이면 좋겠다.
내가 먼저 갈께 네가 오면 앉을 벤치에 하나하나 쌓이는 눈들은 파란 우산 위에다 불러모으고 발자국 두길 쭉 내면서 쉽게 찾아오게 할거야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온 세상이 우리 둘만의 세계가 되어 나의 소중한 고백이 하얀 입김에 예쁘게 싸여 분홍빛 너의 가슴에선 감동의 물결이 되고
나를 바라보는 너의 맑은 두 눈 속에 소망하던 그날의 모습으로 내 모습이 자리하면 우리들의 약속은 소복소복 쌓이는 사랑일 거야
우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첫눈 *
누가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순백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저리도 조용히 기도하는가
당신이 가져다준 설레임으로 뽀얀 미소의 창을 열고 우리는 소망의 가닥가닥들을 여미고 펼치기를 얼마나 했으며
만나고픔에 무작정 달리고 보고픔에 거저 소리치고 사랑하고픔에 두 팔을 한껏 벌렸는데
오! 내 품에 달려와 안기운이는 하늘 마음 가득 담고 온 사랑이어라
* 겨울의 회상(回想) *
당신이 손 내밀 때 왜 내가 잡질 못했던가?
뿌옇게 색이 바랜 아쉬움들을 가슴 속에다 억지로 밀어넣어도
회상(回想)의 실핏줄을 타고 튕겨나와선 가끔씩 가끔씩 심장을 꼬집으며
덮어두었던 노래를 열고
가슴을 데우려고 하지만
굳어진 현실의 시간앞에선 그저 아랫입술만 꼭꼭 씹습니다.
그때 하지 못했던 그 고백들은 이제는 탁한 숨소리가 되어
가슴이 아닌 세월에다 불을 붙이며 한 줄 나이테로 사라지는 오늘,
당신이 손내밀때 잡지 못했던 손은 지금 주머니에서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설날 가는 고향 길 *
내 어머니의 체온이 동구밖까지 손짓이 되고 내 아버지의 소망이 먼길까지 마중을 나오는 곳
마당 가운데 수 없이 찍혀있을 종종 걸음들은 먹음직하거나 보암직만해도 목에 걸리셨을 어머니의 흔적
온 세상이 모두 하얗게 되어도 쓸고 또 쓴 이 길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종일 기다렸을 아버지의 숨결
오래 오래 사세요. 건강하시구요 자주 오도록 할께요 그냥 그냥 좋아하시던 내 부모님.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내 어머니, 내 아버지 이젠 치울 이 없어 눈 쌓인 길을 보고픔에 눈물로 녹이며 갑니다
오광수 시인의 짧은 시 모음
* 산에서 본 꽃
산에 오르다 꽃 한 송이를 보았네 나를 보고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산에서 내려오다 다시 그 꽃을 보았네 하늘을 보고 피어있는 누님 닮은 꽃
* 봄볕
꽃가루 날림에 방문을 닫았더니 환한데도 더 환하게 한 줄 빛이 들어오네 앉거라 권하지도 않았지만은 동그마니 자리 잡음이 너무 익숙해 손가락으로 살짝 밀쳐내 보니 눈웃음 따뜻하게 손등을 쓰다듬네!
* 가을햇살
등 뒤에서 살짝 안는 이 누구신가요? 설레는 마음에 뒤돌아보니 산모퉁이 돌아온 가을 햇살이 아슴아슴 남아있는 그 사람 되어 단풍 조막손 내밀며 걷자 합니다
* 홍시(紅枾) 두 알
하얀 쟁반에 담아 내온 홍시 두 알. 무슨 수줍음이 저리도 짙고 짙어서 보는 나로 하여금 이리도 미안케 하는지 가슴을 열면서 가만히 속살을 보이는데 마음이 얼마만큼 곱고 고우면 저리될까? 권함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 낙엽 한 장
나릿물 떠내려온 잎 하나 눈에 띄어 살가운 마음으로 살며시 건졌더니 멀리 본 늦가을 산이 손 안에서 고와라.
* 홍류폭포
수정 눈망울 살금 돌 틈에다 감추고 잠깐 햇살에 또르르 한줌물 손에담고 언제였나 오색 무지개가 꿈인 듯하여 바람도 피하는 간월산 늙은 억새 사이로 가을 지나간 하얀 계곡을 내려다봅니다.
* 가을에는
가을에는 나이 듬이 곱고도 서러워 초저녁 햇살을 등 뒤에 숨기고 갈대 사이로 돌아보는 지나온 먼 길 놓아야 하는 아쉬운 가슴 그 빈자리마다 추하지 않게 점을 찍으며 나만 아는 단풍으로 꽃을 피운다
* 비 오는 밤
기다린 님의 발걸음 소리런가 멀리도 아닌 곳에서 이리 오시는데 밖은 더 캄캄하여 모습 모이지 않고 불 나간 방에 켜둔 촛불 하나만 살랑살랑 고개를 내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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