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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너 - 장석주

by kimeunjoo 2012. 8. 26.

 

 

너 / 장석주

 

너 허망하게 죽고 싶다
아니, 아슬아슬하게 살고 싶다
아니아니, 뼈 아프게 살고싶다
라면하나 끓여 먹고싶다
담배를 피고싶다
그냥 별을 보고싶다
실컷 잠들고 싶다
참았던 오줌을 누고싶다
오늘 새로산 시집을 혼자 보고싶다
병 들고싶다

들개처럼 헤메이고싶다
집 없는 걸인이고 싶다
끝없이 실패하고싶다
대책 없이 굶고싶다
사흘 밤 낮쯤 뜬눈으로 세우고 싶다
지난 십년간 쓴 일기를 태우고싶다
못부친 편지를 찢으며 울고싶다
피 흘리고 싶다
가을 고궁을 걷고싶다
내 외로움을 개에게 주고싶다

낙엽을 태우면 하늘로 올라가는
한줄기 흰 연기를 가리키며
인생은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이라고
딸에게 가르키고 싶다
도서관 계단에 하염없이 서 있고싶다
지는 해를 바라보고싶다
멀어서 더욱 미치게 사무치는 이념의 별이여
단 한번의 벌침이여
퉁퉁 부어오른 가볍고 혹독한 상처여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 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길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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