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는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는가 / 이진명
한 선방(禪房) 승(僧)의 아무 고저장단 없는 먼,마른 목소리의 첫째 이야기를 듣는다
말도 없이 출가해 수년 후 정식 비구계를 받고 고향집 양친을 찾아 갔노라고
50줄 아버지가 오늘 나랑 함께 자자며 이부자리를 펴시는데
중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안 잡니다 쌀쌀맞게 내뱉고는 다른 방에서 잤노라고
한 선방 승의 찬 하늘 구만리를 가는 기러기라도 배웅하는 듯, 젖힌 고개의 둘째 이야기를 듣는다.
누나가 미국으로 이민간다고,공항에서라도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전갈온 적 있었노라고
절방 마루 끝에 서서 비행기 출발했겠구나 산문 밖이나 건너다 보았노라고
누나 아이가 둘이라는데 그 조카들 얼굴도 모르고
한 선방 승의 고저장단 없는 먼 , 마른 목소리의, 이번에는 아주 작은 웃음기가 입가에 짧게 머문 셋째 이야기를 듣는다
이번 해제 때 고향집 늙은 양친을 보러갔노라고
대문에 들어섰는데 아버지가 떡 쳐다보시더니 누구슈, 그러더라고
이십오륙년 만이가... 사라지는 아주 작은 웃음기
내 귀는 어찌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는가
절(絶), 절(絶), 절(絶), 끊는, 끓는 얼음의 고요
핏줄이 터지는 별세계 너무 매운 이야기를
녹음(綠陰) / 이진명
하산길이었다
아래로 동네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지
흠칫, 가슴이 펄떡 한다
다시 산으로 올라갈까
집으로 가지 말까
녹음이 찌르르르 울었다
산과 집을 오간 짧은 사이
밟고 있던 그늘 바위에 없던 이끼가 뻗치고
괜히 발 하나가 흘렀다
가슴이 한번 펄떡 한 거였는데
별이 튀게 발목이 비틀렸다
어디로 비틀린 것일까
집으로 가면 새끼가 있고
새끼가 끌어안고 먹는 제일 보기 싫은 라면이 있다
어디로 비틀린 것일까
산으로 가면 죽은 엄마가 있고 죽은 외할머니가 있고
그이들 그림자처럼 앉고 서는 線香 타는 냄새의 독바위가 있다
집에는 버려야 할 묵은 우유가 두 병 있고
산에는 나를 보지 못하는
눈물이 고이는 내 여자들이 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나 / 이진명
우이동 삼각산 도선사 입구 귀퉁이
뻘건 플라스틱 동이에 몇다발 꽃을 놓고 파는 데가 있다
산 오르려고 배낭에 도시락까지 싸오긴 했지만
오늘은 산도 싫다
예닐곱 시간씩 잘도 걷는 나지만
종점에서 예까지 삼십분을 걸어왔지만
오늘 운동은 됐다 그만두자
산이라고 언제나 산인 것도 아니지
젠장 오늘은 산도 싫구나
산이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도선사 한바퀴 돌고 그냥 내려가자
그런 심보로 도선사 한바퀴 돌고 내려왔는데
꽃 파는 데를 막 지나쳤는데
바닥에 지질러않아 있던 꽃 파는 아줌마도 어디 갔는데
꽃, 꽃이, 꽃이로구나
꽃이란 이름은 얼마나 꽃에 맞는 이름인가
꽃이란 이름 아니면 어떻게 꽃을 꽃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별안간 꽃이 사고 싶은 것, 그것이 꽃 아니겠는가
몸 돌려 꽃 파는 데로 다시 가
아줌마 아줌마 하며 꽃을 불렀다
흰 소국 노란 소국 자주 소국
흰 소국을 샀다
별 뜻은 없다
흰 소국이 지저분히 널린 집 안을 당겨줄 것 같았달까
집 안은 무슨, 지저분히 널린
엉터리 자기자신이나 좀 당기고 싶었겠지
당기면 무슨, 맘이 맘이 아닌
이즈음의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 자기 위로
잘났네, 자기 위로, 개살구에 뼈다귀
그리고 위로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냐, 어쨌든
흰색은 모든 색을 살려주는 색이라니까 살아보자고
색을 산 건 아니니까 색 갖고 힘쓰진 말자
그런데, 이 꽃 파는 데는 절 들어갈 때 사갖고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올리라고 꽃 팔고 있는 데 아닌가
부처님 앞엔 얼신도 안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다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
내일이 어버이날이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촘촘하여 빠져 나가지 못한다 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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