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유감
-----당선 시들을 읽고 임 보
새해 아침에 조간을 받게 되면 제일 먼저 찾아 읽는 것이 신춘문예 당선작품들이다.
금년엔 얼마나 특출한 작품이 당선의 영예를 얻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꼼꼼히 작품을 읽어 본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신춘문예 당선 시들 가운데 심금을 울리는 작품은 별로 만난 것 같지 않다.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만이 그렇게 느낀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올해도 경향의 여러 신문사들이 예년과 마찬가지로 많은 ‘신춘문인'들을 등단시키고 있다.
신문사가 신년을 기해 신인들을 발굴하는 제도는 우리나라만의 관습으로 보인다.
문예지가 별로 없었던 시절에 문학작품들이 신문의 문화면에 게재되면서 아마 신춘문예 제도가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 된다.
어떤 신문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행했으니 그 역사가 80여 년이나 되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신춘문예는 역량 있는 문인들을 많이 배출해 냄으로 한국문단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문학 지망생들에게는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리라.
당선자는 신년원단 지상에 작품과 더불어 화려하게 보도됨으로, 하루아침에 이름을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가 내건 적지 않은 고료도 매력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금년에도 어느 중앙지는 시의 응모작품이 7,000여 편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니 신춘문예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 많은 응모작 가운데서 선택된 당선작이 기대와는 달리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읽히지 못한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없지 않아 보인다.
응모된 작품들의 수준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선정의 과정에 문제가 있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수천 편의 응모 작품들이 다 수준 미달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선정의 과정을 한번 따져볼 수밖에 없다.
대개는 몇 명의 예심위원들에 의해 10여 명 내외의 본선 후보자들이 선정되고,
그들의 작품을 놓고 둬 명의 본심위원들이 당선작을 결정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몇 명의 예심위원들이 그 많은 응모작품들을 얼마나 충실하게 읽을 수 있는가?
둘째, 예심위원들은 자신들의 취향 위주로 작품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셋째, 본심위원들은 후보작들이 만족스럽지 못할지라도 당선작을 결정한 경우는 없는가?
넷째, 본심위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기울지 않고 공정하게 당선작을 결정하는가?
작품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작품의 우열을 가리기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다.
자연히 평가자의 성향과 가치관이 작품 평가에 관여하게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선작의 성향은 이미 예심위원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도 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의 예심위원들이 그들의 기호에 맞는 작품들만을 고르게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거기다가 또한 본심위원들의 취향이 작용하게 되면 편협한 당선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편협성의 취약점을 보강하는 방법은 없는가? 있을 것도 같다.
애초 심사자들을 구성할 때 성향이 다른 다수를 동참시키는 것이다.
예심인 경우는 최소한 4명 이상의 선정위원을 두 파트로 나누어 상대 파트의 선정에서 탈락한 응모자들을 재심하여 건져내는 장치도 필요하다.
한편 본심인 경우도 가급적이면 시풍이 다른 3인 이상의 심사자를 두는 것이 편파적인 심사를 줄이는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문사 측에서는 예심이고 본심이고 간에 해마다 심사위원들을 교체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심사위원을 위촉할 때에는 이미 다른 신문사에 위촉 받은 사실이 있는가를 확인한 다음 중복을 피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것이 몇 사람의 취향에 의해 한국문학이 좌우되는 것을 억제하고, 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문학풍토를 조성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요즈음 문예창작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에서는 신춘문예 응모를 위한 작품 지도를 특별히 하는 모양이다.
신문사에 따라 단골 심사위원이 누구인가, 혹은 여러 신문에 많이 관여하고 있는 심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자료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특정 신문사의 경향과 심사자의 성향에 맞추어 지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러한 지도가 주효하는지 실제로 성과를 거두는 것 같기도 하다.
당선작의 성향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그런 난센스가 어떻게 해서 가능하단 말인가? 특정한 심사위원들의 편협한 성향이 불러온 결과다.
신춘문예 당선 작품은 시를 지망하는 이들에게는 시의 전범이 된다.
그래서 당선작과 유사한 성향의 시를 쓰려는 풍조가 생겨난다.
나아가서는 문단의 풍토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신문사는 자신들이 시행하고 있는 신춘문예 제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원만하고 바람직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다.
완성도가 부족한 작품이 당선작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당선작은 신선한 내용이 조화로운 구조를 통해 적절한 언어로 표현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언어구조물이어야 독자에게 감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 없는 경우라면 당선은 보류해야 마땅하다.
심사자는 개인의 취향에 동요되지 않고 냉정하게 작품을 볼 수 있는 절대적인 안목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실험적인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실험적인 작업은 등단 후의 과제로 미루어 두어도 늦지 않다.
몇 사람의 심사위원 구미에만 맞고 수많은 독자들을 외면한 그런 ‘좋은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
당선작은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끝으로 응모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신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다음의 말로 위로를 대신하고 싶다.
당선된 작품이 반드시 최상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심사위원이 바뀌면 당선작도 바뀐다.
어쩌면 피와 땀으로 쓴 당신의 작품이 선택을 받은 당선작보다 더 훌륭할 지도 모른다.
개성을 잃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더욱 정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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