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 한하운
무지개가 섰다.
무지개가 섰다.
물 젖은 하늘에
거센 햇살의 프리즘 광선 굴절로
천연은 태고의 영광 그대로
영롱한 칠채(七彩)의 극광으로
하늘과 하늘에 궁륭(穹窿)한 다리가 놓여졌다.
무지개는 이윽고 사라졌다
아쉽게
인간의 영혼의 그리움이
행복을 손모아 하늘에 비는 아쉬움처럼
사라진다 서서히...
만사는
무지개가 섰다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었다.
* 七彩 : 일곱가지 색깔
* 穹窿 :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상
自畵像(자화상) / 한하운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이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飽滿症(포만증)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어머니 / 한하운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換)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何雲 / 한하운
나 하나 어쩔 줄 몰라 서두르네
산도 언덕도 나뭇가지도.
여기라 뜬 세상
죽음에 주인이 없어 허락이 없어
이처럼 어쩔 줄 몰라 서두르는가.
매양 벌려둔 저 바다인들
풍덩실 내 자무러지면
수많은 魚族(어족)들의 원망이 넘칠 것 같다.
썩은 육체 언저리에
네 헒과 균과 悲(비)와 哀(애)와 愛(애)을 엮어
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 보고파진다.
아 구름 되고파
바람이 되고파
어이없는 창공에
섬이 되고파.
* 悲(비): 슬픔. 哀(애): 애증. 愛(애) 사랑.
여인 / 한하운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보지!
한하운의 문학인생 - 김용성
「시가 나에게는 제2의 생명이다. 아니 전생명을 지배하고 있다.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스스로 백광(白光) 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나를 인도한다」라고 했듯이
시인 한하운은 시 작업을 그의 모든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절망과 고독을 딛고 나병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보리피리>와 같은 한스러움이 넘쳐 차라리 아름다운 한국적 가락을 읊어내는 위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40년대말 방랑 끝에 문득 문단의 국외자(局外者)로 등장했다. 그러나「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하루아침에 시인이 되었던 그의 생애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받았고 나시인(癩詩人)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홀대를 감수하기도 했다.
『원한이 하늘을 찢고 우는 노고지리도
험살이 돋친 쑥대밭이 제 고향인데
인목(人木)도 등 넘으면
알아보는 제 고향 인정이래도
나는 산 넘어 산 넘어 봐도
고향도 인정도 아니더라.
이제부터 준령(峻嶺)을 넘어넘어
고향 없는 마을을 볼 지
마을 없는 인정을 볼 지.』- <고향55> 전문(全文) -
어려서부터 객지를 떠돌았던 한하운에게는 인정만 있다면 어디든지 그의 고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야박했고, 고향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때때로「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계절에 서 있고 /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절규하면서 육신의 고향으로 상념의 나래를 펼치고는 했던 것이다.
자서전이라 할 <나의 슬픈 반생기>에 따르면 한하운은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英)이었다.「부계(父系)의 가문을 살펴 보면 대대로 선비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안이며 함흥 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가 여섯 살 나던 25년 함흥으로 이사하여 나갔다. 이듬해 그는 함흥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예능 계통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며 죽 우등생으로 다녔다. 그러나 그가 5학년이 되던 31년 봄, 몸이 무겁게 부어서 아버지를 따라 한달 남짓 온천과 삼방(三防) 약수터를 다니며 요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나병의 시초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32년 봄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의 의사를 좇아 이른바「내선공학(內鮮共學)」이라는 이리(裡里)농림학교에 들어가 수의축산(獸醫畜産)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리농림학교는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듯 함남도청 관내 19명의 응시자 중 유독 그만이 합격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장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급학교 수험 공부를 하라는 꾸지람 때문에 3학년 겨울부터 운동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발자크,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등의 번역 소설을 탐독하고 시의 습작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가 나중에 월남할 때까지 그의 병고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병 간호를 했다는 R이라는 고향의 여학생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5학년 졸업반이던 36년 봄이었다. 몸 전체의 말초부 양역(陽域)에 콩알 같은 결절(結節)이 생기고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가자 여기저기 진찰을 받다가 성대(城大)(현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기다무라(北村淸一)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小鹿島)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
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그의 병은 다소 낫는 듯 했다. 그래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성계고등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다. 그러나 2년 남짓 지나면서 다시 병세가 악화하여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했다. 열심히 치료를 하면 병은 또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중국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고, <조선 축산사(朝鮮畜産史)>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했다. 그것이 43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부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귀국하여 일단 고향으로 간 그에게 아버지는 기분 전환을 하라고 함남도청 축산과에 그를 취직시켰으나 집에서 다니기가 싫었던 그는 도내 장진군 개마고원으로 들어갔다.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은 추위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다시 남쪽 지방을 지원하여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해 갔다.
1945년 봄이었다.
「결절이 콩알 같이 스물스물 몸의 양역에 울뚝불뚝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먹은 소리다.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직장의 상사마저 그가 나환자라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는 다시 함흥 중앙동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때부터 두문불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낯익은 이목을 피해 밤을 이용했다.
전신에 고름이 흐르고 방안에는 악취가 풍겼다. 그 무렵부터 48년 그가 월남할 때까지 4년간이 가장 처절한 투병 기간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구가하려고 했다. 이름마저 본명을 버리고 하운(何雲)이라고 고쳤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 <파랑새55> 전문 -
'파랑새'가 되고자 하는 것은 동경이요, 이상이었다. 현실은 지옥이었다.
살아가는 것은「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기」위해서였다.
게다가 기뻐해야 할 8ㆍ15 광복은 그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 주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산을 몽땅 빼앗기고 나자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아우의 뒷전을 따라다니며 노점 책장사를 했고, 돈이 조금 모이자「건국서사](建國書肆)라는 책점을 차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 데모를 구경하다가 혐의를 받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나오는 곤욕을 치렀던 그는 47년 4월 북괴를 전복하겠다는 의거를 꿈꾸던 아우가 체포되는 바람에 그도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까지 끌려 갔었으나 나병이 악화되자 겨우 병보석이라는 명목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를 정성껏 간호해 왔던 R 여인도 아우와 함께 끌려갔고 그 전 해에 어머니는 세상을 따나고 없었다. 그때 그는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는데, 아마도 목적은 자신의 약을 구해 보려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서울을 거쳐 나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대구의 애락원(愛樂園)을, 부산의 나요양소인 상애원(相愛園)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대구 동산병원(東山病院)에서 '다이아송' 60알과 서울의 천우당(天佑堂) 약방에서 '대풍자유(大楓子油)' 3병을 구해 6월 하순에 다시 월북,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불심 검문에 걸린 그는 병보석을 어기고 남한에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다시금 원산 송도원이 가까운 어느 건물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보초자를 속이고 탈주를 감행하여 도보로 동두천을 거쳐 재차 월남을 했으니 그것이 그해 8월이었다. 자유를 찾았으나 나환자인 그에게는 몸을 쉴 단칸 초목도 없었다. 그는 유류표박의 집시처럼 남한 각지를 떠돌며 깡통을 들고 구걸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서울로 와 47년 동지까지는 헌 가마니 한 장으로 쓰레기통 가에서 밤을 지새며 보냈다. 밤사이 옆에서 자던 한 동료 거지가 죽었다. 무서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했다.
명동 거리에서 바, 다방, 음식점, 상점 같은 곳의 출입구를 막아서서 돈을 받아내거나 시를 팔아 연명했다. 어느덧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진 한하운은 몇몇 문인들을 사귀게 된다. 그리하여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한하운 시초>라 하여 무려 13편의 시가 한꺼번에 실렸다.
선자(選者) 이병철(李秉哲)은 거기 <한하운 시초를 엮으면서>라는 글에서「내가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죄수 하운 형(何雲兄)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첫여름이었다. 친구 박용주(朴龍周) 형의 간곡한 소개로 정처없는 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방황하고 섰는 걸인 하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쓰면서 그의 시를 처절한 생명의 노래요, 높은 리얼리티를 살린 문학이라고 소개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전라도 길49> 전문 -
<소록도로 가는 길에>란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커다란 반응을 일으켜「정음사」에서는 무조건 시집을 내겠다고 나서 그는 명동 성당의 방공호에서 원고를 정리했다. 그리하여 그의 첫시집인 <한하운시초>(26편 수록)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해 8월 경기도 수원 세류동 정착촌인 하천 부락에 입주한 그는 이듬해 경기도 부평 소재의 성계원으로 이주, 회장이 되고 52년에는 그곳 도로 건너에「신명보육원」을 창설하여 세상에서 천대받는 미감아 아동을 10여 명 수용했다.
그런데 53년 여름 그와 그의 시가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른바「나시인사건」(癩詩人事件)으로, 발단은 아마도 <한하운시초> 재판이 6월에 나오면서부터로 보인다.
「1953년 8월 1일부터 주간지 '신문의 신문'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한하운을 문화 빨치산이라 말한 데서 사건은 일어나고 심지어 한하운이라는 나의 아호마저 국가 멸망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시의 내용마저 적색시라는 것이며.... 또한 혹독하게도 나 자신마저 허구의 인물이라고 날조하여 떠들어 댔다」 - 한하운: <보리피리에 관하여>에서) -
여기에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취재를 지시한 사람이 서울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있던 오소백(吳蘇白)이었다.
「최초의 한하운시초 중에 <데모>라는 시가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피빛 기빨이 간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당시 평론가 이모라는 사람이 정음사(正音社)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모양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동기는 시시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경찰뿐만 아니라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었으나 한하운이란 인물이 실존함은 물론, 그의 시도 불온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 오소백 회고담 -
이 사건을 취재토록 하면서 사건을 확대했다 하여 오소백과 사회부 차장이던 문제안(文濟安) 기자가 신문사로부터 파면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그러나 그 취재 과정에서 한하운으로부터 그의 대표작인 <보리피리>를 얻어 내었다. 신문사를 찾아왔다가 그는 편집국 안에서 즉석에 <보리피리>를 썼던 것이다. 이 시는 55년에 간행된 제2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56년부터 그를 사귀었던 김창직(金昌稷)은「그는 떡대가 크고 씨름대장처럼 생겼지만 보기보다는 내성적이고 깐깐한 편이었다」고 그의 성격을 말하면서도 술도 보통 이상으로 잘 마셨다고 한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보리피리> 이후의 작품들이 그 전의 작품들에 비해 처진다는 데에 일치한다. 나병이 치유되고 유명해짐으로써 그만큼 치열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문단의 일각에서 추리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병철)의 첨삭이 들어 있었던 까닭일까. 그렇다면 그가 남 앞에서 직접 쓴 <보리
피리>의 탁월성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는 <보리피리> 이후에도 유수한 문예지에는 그의 시가 거의 실리지 않았다. 그는 73년 여름 수뢰(受賂) 혐의로 당국에 구속되었다가 오소백의 진정으로 풀려 나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병인 간경화를 앓다가 75년 십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김용성(金容誠): <문학사 탐방>(한국 일보1982.11.20) -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kiho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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