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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사랑 - 나희덕

by kimeunjoo 2011. 2. 21.

 

 

 

 

 

사랑 / 나희덕

 

피 흘리지 않았는데
뒤돌아보니
하얀 눈 위로
상처 입은 짐승의
발자국이
나를 따라온다

저 발자국
내 속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와
한 마리 짐승을 키우리

눈 녹으면
그제야
몸 눕힐 양지를
찾아 떠나리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 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 나희덕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솔잎혹파리가 숲을 휩쓰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순간인 듯.. 한 계절인 듯..

마음이 병들고도 남는 게 있다면

먹힌 마음을 스스로 달고 서 있어야 할

길고 긴 시간일 것입니다.

 

수시로 병들지 않는다 하던

청청(靑靑)의 숲마저

예민해진 잎살을 마디마디 세우고

스치는 바람결에도

잿빛 그림자를 흔들어댈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단풍이 든 것만 같아

그 미친 빛마저 곱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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