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질병 / 마종기
1. 꽃
해 늦은 저녁, 병원 뜰에서
꽃에게 말을 거는 사람을 본다.
조용히 건네는 말의 품위가
깨끗하고 거침이 없다.
나도 말을 먼저 했어야 했다.
꽃 하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부끄러워 얼굴 붉히는 사람.
꽃에게 말하는 이의 길고 추운 그림자,
저녁의 꽃은 춥고 아름답다 .
2. 새
비오는 날에는 , 알겠지만
새들은 그냥 비를 맞는다.
하루종일 비오면 하루종일 맞고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에는
새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새들은 눈을 감는다.
말을 하지 않는 당신의 눈의 그늘,
그 사이로 내리는 어둡고 섭섭한 비,
나도 당신처럼 젖은 적이 있었다.
다시 돌아서고 돌아서고 했지만
표정 죽인 장님이 된적이 있었다 .
3 . 시 (詩)
하루를 더 살면 그만큼 때가 묻고
한 해를 더 살면 그만큼 때가 더 는다
매일처럼 목욕하고 때를 벗겨내는
친구의 피부는 새롭고 밝다.
내 시(詩)를 보면 왜
때만 많이 만져질까.
때를 씻고 지우다보면
지운 자국이 매끄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때가 많은 시(詩)
때 묻은 것이 나 같구나, 하면서
친구처럼 피나도록 씻지 못한다
폭설 / 마종기
무엇이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가
깊은 산 속에서 만난 눈사태
앞이 보이지 않게 한점 없이 내리는 꽃잎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보다 조용하다
온 몸에 눈 덮고 잠이 드는 나무들
아름다운 것은 조용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간단하다
아직 잠들지 못한 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는가
폭설을 핑계 삼아 기대고 다가서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게 서로를 만지는 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큰 눈꽃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용한 것이 무서워진다
저녁이 내리는 우리들이 무서워진다
늙은 비의 노래 / 마종기
나이 들면 사는 게 쉬워지는 줄 알았는데
찬비 내리는 낮은 하늘이 나를 적시고
한기에 떠는 나뭇잎 되어 나를 흔드네.
여기가 희미한 지평의 어디쯤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사방의 시야를 막고
헐벗고 젖은 속세에 말 두 마리 서서
열리지 않는 입 맞춘 채 함께 잠들려 하네.
눈치 빠른 새들은 몇 시쯤 기절에서 깨어나
시간이 지나가버린 곳으로 날아갈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없고 늙은 비의 어깨만 보이네.
세월이 화살 되어 지나갈 때 물었어야지,
빗속에 혼자 남은 내 절망이 힘들어할 때
두꺼운 밤은 내 풋잠을 진정시켜주었고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편안해졌다.
나중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안개가 된 늙은 비가 어깨 두드려주었지만
아, 오늘 다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빗속에 섞여 내리는 당신의 지극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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