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 三顧草廬)]
[훈 음]
[三 :석 삼.顧; 돌아볼 고.草: 풀 초.廬: 풀집 려]
<중국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草廬)를 세 번이나 찾아서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은 일.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
1) 후한(후한) 말엽, 유비(劉備:자는 현덕(玄德),161∼223)는 관우(關羽:자는 운장(雲長),?∼219), 장비(張飛:자는 익덕(益德),166?∼221)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全軍)을 통솔할 군사(軍 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 휘(司馬徽)에게 군사(軍師)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伏龍)은 누구고 봉추(鳳雛)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 : 자는 공명(孔明),181-234)이 복룡인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 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 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은 새파란 애숭이라던데…." "그까짓 제갈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다." 마침내 수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적벽대전 (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 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 (蜀漢)을 세워 황제(皇帝 소열제(昭烈帝),221∼223)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어 후주(後主) 유선 때까지 2조(二朝)를 섬겨 후세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출전]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선제께서 신을 벼슬이 없는 천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외람스럽게도 몸을 굽히어 세 번이나 초가집의 가운데에서 나를 찾아 주시고 신에게 당세의 여러 가지 일을 물음이라.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크게 느껴 드디어 선제의 밑에서 일할 것을 허락을 하더니, 뒤에 나라가 기울 제를 만나서, 책임을 패하여 가는 군인의 즈음에서 받고, 명령을 어려운 사이에서 받음이 지금까지 二十一 년이 되니라. (臣本布衣로 躬耕南陽하여 苟全性命於 亂世하고 不求聞達於諸侯러니 先帝不以臣卑鄙하시고 猥自枉屈하사 三顧臣於草廬之中하여 咨臣以當世之事라 由是感激하여 遂許先帝以驅馳러니 後値傾覆하여 受任於敗軍之際하고 奉命於危難之間이 爾來二十一年의라.) [출전]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出師表 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지례(三顧之禮) 삼고지우(三顧知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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