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기생의 옛사랑이 절절이 깃들다 - 길상사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 탓일까? 심우장 주변 민가들의 서민적인 모습과는 사뭇 딴판인 이국적 풍광의 저택들 때문일까? 터벅터벅 걷는 발길이 점점 팍팍해진다. 높다란 담벼락들의 배타적 태도에 마음 한 자락이 꼬이려는 순간, 채송화, 페튜니아, 패랭이, 팬지 등 키 작은 꽃들이 웃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한 평생 살다가는 인생에 부와 빈부가 무슨 차등이 있으랴? 마음 속 불평을 피식 한 자락 웃음으로 날릴 즈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길상사. 그 곳에는 시인 백석과 그의 연인이던 자야 김영한의 사랑의 사연이 깃들어 있다.
‘삼천리문학’ 등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문학여성으로 이름이 높았던 기생 김영한은 우연히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서 당시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평안도 방언으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 백석과 처음 만난다. 이후 이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백석의 부모의 반대에 부딪쳐 시련을 거듭한다.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하여 강제로 결혼시키는 부모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도망쳐 김영한에게 돌아오던 백석. 이런 식으로 결혼을 당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무려 세 차례,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백석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만주로 떠나려 하지만 김영한은 백석의 장래를 위해 그를 홀로 떠나보낸다. 백석과 김영한의 애절한 사랑은 백석이 남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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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났다. 여느 때와 같이 잠시의 이별일 줄 알았던 이 헤어짐은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만주에 머무르던 백석은 해방이 되자 고향인 북에 남게 되었고, 김영한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1970~80년대 최고의 요정으로 알려진 대원각의 여주인이 된다. 훗날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은 김영한이 대원각터 7,000여 평의 대지와 40여 동의 건물들을 <무소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법정스님을 통해 조계종 송광사에 시주하여 오늘의 길상사가 생겨났다.
원래 요정이라는 것이 비밀스럽던 공간이기 때문인지 길상사는 ‘어찌 복잡한 서울 도심에 이런 곳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과 동떨어진 조용하고 아늑한 사찰이다. 극락전 앞을 지나 좌측으로 난 산길을 돌아 선방들이 있는 계곡을 따라 오른다. 비밀의 정원처럼 외딴 곳에 허름하게 자리한 길상헌과 길상화 공덕비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공덕비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이 산기슭 어딘가에서 팔짱을 낀 채 산책하는 백석과 김영한을 마주칠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무엇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인지 이제는 낡고 허름한 길상헌만이 스산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침묵의 선원 그리고 극락전 뒤편을 둘러보고 앞마당에 앉아 선선해진 바람 끝에 몸을 내맡긴 채 일주문을 내려다본다. 문득 눈에 띈 연꽃 한 송이가 삶의 무상함을 떠올려준다. 소리없이 여름이 떠난 자리엔 가을이 들어앉듯, 사랑은 떠나고 사람은 남았다. 그리고 밀실 정치의 터전이던 요정은 이제 풍경 소리 그윽한 법당이 되었다. 돌고 도는 우리네 인연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 사무치게 고맙다 - 최순우 옛집
성북동에는 아직도 찾아갈 곳이 남아 있다.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공간, ‘최순우 옛집’. 이 집은 우리 것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뛰어난 안목으로 그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동양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1972년 구입하여 1984년 타계할 때까지 거처하던 전통 한옥이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앞대문에서부터 몇 편의 시 같은 현판들, 그리고 뒷마당, 기둥, 문창살, 댓돌에 이르기까지 집안 곳곳에 선생이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쓸고 닦은 흔적이 가득하다. 이 옛집을 이제는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하여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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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선생이 느꼈던 사무치는 고마움을 이제 그의 옛집 기둥에서 다시금 느낀다. 'ㄱ'자형 사랑채와 'ㄴ'자형 안채가 서로 만나 틈 'ㅁ'자 형태가 된 가옥 안마당에 앉아 마음을 풀고 눈을 감으면 ‘杜門 卽時 深山’(두문 즉시 심산)'이라는 현판처럼 이곳이 곧 심산이 된다. 집의 모양을 닮은 'ㅁ'자 형 하늘이 안마당으로, 가슴속으로 움푹 안겨든다. 호젓하고 평화롭다. 이토록 조용한 공간에서 쉬어본 적이 언제인가 싶어진다.
사락사락 댓잎들이 비벼내는 소리를 따라 뒷마당으로 들어서니 선생이 ‘달 항아리’로 부르며 사랑했다는 백자 항아리와 키 작은 청죽들이 눈에 띈다. 선생은 두둥실 달 떠오르는 밤이면 푸른 대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항아리를 보며 “이보다 더 아름다운 동양화가 어디 있으랴”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청죽 그림자는 백자 항아리를 간질이고, 바람은 살갗을 간질인다. 자신을 비우고 두둥실 미소 짓는 항아리를 따라 덩달아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비움’과 ‘채움’을 함께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성북동에 가보라. 도심 속 일상의 답답함과 나른함을 비우고 진정한 나를 찾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하이서울뉴스 시민기자/안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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