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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천 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by kimeunjoo 2010. 6. 4.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있어 '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 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시인 이생진 선생님은 이 시를 쓰면서 제목을 요상하게 달았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아주 역설적인 제목이지요.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가 따로 없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 때가

따로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으로 제목을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라고 한 것입

니다.  시인 이생진 선생님은 우리에게 성산포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고향은 충남

서산이지요.

 

제가 2 년 전에 ‘이어도- 환상이 아닌 현실의 섬’이라는 글을 쓰면서 이생진 시인을 인용한

적이 있지요. 꽃보다 돈보다 바다가 좋다고 하는 성산포의 시인 이 생진은 이렇게 노래하기

했습니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글이 삼천포로 빠졌는데, 다시 돌아와서 길상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김영한이라는 사람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절입니다. 김영한이라는 기녀였지만, 정말 대단한 여걸이신 분의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筆名은 자야(子夜)이고, 법명은 길상화였나 봅니다.

길상화 김영한 할머니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절이 길상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나 봅니다.

 

어제 제가 시를 인용하여 말씀드린 대로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고, 백석 선생님

그녀를 위해서 여러 시를 썼다고 합니다.

백석이 이북으로 가고 남한에 남게 된 그녀는 ‘김영한은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

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백석 선생님을 잊으려고 했지만, 끝내 잊을 수 없었고, 그 사

랑을 승화시켜 글을 쓰기도 하고, 불자가 되어 좋은 일을 하기도 한 것이겠지요.

 

김영한 할머니는 자기가 평생 일구었던 요정은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사라는 절을

만들고, 죽기 전에 가지고 있던 현금 2억 원을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 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비평)

출간했습니다.

어제 제 이야기에서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라는 말에 성돈 장로님께서 가장

감탄하셨는데, 정말 멋있는 구절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야라는 사람은 멋있는 사람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시주했다는..(중략) 

 

 

* 이상의 글은 류해욱 요셉 신부님의 글을 옮겨온 것임.

 

 

 

위의 글에서 저는 이생진 시인의 시 속에 있는 말 중, 김영한 할머니의 다음과 같은 말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1,000 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천 억이 백석의 시 한줄만 못하다…. 

참 대단한 여장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을 하고,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한 자야.

그녀가 얼마나 애절하게 백석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인 백석을 사랑한 여인 김영한. 시인 백석을 사랑한 기생 자야. 사랑하는 사람을 이북으로

보내놓고 평생 그를 잊지 못했던 여인 김영한. 그 여인이 삼청동에 있는 요정, 대원각의 주인

이었다는 말을 엇그제 들었습니다. 

그리고 7,000여평, 천 억원에 이르는 그 모든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

다는 것입니다.

 

길상사. 지금은 기생 자야의 그 요정이 길상사로 변해 있었습니다.

길상사. 길상사라…. 

한 여인이 평생에 걸쳐 일군. 서울 한복판의 7,000여평 재산.

그의 육신은 사라지고 없었으나 그의 영혼은 사찰이 되어 그 곳 삼청동에 남아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의 육신은 무엇으로 이 땅에 남을 것인가….

 

 

 

길상사(서울 종로구 삼청동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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