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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단테와 베아트리체

by kimeunjoo 2010. 6. 4.

단테와 베아트리체

 

 

Michael Parkes

"Dante and Beatrice"

  

  그 불후의 명작 '신곡'을 쓰게 만든 시성 단테의 첫사랑..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신에 버금가는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로 격상시켰다.

 단테(Dante Alighieri : 1265~1321)의 연인 베아트리체(Beatrice : 1266~1290)..

그들은 단지 2번을 그것도 우연히 만났을 뿐이지만

 단테의 가슴속에는 일생동안 지울수 없는 문신처럼 가슴에 새겨졌다.  

 

 

BOTTICELLI, Sandro
Portrait of Dante
1495, Tempera on canvas, 54,7 x 47,5 cm
Private collection
 
단테는 르네상스의 요람이며 중세유럽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귀족출신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자라 어린 시절이 그리 행복하진 못했다.
게다가 부친 대에 와서는 가문이 많이 기울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지만
장남인 단테만큼은 열성적으로 교육시켰다. 
하지만 부친의 극진한 사랑도 잠시뿐이었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베아트리체 역시 피렌체의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로, 
시모네 디 발디의 아내가 되었으나 1290년, 24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Dante Gabriel Rossetti

 Beatrice, 1871
  
단테는 9세 때(1274) 그의 생애와 맞바꿀 운명을 만난다.
부친을 따라간 귀족파티에서 당시 한살 어린그녀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되고,
그의 서정 시집 '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 1293)'에서
그녀와의 첫 만남의 순간을 '그때부터 내 사랑이 내영혼을 완전히 압도했네'
라고 표현했을 만큼 큐피트의 황금화살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던 것이다
 

 

Dante Gabriel Rossetti.
Beatrice Meeting Dante at a Marriage Feast, Denies Him Her Salutation.
1855. Watercolour on paper.
 Ashmolean Museum, Oxford
 
그 때부터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흠모했으며,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9년 후.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부터 그후로 죽을 때까지
영원한 여성으로 그의 마음속에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단지 먼발치에서 밖에 바라볼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고야 만다.
당시 피렌체의 명문가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이었던 그녀는
 집안에서 정해준 시모네 디 발디라는 남자와 결혼한다.
 그토록 절절이 갈구했던 단테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1290년 6월 8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Henry Holiday(1839-1904)
Dante and Beatrice, 1883

 
19세기 영국 화가 헨리 홀레데이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운명적인 만남을 그림으로 옮겼다.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베아트리체가 친구와 함께 아르노 강변을 산책한다.
청년 단테는 갈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애타게 바라본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낯선 남자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걷는다.
화면 배경에는 피렌체의 상징이요,
젖줄인 아르노 강이 유유히 흐른다..
 

 

Lord Frederick Leighton,
Dante in Exile, 1864
 
19세기 영국 아카데미 화가 로드 라이튼경의 <단테의 추방>이라는 그림이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 마치 연극의 한 장면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화면 가운데 유령처럼 창백한 표정의 단테가 서 있다.
단테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고 몸 전체에서 깊은 절망감이 풍겨 나온다.
화려하게 치장한 베아트리체가 길을 지나치다 문득 고개를 돌려 단테를 바라본다.
미덕을 지닌 우아한 여신이라는 찬사에 걸맞게 그녀는 눈부신 햇살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단테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눈길조차 줄 수 없다.
연인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고통과 추방형을 선고받은 굴욕감이
바위처럼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화가는 단테의 불행을 강조하고 보다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
 베아트리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테가
생이별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Dante's Dream of the Time of the Death of Beatrice

"by Dante Gabriel Rossetti, 1871,

 Walker Art Gallery

 
 가슴속으로만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에서
 단테는 무엇을 느꼇을까..
그리고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눈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슴떨리도록 사랑했던 그녀앞에
감히 나서지도 못해서 멀리서 바라봐야 했던 그녀.. 
말 한번 붙여보지도 못했어도,
손 한번 잡아보지 않았어도,
  단테에게 있어 그녀의 죽음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통이었고 슬픔이었다.
 
단테는 베이트리체가 죽고나서 이렇게 말한다.
"The love between them was wholly spiritual;
after her death Dante realised she was more alive than ever."
"우리의 숭고한 사랑은.. 그녀가 내 곁을 떠난 후 이전의 어떤 때보다도 내 가슴에 살아있다. "
 
불후의 명작 '신곡'이 탄생하는 시발점이 되는 말이다..
'내 시는 이전에 존재한 적 없고 앞으로도 나오지 못하리.
그것을 쓰기 전까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으리.'
라고 죽은 베아트리체를

두고 했던 단테의 약속처럼

'신곡' 은 연인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

인간의 뛰어난 상상력과 결합해 낳은 최고의 창작물 중의 하나이자,

인류 문학 역사상 불후의 금자탑으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 윤향사랑향기>

 

 

 

 

단테 명언

 

 

가장 지혜로운 자는 허송 세월을 가장 슬퍼한다. -단테

 

그대의 길을 가라. 남들이 무엇이라 하든 내 버려 두어라. -단테

 

남의 빵이 얼마나 쓰고, 남의 사다리 오르내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너 스스로 시험하라. -단테

 

만물은 성스러운 사랑에 의해 움직여진다. -단테

 

양심은 스스로 돌아보아 부끄럽지 않다는 자각을 갑옷 삼아, 아무 것도 두렵게 하지 않는 좋은 친구다. -단테

 

얻어먹는 빵이 얼마나 딱딱하고 남의 집살이가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스스로 경험해 보라. 추위에서 떨어본 사람이 태양의 소중함을 알 듯이, 인생의 힘겨움을 통과한 사람만이 삶의 존귀함을 안다. 인간은 모두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단테

 

역경에 처했을 때 행복한 나날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단테

 

자연은 신의 예술품이다. -단테

 

지식이 깊은 사람은 시간의 손실을 가장 슬퍼한다. -단테

 

하루하루가 현명한 사람에게는 새 삶이다. 오늘은 절대로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라. -단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가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자체에 가치가 있어야 한다. 큰 성과는 가치 있는 일들이 모여 이룩되는 것이다. 실속있는 성과를 얻으려면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차고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테

 

 

 

 

단테의 생가

 

"신곡"의 한 글귀가 최후의 중세인이자
최초의 근세인이라고 하는 단테가 태어난 집임을 말해주고 있다.

단테 600주년을 기해 재건축된 기념관 벽면에

단테의 생가였다는 증거는 벽에 붙어있는 단테의 토르소가 모습이

수백년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영원한 사랑을 전해온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는1265년 이태리의 플로렌스(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0살에 도나티와 결혼한 그는 아레쪼 전쟁에도 참가하면서


흑교황당은 1302년 1월 단테에게 공식적인 추방명령과 함께 화형선고를 내리자,
단테의 망명생활이 공식화되었고, 결국에는 백교황당과도 결연하게 된다.


단테는 1307년에 신곡을 쓰기 시작하여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인
1320 년, 또는 1321년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가'라는 좁은 뒷골목이 있다. 두 세 사람 다닐 정도로 좁은 골목에

 생가와 단테가 결혼식을 올였다는  단테 마카리타 교회가 있다.





 

교회 공지사항



아주 조그마한 교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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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테는 고향 플로렌스(피렌체)에는 돌아가보지 못한채,
1321년에 라베나에서 56세를 일기로 그의 한많은 생을 마친
비운의 정치가이자 대 서사시인 이었다

 

<사진: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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