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에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盧天命
1911년 9월 1일 黃海道 長淵郡 碑石里에서 아버지 盧啓一과 서울출신의 어머니 金鴻基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난다.(4남매중 셋째)
盧天命의 아명은 基善이었으나 6살 때 홍역으로 남다른 사경을 몇 번이나 넘겼으므로 '하늘이 준 명'으로 살게 되었다 하여 '天命'으로 개명하였다.
홍역을 앓은 뒤부터 그는 자주 앓았으나 그에게 있어 碑石里는 유년 시절 아름답고 행복했던 요람으로 '에덴동산'과 '우리 집'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잊을 수 없는 꿈과 추억과 향수가 깃든 곳이다. 비석리가 안겨준 강렬한 인상은 문학정신의 배경으로서 시심의 뿌리가 된 근원지로 볼 수 있다.
天命은 사내동생을 보기 원했던 부친의 명에 의해 하기 싫은 남장을 한 채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겨울,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이듬해 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1920년 進明普通學校에 입학하게 되고 5학년 때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926년 4월(15살)에는 進明女子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게 되었다. 明女高普시절, 학업성적은 물론 우수한 편이었으며, 창의력이 남달리 뛰어나 그때 이미 시를 지어 학우들 앞에서 낭독도 해보였고, 일본에서 나오던 [어린이 소설]誌에 입선되어 일본으로부터 상품이 보내어져 오기도 했다. 1930년(19살)3월30일 제20회로 進明女高普를 졸업했다. 우수한 성적, 교내활동 등으로 학교생활은 자못 행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부터 盧天命의 엘리트 의식은 비롯된다고 본다.
그러나 그 무렵 어머니가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받았던 큰 충격과 슬픔은 그의 제2시집 [窓邊]에 실린 <作別>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그 해 4월 梨花女專 영문과에 입학했고, 盧 天命은 梨專 기숙사로 옮겨 혼자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의 고독한 생활은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으며 본격적인 시 습작기도 고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2년 梨專 3학년 때(21살) 기성잡지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新東亞]6월호에<斷想>,10월호에<浦口의 밤>,1934년[新家庭]2월호에 <除夕>등을 발표했으며 [梨花]3,4,5호에 실린 8편의 작품 등이 그가 梨專 기숙사 시절에 쓴 것으로서, 고독이 그의 시혼에 불을 붙였을 뿐 아니라 대(竹)처럼 곧은 성품의 토양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34년 梨專을 8회로 졸업할 무렵에는 그의 시작수련도 상당한 수준으로 성숙하여 있었다.
天命은 1934년(23살) 梨專 졸업과 동시에 조선 중앙일보 학예부에 입사, 신여성으로 기자생활을 시작하고, 본격적인 詩作에 몰입, 그 이듬해 [詩苑]창간호에(1935.2)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함으로써 주목과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첫 시집 [珊瑚林]을 1938년 1월1일에 自費 出版하여 회현동 경성호텔에서 호화로운 출판 기념회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마리 로랑생"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文士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힌 그에게 이 무렵은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해 그는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여 안톤 체홉의 <앵화원>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때 관객으로 와 있었던 普成專門學校 교수였던 金光鎭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金光鎭과의 사랑은 약혼까지 하였다가 기혼남성이기에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사건이 盧天命에게 어떠한 결심을 하게 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은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더욱 안으로 잦아들게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1943년 매일신보에 입사, 문화부에 근무하였고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5년 2월 15일에는 그가 근무하던 매일신보 출판부 발행으로 제 2시집[窓邊]이 나왔다. [珊瑚林]시대에 보기 드물었던 시적 기교가 적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으며 향수의 세계가 더욱 확충된 [窓邊]은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 속에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향수의 시들이 현재의 고독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대체로 망향의 정과 전통적인 생활풍속을 시화한 회고적 정서가 일관되어 흐르고 있다. 盧天命의 시작생활에 있어 초기라고 할 수 있는 [珊瑚林]과 [窓邊]이 출간된 약 10년간의 시기는 그의 시인생활에서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던 때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명성은 그의 친일행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함정을 파고 있었다. 문화의 내선일체를 모토로 내세우면서 조직된 조선문인협회에 참여했으며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총력을 경주할 목적으로 조선문인 보국 회도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또한 시집[窓邊]의 초판본에 들어있다가 후에 삭제한 <공전의 날>,<출정하는 동생에게>,<진혼곡>,<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의 일제의 침략전쟁을 노래한 친일적 시들을 여러 편 발표하여 어떻게 변호해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어 남는다.
1930년, 여성 작가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시대에 모더니즘적 경향을 띤 시 세계를 이룩했던 노천명은 두 권의 수필집을 들고 50년대 수필 계를 불 밝힌 여성이다.
그는 한일합방 2년 뒤인 1912년, 일제식민지하에서 태어나 8·.15광복의 격동기와 6·25 한국전쟁의 와중을 살았던 불운의 문학인이었다. 이데올로기에 따른 일방적 해석으로 인해 많은 논란 속에서도 그 실상과 문학성이 운무에 가려진 중요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어둠과 회의와 고통으로 가득 찬 실존의 조건들 속에서 시에 쏟아붓지 못한 가슴의 응어리를 알알이 풀어 엮어 짠 명주 같은 노천명의 수필 연구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복권과 조명이 될 것이다. 수필은 그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고백문학이기 때문이다.
여류 시인이라면 여류라는 이유에서 관심을 가지고 작품은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풍조가 있었다.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여성 작가의 자리는 다소 공백으로 처리되어온 것이 사실이고, 수필 분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기존 여성문학에 대한 논의는 남성중심주의 시각을 통한 전통적인 독서 행위에서 이루어져 여성문학에 내재한 본질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노천명의 수필은 시보다 분량이 많고, 본격적인 글쓰기라는 정평을 받고 있었으면서도 그 연구는 시 분야보다 활발치 못하였다.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중심 시각의 독서를 통해서 그의 수필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의미와 특성은 드러나리라고 본다.
노천명은 향수에 대한 집념이 남달리 강했다. 그의 의식 속에는 어머니, 고향, 눈, 바다는 동의어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단어들의 상관관계에서 그의 수필작품의 소재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글감이던 간에 찾아서 펜을 들면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강력한 힘이 노천명의 작품을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내면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모성으로의 회귀인 고향의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뒤는 산이 둘려 있고 앞엔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해변에는 갈밭이 있어 사람의 키보다 큰 갈대들이 우거지고… 산개나리를 한아름 꺾어 안고는 산마루에 올라서서 수평선에서 아물거리는 감빛 돛 폭을 보며 훗날 크면 저 배를 타고 대처(大處)로 공부를 간다고 작은 소녀는 꿈이 많았다. 성장 과정의 환경은 그 사람의 전 생애를 지배한다. 산, 바다, 해변, 갈밭, 수평선, 꿈 등, 이렇듯 잊을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체험 속의 풍물들을 환기시켜 놓은 것이 노천명 문학의 알맹이인 고향의식이다. 이 고향의식 저변에는 늘 어머니가 숨 쉬고 계셨다. 어머니는 엿을 녹이고 광에서 연시를 꺼내다 사랑으로 내보내 주었다. 고향과 함께 그리운 여인이다.
어머니는 내가 홍역을 할 때 밤을 꼬박 샜으며(겨울밤의 이야기), 쉰일곱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흰 머리칼이 없었다(어느 봄날의 기), 바다는 어머니모양 언제나 나를 어루만져 준다(송전초), 갈밭이 그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서해바다의 밤), 별처럼 머언 이야기를 들려준 어머니(여름밤), 가을의 들로 나가는 즐거움은 내 마음의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산책).
이와 같이 어머니를 그리는 고향에 대한 그의 집착력은 플라톤의 말처럼 원류에 대한 동경, 그것은 인간이 갖는 영원한 고향 그곳으로 귀향하려는 인간의 원칙적 노력이다.
인간의 근본을 향해 열려 있는 원천적인 그리움 세계의 형상화. 그의 수필 쓰기는 유년 시절의 나를 현재에 불러들여 자기 자신을 재확인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나의 뿌리인 어머니의 숨결이 있는 고향땅으로 다가감으로써 여성이라는 인간의 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간접적 출산의 경험이며, 여자의 성을 찾아주는 정체성 확인의 작업이다. 항상 그의 의식 속에 살아 있어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잃어버린 여성, 어머니의 목소리는 삶을 위안하고 견디게 한 글쓰기의 밑거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내재한 욕망에 귀 기울이고,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서 여성을 주제로 인식하는 사고를 정립해 나가고 있다.
“그 목소리는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육체다. ‘목소리, 고갈되지 않는 젖, 그 어머니를 다시 찾아야 한다. 잃어버린 어머니, 영원성, 그 목소리는 젖과 함께 섞여 있다.’ …글 쓰는 여성은 따라서 엄청난 힘을 지닌다. 여성의 이 힘은 어머니로부터 직접적으로 이끌어낸 여성적인 힘이다.”
이 같은 식수스의 말처럼 노천명의 여성적 글쓰기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이끌어낸 여성적 힘으로 어머니와의 근본적인 유대를 서정적이고도 행복하게 환기시키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편의 수필 쓰기는 살아 있음의 확인이다. 말이란 막힌 것을 풀어내는 생명의 힘으로, 자신의 내부에 치유될 수 없는 체증으로 쌓인 앙금을 토해내 버리는 진솔한 자기 목소리이다. 그래서 말하기와 글쓰기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확인이며, 자기 찾기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노천명의 여성관을 파악할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 그 안에 섬세하게 담고 있는 여성으로서 자기 찾기의 노력에 주목해 본다.
이 나라의 남성들의 인색함, 완고함, 그 시멘트같이 굳어진 여성 무능력시 및 멸시의 관념은 어느 세월이나 청산이 될 것인지… 남성보다 난 시원스런 여성들, 또 머리가 휙휙 돌아가는 능한 여성을 볼 때마다… 좀 대체를 시켜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 '여성(女聲) 1956. 10. 18'에서
강렬한 여성의식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이기에 대접받지 못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 글 속에서 작가는 또 ‘여자에게는 어떤 권한도 주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상식이요. 통폐인 것이다.’라고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이는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조 시대의 잔재인 가부장적 담론에 눌린 억압의 말인 동시에 그것에 대응하는 은밀한 저항의 말이기도 하다. 남성중심적 삶에서 절규하는 ‘여성(女聲)’을 통해 자신의 존재 확인과 여성의 자아 찾기의 시도가 담긴 작가의 강한 욕구가 확인되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윗글들은 노천명의 생애에 있어 후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그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한껏 수필 속에 태우며 만 여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사실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는가 하면 노천명은 또한 여성은 어디까지나 여성다운 아름다움을 지녀야 한다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값진 아름다움을 강조하고도 있다.
고운 마음씨를 가진 여인은 언제까지나 아름답다. 착한 마음씨를 지닌 여인들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진실한 정을 품은 여인은 항시 아름답다.
─ '아름다운 여인'에서
여기에서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본시 천성이 곱고 여린 노천명은 사랑하는 남성 앞에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가슴은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나의 20대)고 고백하고 있다. 직장에서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늘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 차림이었고, 앞가르마를 탄 머리는 얌전히 양쪽으로 빗어 넘긴 단정한 모습으로 조신하게 처신했다. 그리고 ‘찬바람 불다.’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냉정하게 언행에 조심했다(피해야 했던 남성).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몸가짐, 맑은 말씨, 모든 것에 이르러 여자다움이 필요하다(직업여성과 취미)는 것이 그의 생활신조였다. 이렇게 궁극적이고도 복원적인 여성관을 지닌 노천명을 누가 아름다운 여인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국, 가정, 사회에서 진실로 원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기를 원하고 노력하면서 그는 종국에 따뜻하고 애정이 어린 수필들을 남겼다는 사실이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노천명 수필은 액체 이미지의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 물처럼 녹아서 흐른다. 바로 그래서 평론가 김윤식이 지적한 바 있는 물컹하고 소녀적 감상적인 글이다. 그러나 이 점이 또 그의 독특한 영역이다.
어둠 속에 핀 눈이 피뜩피뜩 유리창에 부딛고는 소리없이 녹아 버린다.
─ 『눈오는 밤』에서
소리없이 세우(細雨)가 땅을 축이는 저녁, 함박눈이 산과 들을 덮을 때
─ 『어떤 친구에게
바닷물은 심청색입니다. 내 흰 치맛자락을 담그기만 하면 곧 물이 나올것만 같습니다.
─『바닷가를 찾아서』에서
나는 어머니에게 왈칵 달려들어 ‘오마니’를 한마디 부르고서는 그만 목을 놓고 울어버렸다. 어머니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나를 달래 주셨다.
─『썰물에 밀려간 해변의 자취』에서
푸른 5월이 밀물처럼 들어온다. 집집의 뜰에 거리의 로터리에 이 신록물이 들게 하라.
─ 『5월의 구상』에서
노천명에 있어 말의 생명은 눈처럼 녹아들고 바닷물처럼 흐르는 것,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사물은 아무리 딱딱하게 굳은 것일지라도 풀어지고 녹아서 액체로 흐르면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풍경을 이룬다. 바다, 눈, 비, 물, 눈물, 밀물, 신록물, 치마를 적신 물 등. 이러한 “액체의 말은 완벽한 액체의 나라와 만나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의 자궁 속이다.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대립과 갈등의 벽을 풀어놓은 곳. 그 액체의 나라에서 생명의 말, 속삭임은 태어나는 것이다.” 이때 그 말들, 노천명의 글들은 경직된 남성언어에 대응, 그것을 흔들어 부수어 놓은 여성언어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물질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다고 보고 물, 불, 공기, 흙으로 기본적인 물질을 4원소로 양식화하여 상상력을 결부시킨 가스똥 바슐라르는 “우리는 소박한 상상력과 시적 상상력에 의해서 물에 예속되는 거의 언제나 여성적인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물의 깊은 모성을 보게 될 것이다.” 12)라 했다. 전항 2에서 거론한 바 있는 엘렌느 식수스 역시 물이 으뜸가는 여성적 요소라고 말하고, 상상계에서 글 쓰는 여성은 어떤 것도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며, 그녀를 무력하게 분리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노천명의 수필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물감으로 촉촉하게 절어있는 그림 같은 글. 눈물을 머금고 있는 듯 슬픔이 감돌고 있는 글. 그러기에 향기도 나고 슬프도록 아름답다. 그 특유의 전통적이고 원형적 정서와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작자의 시선은 자연 속에서 다양하게 이동하면서 그 의식의 밑바닥에는 확고한 나, 즉 여성이 자리하고 있다. 감히 남성이 접근 못 하는 독특한 영역이 아닌가.
이상 살펴본바 노천명이 가장 여성적인 글쓰기로 일관된 그 개인성을 획득하게 된 것은 그의 남다른 체험과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풍부한 체험이 내부에 쌓이고 쌓여서 심리적 복합체를 이루며 그 폭넓은 수필을 쓰게 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는 이루지는 못했지만 가슴이 와들와들 떨리기만 했던 20대에 사랑을 체험했다(나의 20대). 눈 오는 날은 성찬을 받는 날이어서 산책을 하고 돌아와 자리에 누워서, 쥐가 나무를 깎는 천장을 바라보며 가슴을 깎으며 밤새 사랑을 음미하는 여인(설야 산책), 당신이 나 안에 있는 연고로 내게는 언제나 남모를 기쁨이 있고, 세상은 항시 신록의 세계로 보였다(바닷가를 찾아서). 그래서 그의 일상은 그리운 사랑의 반추로 가득했기에 절대 외롭지 않았다.
시인 노천명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의 고독성을 지녔다고 말들 하지만, 그의 수필 속에는 고독을 사랑하고 즐긴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독은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 나는 적적한 것과 잘 사귀고 또 좋아질 수도 있다’이렇게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진실로 잔인하게 고독을 즐긴(겨울밤의 이야기) 여인이었다.
그가 고독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종교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으로 미사를 드리고,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듯 자성의 글쓰기를 하며 거듭나기를 간구 했던 여인. ‘인생은 가면 무도회’라고 하는 그는 마귀할멈 같은 6·25사변을 겪으며, 짓밟히며 밀리며 지그시 참고 괴로울 때면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 남았다(산다는 일). 그는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을 판잣집에서 이겨냈다. 이곳에서 시종일관 삶을 견디게 한 글쓰기로 여자의 삶의 불혹 고개의 위기를 넘겼다. 폐허가 된 서울에 올라온 노천명은 이화 70년사 집필을 마치고 불면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심한 빈혈 증세로 길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투병생활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입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입원실 벽에다 원고지를 대고 억지로 몸을 가누면서 글을 썼다. 이렇게 그는 안간힘으로 절박한 궁핍 앞에서 몸부림쳤지만, 재생 불능 빈혈 증세는 악화일로였다.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을 병마와 생활고와 싸우면서 그는 누하동 집 정갈한 방에 드러누워 죽음 앞에 드러난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잠재우고 기도하듯 시를 썼다.
아무도 나와 같이 / 해주지 않을 때
말없이 곁에서 / 부축해 주는 이
인자하신 어머니 / 성모 마리아여!
그는 그렇게 그리던 어머니, 온 인류의 어머니 품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40분, 여자의 한창나이 46세였다. 이제 좀 더 진한생의 맛과 깊이를 더해 낼 수 있는 근사한 수필을
쓸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생은 그렇게 저물어 버리고 말았다.
각각 등가(等價)인 기자, 작가, 여성의 3박자로 평생 독신으로 오로지 글쓰기에 한몸을 바쳤던 노천명. 아무튼, 그는 문학이 남성위주의 전용물이던 시대에 수필을 통하여 여성의식을 일깨워 주는 데 앞장선 여성이었다. 여성적 삶과 여성적 글쓰기로 일관된 인간의 존재 탐구, 모성의 원초적 뿌리에 대한 향수와 열정, 그리고 사랑과 믿음. 그것들은 병약한 육체 속에 가리어져 있던 참 생명을 찾으려는 반증이며, 여성으로서의 그의 수필 쓰기는 아픔과 고통을 이겨낸 생존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요즘처럼 긴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는 시대에 살면서 그러나 수필의 매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수필을 쓰고 읽곤 한다
노천명을 떠올리면 시를 쓴 여성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의 수필에 대한 열정이 글 곳곳에 배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시대의 수필가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갖는다
내가 써놓은 글이 그 누군가의 마음에 깊이 공감되고, 마음을 정화하며 뜨거운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목련이 피었다. 하얀 속살 뽀얗게 내밀며 피었다.
그리고 나는 노천명을 만났다.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은 다소곳하고 조신한 모습의 시인을 만났다. 그녀는 비록 이 세상에 없지만 피고지고 다시 피고 지는 저 목련처럼, 우리 가슴에 남아서 오늘도 감성을 자극하여 무디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
시인 노 천명을 만난 날, 봄비 가득 내리고 온 천지에 푸르름 가득하였다.
노천명의 약력
1912 9월 2일 황해도 장연 출생
1926 진명보통학교 졸업
1930 진명여고 졸업
1934 이전영문과(梨專英文科) 졸업 재학시 <밤의 찬미>를 <신동아>에 발표
1934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1935 <시원(詩苑)> 동인
1938 조선일보 출판부 <여성>지 편집
1938 극예술연구회 참가
1950 문학가동맹에 드나들었으며 죄로 부역의 혐의를 받고 9·28 수복 후 투옥
1951 출옥
1955 서라벌예대 출강, 이대 출판부 근무
1957 6월 16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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