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여인 황진이 시 모음
잣나무 배
-황진이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을 법한 시이다.
반달을 노래함 -황진이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
슬픔에 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수착곤산옥 재성직녀소 견우이별후 만척벽공허
* 이 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시인데 황진이가 자주 불러 황진이의
시로 오인되고 있다는 학설도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황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청산은 내 뜻이요… 황진이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님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맛깔난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 가 하노라
-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님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의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을 전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전한다.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했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따랐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라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한편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에는 조금 달리 나와 있다.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
어져 내 일이야… -황진이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이별의 회한을 노래한 것으로 황진이가 시조의 형식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시조이다.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황진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別金慶元 (별김경원) 김경원과 헤어지며 -황진이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朴淵瀑布 (박연폭포) -황진이
一派長川噴壑? (일파장천분학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玉碎徹晴空 (주용옥쇄철청공)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한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사랑한 박연폭포. 송도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유려한 표현은 박연의 장관을 짐작케 한다.
박연폭포는 현재 개성시 개풍군(開豊郡) 천마산(天摩山) 기슭에 있다.
滿月臺懷古 (만월대회고) 만월대를 생각하며 -황진이
古寺蕭然傍御溝 (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 (연하냉락잔승몽)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嶸破塔頭 (세월쟁영파탑두)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 (신송억득번화일)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松 都 (송 도) 송도를 노래함 -황진이
中前朝色 (설중전조색)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寒鐘故國聲 (한종고국성)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南樓愁獨立 (남루수독립)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殘廓暮烟香 (잔곽모연향)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 황진이는 옛 고려의 수도인 송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송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남아
있는 몇 편 안 되는 황진이의 시 중에 두 편이 송도를 노래한 것이다.
相思夢 (상사몽) 꿈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訪歡時歡訪? (농방환시환방농)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 이 시는 김안서 작사, 김성태 작곡으로 <꿈길에서> 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서경덕의 시조
*<성옹지소록>에 보면 황진이가 거문고를 즐기는 모습이 나온다.
-황진이는 성품이 소탈하여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평생에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껏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서경덕 또한 거문고를 즐겼으며, 거문고에 대한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성리설은
우주의 근원과 현상세계를 모두 '하나의 기(一氣)'로 파악하였는바, 그는 이 하나의 기를 '
태허(太虛·우주 생성 이전의 상태)' 개념으로 표출하고 '선천(先天)'과 일치시켰다. 모든
현상세계가 생성되어 나오는 동정(動靜) 생극(生克)의 계기는 이 하나의 태허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기'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는 '이(理)'를 '기'의 위에 두기를
거부하고 '기'가 생성 작용하는 '후천(後天)'의 현상세계에서 그 정당성을 잃지 않게 하는
자기통제력으로 파악하였다.
즉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기'의 한 속성으로 한정한 것이다. 그가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과 <줄 있는 거문고에 새긴 글>을 나란히 지었던 것도 바로 소리
없는 가운데 소리를 듣는 음악의 본체와 소리 속에서 음률의 조화를 즐기는 음악의 응용으로,
'태허―선천과 동정―후천'의 구조로 이루어진 그의 기철학적 세계를 생생하게 암시해주는 것이다.
無絃琴銘(무현금명)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琴而無絃, (금이무현) 거문고에 줄이 없는 것은
存體去用. (존체거용) 본체(體)는 놓아두고 작용(用)을 뺀 것이다.
非誠去用, (비성거용) 정말로 작용을 뺀 것이 아니라
靜基含動. (정기함동) 고요함(靜)에 움직임(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聽之聲上, (청지성상)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不若聽之於無聲, (불약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樂之刑上, (악지형상)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不若樂之於無刑. (불약악지어무형)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樂之於無刑, (악지어무형)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
乃得其 , (내득기 )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
聽之於無聲, (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乃得其妙. (내득기묘)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
外得於有, (외득어유) 밖으로는 있음(有)에서 체득하지만,
外得於無. (내득어무) 안으로는 없음(無)에서 깨닫게 된다.
顧得趣平其中, (고득취평기중) 그 가운데에서 흥취를 얻음을 생각할 때
爰有事於絃上工夫 (원유사어형상공부) 어찌 줄(絃)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가?
2.
不用其絃, (불용기현) 그 줄은 쓰지 않고
用其絃絃律外官商. (용기현현율외관상) 그 줄의 줄소리 밖의 가락을 쓴다.
吾得其天, (오득기천)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하고
樂之以音. (락지이음) 소리로써 그것을 즐긴다.
樂其音, (락기음) 그 소리를 즐긴다지만,
音非聽之以耳, (음비청지이이)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요,
聽之以心. (청지이심)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彼哉子期, (피재자기) 그것이 그대의 지표이거늘
曷耳吾琴. (갈이오금) 내 어찌 거문고를 귀로 들으리?
琴銘(금명)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鼓爾律, (고이율) 그대의 가락을 뜯으며
樂吾心兮, (락오심혜)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諧五操, (해오조) 여러 가지 곡조를 고르되
無外淫兮 (무외음혜) 밖으로 지나치진 않는다.
和以節, (화이절) 강단으로써 조화시키어
天其時兮, (천기시혜) 날이 가고 사철이 바뀌듯하며,
和以達, (화이달) 통달함으로써 조화시키어
鳳其儀兮. (봉기의혜) 봉황새도 법도를 따라 춤추게 한다.
2.
鼓之和, (고지화) 그것을 뜯어 조화시킴으로써
回唐虞兮, (회당우혜) 요순시대로 돌아가며,
滌之邪, (척지사)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
天與徒兮. (천여도혜)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
操?洋, (조아양) 높다란 소리?넓은 소리를 타지마는
人孰耳兮. (인숙이혜) 그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繁而簡, (번이간)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有如味兮. (유화미혜) 간략한 데 뒷맛이 있느니.
偶吟(우음) 우연히 짓다 <화담 서경덕>
殘月西沈後(잔월서침후) 잔월도 서쪽으로 진 뒤에
古琴彈歇初(고금탄헐초) 오랜 거문고 타기를 비로소 쉬네
明喧交暗寂(명훤교암적) 밝고 소란함과 어둡고 적막함이 섞이니
這裏妙何如(저리묘하여) 이 속의 오묘함이 어떠하냐
청초 우거진 골에... <백호 임제>
*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 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 황진이, 그녀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
[JES 정수진] 황진이에게는 세 얼굴이 있다. 요부로서의 얼굴. 여류 시인으로서의 얼굴.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얼굴이다. 이 세가지 얼굴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맥락에 따라. 쓰는 이의 주장에 따라 제각기 강조되어 왔다. 과연 세 가지 얼굴을 가진 황진이의 진면목은 어떤 것이었을까? 각각의 얼굴들을 살펴본다.
●천하일색. 요부로서의 황진이
그동안 황진이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시(時)와 음률에 뛰어나지만 문인으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요부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보는 이들을 매혹케 하는 천하절색 미모와 당대 명사들을 희롱한 그 대담함이 ‘요부로서의 황진이’의 명성에 힘을 실어준다. 황진이의 매력에 빠져 망신을 당한 인물로는 벽계수와 지족선사를 꼽을 수 있다.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해 왔던 벽계수는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읊으며 유혹하자 그를 돌아보다 나귀에서 떨어져 망신을 샀다.
지족선사도 비에 젖은 옷차림으로 유혹해 온 황진이에게 10년 면벽수도가 하룻밤에 물거품이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밖에도 ‘황진이와 30일을 보내되 기간이 지나도 잡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장담하던 양곡 소세양이 ‘나는 사람이 아니다’란 말을 하며 굴복한 일화나 황진이의 옆집 살던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어 황진이의 속적삼을 얹고서야 상여가 떠났나는 일화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황진이의 매혹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은 이는 성리학의 대가 화담 서경덕이 유일하다.
●풍류가객. 문장가로서의 황진이
요부로서의 황진이 다음으로 세간에 이름을 날린 것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문장가로서의 면모. 현재 교과서에도 전해지고 있는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는 물론 소세양을 붙잡기 위해 지었던 ‘봉별소양곡세양’. 빼어난 운율과 임에 대한 정을 맛깔난 어휘로 풀어낸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황진이는 시와 음률. 거문고에 능했을 뿐 아니라 어릴 적부터 사서삼경을 읽는 등 학문에도 뛰어났다. 또한 송도삼절(松都三絶) 중 하나로 꼽히는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했으나 실패한 후 그를 사사(師事)하며 높은 학식을 교류하기도 했다.
●선구자. 여성운동가로서의 황진이
최근 들어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여권운동가를 방불케 하는 깨인 여성 황진이의 모습이다. 시대를 앞서나간 여성이라 일컬어지는 황진이의 선구자적 면모로는 명창 이사종과의 계약동거를 들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황진이와 이사종은 각자의 집에서 3년간. 총 6년을 계약동거를 했다.
각자의 집에 상대방이 머물 때 생활비를 집주인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파격적인 조약 역시 오늘날에도 이행하기 힘든 일. 또한 무지렁이부터 임금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대할 수 있는 것이 기생의 특성이라지만 자유의지로 자신의 연애 상대를 골랐던 일에서도 황진이의 앞선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의 운신의 폭이 좁았던 당시 황진이가 재상의 아들 이생과 더불어 금강산을 무전여행했다는 일화 역시 놀랍다. 무엇보다도 유교적 성향으로 여성을 짓누르고. 삼종지도가 여성의 도리라 여기던 조선시대에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행동했다는 것이 오늘날 황진이를 앞다투어 다루는 이유일 것이다.
[[ 황진이 외 빼어난 기생 누가 있었나? ]]
[JES 정수진] 조선시대 명기로는 황진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장과 기예에 뛰어났던 매창과 소백주. 의기(義妓)로 유명한 논개와 계월향. 절개로 유명한 홍랑과 강아 등이 그 주인공. 부안의 명기 매창은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되는 시조로 유명하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매창과 깊은 교우관계를 지녀 매창이 죽은 후 그를 위해 애도시를 짓기도 했다.
평양기생 소백주는 광해군 시절 평양감사로 있던 박엽이 아꼈던 기생이다. 박엽이 손님과 장기를 두며 소백주에게 시를 시키자 장기판의 여러 요소를 적절히 차용해 ‘상공을 뵈온 후에’라는 시를 지어 재치를 드러냈다.
지명도로 치면 논개의 명성은 황진이 못지않다. 진주기생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최경회가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 후 원수를 갚기 위해 촉석루에서 열린 주연에 참석해 왜장을 꾀어 남강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의기로는 계월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평양기생 계월향 역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의 애첩이었는데.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평양에서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했다.
지고지순 일편단심으로 유명한 기생들도 있다. 경성기생 홍랑은 기생 중 유일하게 양반의 문중으로 받아들여진 인물. 고죽 최경창과 만나며 운명적 사랑에 빠진 홍랑은 최경창과의 이별의 슬픔을 읊은 ‘묏버들 가려꺾어’란 시조로도 유명하다.
최경창이 죽은 후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망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임진왜란 중 최경창의 시 원고를 지켜내는 등 굳건한 사랑을 보여줘 해주 최씨 문중에서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일편단심 사랑으로는 SBS TV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전라도 기생 강아를 빼놓을 수 없다. 송강 정철의 정인으로 유명한 강아는 내내 정철의 뒤를 따르다 정철의 사후 그의 묘소를 지키며 여생을 마쳤다. 이외 흉년이 든 제주도민을 구휼한 제주기생 만덕. 정인 이경무를 위해 평생 수절한 강계기생 무운 등이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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