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채란, 영변땅에서 망향가를 부르다.
1924년 민족시인 김소월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연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을 하고 있었다. 오랫만의 귀향이었지만 그동안의 실의와 좌절이 컸던 탓인지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도 하고 영변에 머물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김소월은 설움과 애한(哀恨)의 민요적 정서가 깃든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비롯하여 ‘못잊어 생각나겠지요(제목은 思欲絶)’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 하였고, 김동인(金東仁)·김찬영(金贊永)·임장화(林長和) 등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하여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거리를 보여준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발표하였다.
김소월이 영변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는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열 세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개가할 밑천을 장만하려고 자신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았다.
전라도 행상에게 팔린 신세가 된 기녀는 이리저리 팔도를 떠돌게 된다. 팔도를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따이렌, 텐진에 이르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멀리 외국으로 떠돌다 어떻게 해서 평북 영변땅에 오게 됐고, 민족 시인 김소월을 만났던 것이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당시 진주는 관기 제도의 폐지로 교방도 따라 폐지되었고, 진주기녀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직업형태로 바꾸기 위해 기생 조합을 조직했다. 이 기생조합이 다시 권번(券番)으로 바뀌어 교방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채란은 진주 권번에서 정식 가무를 익힌 기녀는 아닌 듯하다. 손님을 따라 떠도는 들병이(삼패기생)였다고 짐작된다.
13세때 전라도 행상에게 팔려 팔도를 떠돌면서 ‘뿌리없는 몸’으로 이리저리 팔려다니다가 춤과 노래를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홍콩, 중국 등지를 떠돌다 조선에 돌아와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에 도착한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를 부른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붓들면 님이지.
花紋席 돗자리
놋燭臺 그늘엔
七十年 苦樂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얻은 발베개.
朝鮮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三千里 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三千里 西道를
내가 여기 왜 왔나
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山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家門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故鄕
父母없는
故鄕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來日은 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차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 斷髮令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이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 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이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의 시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는 “‘팔베개 노래’가 김소월의 붓에 의해 표현되었다 함은 온당한 말이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김소월은 그의 창작 노트에서 이 팔베개 노래는 채란이가 부르던 노래니 내가 영변을 떠날 때를 빌어 채란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손으로 직접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팔베개 노래’ 역시 김소월의 다른 창작시들과 마찬가지로 발표지면마다 개작과 첨삭을 거듭하여 내용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팔베개 노래’의 원작에 해당하는 노래를 기생 채란이 불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라고 해 팔베개의 노래가 채란이 불렀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다.
채란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겨줄 사람도 없는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다.
“집 뒷山 솔밭에/버섯 따던 동무야/어느 뉘집 家門에/시집가서 사느냐.//嶺南의 晉州는/자라난 내故鄕/父母없는/故鄕이라우.”
평범한 부모를 만나 고향에서 평범한 사내에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채란의 바람이 노래속에 녹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돌아갈 故鄕은/우리 님의 팔베개” 고향이 있지만 돌아갈 수 없고, 오직 자신을 따뜻하게 해 줄수 있는 님의 팔베게만이 채란의 안식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주 기녀 채란은 교방의 기녀도, 권번의 기녀도 아니다. 이리저리 떠도는 들병이 기녀에 불과하다. 하지만 천리땅 영변에서 그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면서 부른 노래 곡조가 민족의 대시인이라고 불리는 김소월의 마음에 메아리 져서 아름다운 민요시로 재탄생이 되었다는 사실은 진주 기녀들의 또다른 멋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1924년 민족시인 김소월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연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을 하고 있었다. 오랫만의 귀향이었지만 그동안의 실의와 좌절이 컸던 탓인지 마음의 안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도 하고 영변에 머물면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김소월은 설움과 애한(哀恨)의 민요적 정서가 깃든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비롯하여 ‘못잊어 생각나겠지요(제목은 思欲絶)’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 하였고, 김동인(金東仁)·김찬영(金贊永)·임장화(林長和) 등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하여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거리를 보여준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발표하였다.
김소월이 영변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는 어릴 때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열 세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개가할 밑천을 장만하려고 자신을 전라도 행상에게 팔았다.
전라도 행상에게 팔린 신세가 된 기녀는 이리저리 팔도를 떠돌게 된다. 팔도를 떠돌다 급기야는 남으로 홍콩, 북으로 따이렌, 텐진에 이르게 되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멀리 외국으로 떠돌다 어떻게 해서 평북 영변땅에 오게 됐고, 민족 시인 김소월을 만났던 것이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당시 진주는 관기 제도의 폐지로 교방도 따라 폐지되었고, 진주기녀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직업형태로 바꾸기 위해 기생 조합을 조직했다. 이 기생조합이 다시 권번(券番)으로 바뀌어 교방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채란은 진주 권번에서 정식 가무를 익힌 기녀는 아닌 듯하다. 손님을 따라 떠도는 들병이(삼패기생)였다고 짐작된다.
13세때 전라도 행상에게 팔려 팔도를 떠돌면서 ‘뿌리없는 몸’으로 이리저리 팔려다니다가 춤과 노래를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홍콩, 중국 등지를 떠돌다 조선에 돌아와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에 도착한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를 부른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붓들면 님이지.
花紋席 돗자리
놋燭臺 그늘엔
七十年 苦樂을
다짐 둔 팔베개.
드나는 곁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얻은 발베개.
朝鮮의 강산아
네가 그리 좁더냐.
三千里 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三千里 西道를
내가 여기 왜 왔나
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山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家門에
시집가서 사느냐.
嶺南의 晉州는
자라난 내故鄕
父母없는
故鄕이라우.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개
來日은 相思의
거문고 베개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차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金剛 斷髮令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
돌아갈 故鄕은
우리 님의 팔베개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이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 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이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의 시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는 “‘팔베개 노래’가 김소월의 붓에 의해 표현되었다 함은 온당한 말이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김소월은 그의 창작 노트에서 이 팔베개 노래는 채란이가 부르던 노래니 내가 영변을 떠날 때를 빌어 채란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손으로 직접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팔베개 노래’ 역시 김소월의 다른 창작시들과 마찬가지로 발표지면마다 개작과 첨삭을 거듭하여 내용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팔베개 노래’의 원작에 해당하는 노래를 기생 채란이 불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라고 해 팔베개의 노래가 채란이 불렀던 노래임을 강조하고 있다.
채란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겨줄 사람도 없는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다.
“집 뒷山 솔밭에/버섯 따던 동무야/어느 뉘집 家門에/시집가서 사느냐.//嶺南의 晉州는/자라난 내故鄕/父母없는/故鄕이라우.”
평범한 부모를 만나 고향에서 평범한 사내에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채란의 바람이 노래속에 녹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嶺南의 晋州는/ 자라난 내 故鄕/돌아갈 故鄕은/우리 님의 팔베개” 고향이 있지만 돌아갈 수 없고, 오직 자신을 따뜻하게 해 줄수 있는 님의 팔베게만이 채란의 안식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주 기녀 채란은 교방의 기녀도, 권번의 기녀도 아니다. 이리저리 떠도는 들병이 기녀에 불과하다. 하지만 천리땅 영변에서 그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면서 부른 노래 곡조가 민족의 대시인이라고 불리는 김소월의 마음에 메아리 져서 아름다운 민요시로 재탄생이 되었다는 사실은 진주 기녀들의 또다른 멋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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