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 1957~ ] 시인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
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꼽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95년 김수영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2004년 이수문학상
<시집>
바늘 구멍 속의 폭풍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08월
태아의 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01월
사무원 / 창작과비평사 / 1999년 05월
< 대표시 >
틈 / 바늘 구멍 속의 폭풍 / 소 2 / 소 3 / 뱀 / 멸치 / 새 / 먹자골목을 지나며 / 병 / 고요하다는 것 / 바람 부는 날의 시 / 나무 / 나뭇잎 떨어지다
"일상의 폭력 깃든 육체 불구·미물통해 극한 몰아 억압 분출하는 나를 즐겨 나약하고 소심하지만 생긴대로 안쓰면 들통 '꼴값'하는건데 어쩌랴"
동대문운동장 앞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시인이 섰다. 식품회사 사무원인 그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일상의 폭력을 고발한다. 그것이 김기택 시의 힘이다.
30대 초반이던 어느날 회사에서 외출했다가 들어오니 책상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메모를 보는 순간, 신춘문예에 응모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전에 한 번도 문예지나 신춘문예 본선에서 거론조차 된 적이 없었고, 신춘문예 사고를 보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투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터라 뜻밖이었다.
어쨌든 별 희망 없이 지루하게 살고 있던 나에게는 큰 용기가 되었고, 한때의 취미로 머물다가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았던 나의 시 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나는 시 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원으로 생활하고 있을 무렵, 안양에서 동인지 활동을 하는 친구, 선후배들과 어울려 습작을 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의 습작이란 직설적으로 과격하게 마음을 토해내는 배설에 가까운 것이었다. 시의 맛은 없었지만 후련하기는 했다. 그 나이 그 환경에서는 매우 유익한 공부였고 약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교내 백일장에서 상을 탄 기억이 있다. 주어진 제목이 ‘토끼’였는데, 토끼에 대해 쓸 만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추운 겨울에 친구들과 하교 길에 얼어 죽은 토끼를 발견하고 배가 고파 주워서 구워 먹었던 이야기를 썼다. 상 탄 것은 좋았는데,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글을 낭독하라는 것이었다.
전교생 중에는 함께 죽은 토끼를 구워 먹은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그 친구들이 들으면 어떡하나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끝까지 낭독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낭독을 거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일로 글 쓰는 일을 꺼리게 된 것 같다.
내 등단작은 ‘꼽추’와 ‘가뭄’이다. 정적이고 어두운 시들이다. 안에서는 무언가 터지려고 하는데 그것을 싸고 있는 육체와 삶은 불구이고 억압적이고 폐쇄적이다. ‘꼽추’ 앞부분에는 불구에다 노인에다 거지인 사람이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한 인간으로서는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 다소 과장되게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폐쇄된 어둠 속에서 노인이 일생을 억눌러온 등뼈를 부수고 보기 흉한 불구의 등을 터뜨리고 나오는 상상을 한다.
이 등단작을 보며 습작기를 돌이켜 보면, 내 시는 자신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습작기의 나는 육체적으로 매우 열등하고, 환경도 보잘 것 없을 뿐만 아니라 앞날은 캄캄했고,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기댈 곳이 없었고, 그것을 헤쳐가기에 너무 무능하였고,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었으며, 몇몇 사소한 약점이나 버릇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치욕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것을 견디기 위해 상상 속에서 나 자신을 더욱 견디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곤 하였다. 내 나약한 성격에게 어떠한 상황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내 몸이 견뎌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견뎌내야 하는, 극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상상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시가 이러한 작업을 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시는 직접적으로 나를 드러내지 않고도 어떤 극한 상황에도 처하게 할 수 있었고, 스스로 부과한 폭력과 수치를 남을 엿보듯 즐기면서 견디게 해 주었을 것이다. 시는 이러한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도구였을 것이다.
등단 초기에는 이상하게 동물시가 많이 씌어졌다. 왜 그 시기에 동물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들 속에 나오는 몇몇 동물들은 환경의 폭력을 견디느라 몸의 특정 기능이 지나치게 발달해 있거나 한때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을 기능이 오늘의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폭력을 견딘 상처가 육체화된 것이며, 그 폭력과 역사는 아직도 육체 속에 살아 남아 그 육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구경거리이거나 음식일 뿐이다.
동물시는 아마도 나 자신에 대한 관찰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내 시를 다시 읽어보면 외부와 환경의 폭력을 견뎌낸 몸들, 거기서 생긴 상처와 두려움이 육체화된 현장을 관찰할 때, 나 자신이 매우 공격적이 되고 집요해진다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구경거리나 음식물이 되는 동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가학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나를 관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시집의 첫 작품은 ‘쥐’다. 쥐만큼이나 어둡고 칙칙한 시다. ‘호랑이’란 시도 있고 ‘거북이’란 시도 있는데, 하필이면 ‘쥐’가 첫 시집 첫 작품이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선택하도록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이 내 시세계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운명적으로 규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쥐는 스스로 제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밝은 곳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고 자꾸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 한다. 나도 지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으려고 한다. 평균적인 삶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가정 속으로, 너무나 흔한 외모여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직장인의 모습 속으로 숨는다.
가능하면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먹고 살아야만 하는 삶의 압력에 눌려 나는 쥐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몽둥이가 있는 대낮의 한가운데를 어쩔 수 없이 통과하고 있다. 나는 자꾸 쪼그라들고 작아진다. 내가 쓴 ‘쥐’ 안으로 점점 갇히고 있다.
내 시에 불구나 미물이나 하찮은 것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이미 내 몸 속에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시는 정확하게 내 몸이 생긴 대로만 나온다. 꼴값하느라 그러는 건데 어찌하겠는가. 내 생긴 것과 다른 것을 쓰면 당장 표시가 난다. 안 들킬래야 안 들킬 재주가 없는 것이다.
등단 15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여전히 한 회사의 건물 속에, 한 가정의 가장 속에, 수많은 평범한 40대 남자들 속에 숨어 있다. 숨어서 안 쓰는 척하며 최소한의 작품만 쓰고 있다. 일정 기간에 쓴 작품들이 모이면 시집을 낸다.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이런 행위는 무엇인가? 이런 시 쓰기를 계속 해야 하는가? 혹시 시인이라는 외부적 프리미엄을 누리기 위한 습관적인 행위는 아닐까?
하기야 내 나약한 성격에 습관은 미덕이다. 고정 관념과 편견과 고집과 항상 다니던 길만 골라 가는 버릇으로 이루어진 이 습관은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내 성격에 확실하게 갈 길을 제시한다. 이 힘으로 나는 세 권의 시집으로 묶은 작품들까지 쓴 것인가?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이것도 이미 내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들과도 싸워야 한다.
어쨌든 이 습관적 행위로 나는 아슬아슬하게 나를 견디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선조와 내 몸 안에 쌓이고 고착되고 끊임없이 강화된, 약하면서도 고집불통인, 이 육체화된 상처, 육체화된 폭력을 가지고 나는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식욕이며, 성욕이며, 결코 멈추는 법이 없는 여러 욕망들의 요구에 끊임없이 응하고 그것들 때문에 한 시도 바람 잘 날 없는 마음에 아부하고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은 일방적으로 그런 요구를 들어줄 만큼 너그럽지 않다. 그러므로 그 욕심 사납고 고약한 일상생활과 부딪치며 수치를 감수하며 내 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왜 시를 쓰는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언제 바뀔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시 쓰는 일은 나를 견디는 일이라고. 한 방이면 박살나는 머리로 꿈꾸고 한 칼이면 순대나 쓰레기가 되는 심장으로 분노하는 나를 견디는 일이라고. 이미 나 자신이 되고 내 인격이 되고, 내 생명이 되어버린 ‘육체화된 상처’와 ‘육체화된 폭력’을 견디는 일이라고. 대대로 물려받은 식욕과 성욕과 불안의 유산으로 매일매일 먹고 사는 일을 견디는 일이라고.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1985년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 '가뭄' 당선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등
김수영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0)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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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대위의 말과 삶 / 김 훈
넓어지기 위하여 얼마나 촘촘해져야 하는지,얼마나 촘촘해져야 넓어질 수 있는지, 밝아지기 위하여 얼마나 깊은 어두움이 익어야 하는지,얼마나 깊게 어두어져야 밝아지는 것인지,얼마나 깊이 잠들어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인지,김기택의 시들은 저러한 내밀한 사정들을 반성하거나 반추하고 있다.
김기택의 시속에서 삶의 질감은 긴장되어 있다.그의 시의 긴장은 팽팽하거나 혼곤하다.삶은 그 반대편에서,아니다,내면에서 돋아나는 죽음.공포.불안,모순된 욕망들속으로 교직된다.그의 시가 불안이나 멸망,쓰러짐과 흩어짐으로부터 삶을 겨눌 때 그의 시의 긴장은 팽팽하고,삶을 이끌고 그 쓰러짐이나 흩어짐 속으로 진압할 때 그의 시의 긴장은 혼곤하다.
김기택의 시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긴장은 그 팽팽함과 혼곤함이 포개지면서 섬세하고도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는 순간들이다.그때,그 균형은 삶과 죽음사이에서,모순된 욕망들 사이에서 또는 소멸과 신생(新生)사이에서 그 양쪽의 무게를 모두 감당하면서 아주 가늘게 떨린다.
진동의 폭이 점점 작아지면서 그 흔들리는 균형은 드디어 멎어버린다.흔들림이 멎을 때 삶과 죽음,소멸과 신생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며 결과이다.그것들은 서로를 받쳐준다.그것들은 적대하는 것들 속에서 씨앗을 티워 자라나고,적대하는 것들과 함께 피어난다.
그것들이 함께 피어날 때,피어나 있을 때,말은 적막하고 평화롭다.적대하는 양극사이에서의 적막과 평정의 질감은 팽팽하고,그리고 혼곤하다.저 시들의 깊은 곳에서 서로 부딪치고 빨아들이고 배척해내는 적대관계들은 시의 거죽으로 떠올라 적막한 균형을 이룬다.위태로운 마지막으로 말들은 작게 흔들리고 있다.그 위태로운 마지막 흔들림 위에 삶은 실린다.
여리고 정밀하게 흔들리는 천평처럼 그 위태로운 마지막 흔들림이 한 쪽으로 기울어버릴 때,말들은 소멸하고 삶은 그 기우는 쪽으로 함몰할것이다.김기택의 시 속에서 삶은 함몰되지 않기 위하여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가늘게 떨리고 말들은 소멸되지 않기 위하여 그 아슬아슬한 균형위에 얹혀있다.김기택의 시 속에서 말들은,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의 삶은 위태로운 마지막이다.
'위태로운 마지막'이라고 쓰고 나니 내 책상 앞에 걸린 작은 대저울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진다.그 대저울은 한약방을 경영하시던 내 할아버지의 물건이었다.극약의 미세한 무게를 측정하는 눈금과 단위 속에서 생애를 마친 할아버지의 삶은 옹색하고도 정확했다.
학문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한 중인(中人)이었던 그는 처자식과 더불어 이 지상에 살아 남기 위하여 끝없이 자신의 테크놀러지를 세련시킬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의 저울대 위에서 미세한 간격으로 벌어지는 눈금들은 촘촘하고도 정밀하게 들어서 있다.
약재를 다른 약장수에게 팔 때 할아버지는 저울의 추를 이동시켜 약재의 무게를 측정했다.그러나 아픈 사람에게 약을 지어줄 때 할아버지는 저울대 위에 추의 위치를 고정시키고 저울 쟁반 위에 담긴 약재의 양을 덜어내거나 더 올려놓았다.
나의 유년과 그의 말년의 며칠들이 겨우겨우 겹쳐져 있던 시절에, 저울대가 수평이 될 때까지 저울의 추를 조심스럽게 이동시키거나 생반 위의 무게를 가감시키는 할아버지의 손은,수평을 향해 떨리면서 이윽고 적막으로 수렴되어가는 저울대의 흔들림럼,정밀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승꽃이 봄날의 도원처럼 피어난 손으로 할아버지는 공깃돌만한 놋쇠의 추를 한칸씩 한칸씩 이동시켰다. 무게의 고통을 절규하며 치솟으려는 저울대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추의 힘과 추에 저항하는 쟁반의 하중이 정밀하게 맞설 때, 저울대는 그 양극의 하중을 모두 끌어안고 적막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그 저울 한 대가 나에게 유증되었다.내가 다시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들에게 저울로 사물의 무게를 측정하는 방법을 가르칠 때 나는 사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추는 추와 겨루는 사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큰 사물과 길항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어째서 추는 자신이 겨루려는 것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 강력해지는가.
그리고 한 줄의 저울대 위에서,어디까지가 추의 힘의 영역이며,어디서부터가 쟁반 위에 실린 사물의 힘의 영역인가.그 구획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한 줄의 저울대 위에서 추의 힘과 사물의 힘은 어떻게 서로 스미면서 적대(敵對)할 수 있으며,어떻게 서로 적대하면서 스밀 수가 있는 것이고,그리고 그 종합으로써 고 요할 수가 있는 것일까.
저 양극의 아우성들은 어떻게 한 줄의 저울대 위에서 적막한 수평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일까.자식들과 함께 대저울을 가지고 놀면서 나는 다만 침묵하였다.저울의 비밀에 관하여, 물리학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저울대의 팽팽한 수평은 사람의 콧김만 닿아도 쉽게 무너졌고,한 번의 수평은 오직 한 건의 길항만을 버팅겼을 뿐,모든 길항은 늘 새로운 수평을 요구하고 있었다.'위태로운 마지막'으로 그 수평은 떨리면서 적막하였고,그리고 무너졌다.
저울의 추가 저울대를 수평으로 내리누른 위치의 눈금이 사물의 무게였다.대저울을 가지고 놀면서 나와 내 자식들은 말 못 하는 오랑우탄의 일가(一家)처럼 그 물건을 신기해했다.언어는 아마도 그렇게 팽팽하고 고요하게 수평을 이룬 저울대의 눈금 속에서 발생하고 있을 것이었다.
수평을 이룬 저울의 눈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오랑우탄의 몽상에 잠겼다.말들은 '위태로운 마지막'위에서 태어나고,그리고 그 위태로운 마지막과 더불어 소멸할 것이었다. 무게를 들어내니 저울은 삽시간에 뒤집혔다.
김기택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저 '위태로운 마지막'의 수평 위에 올라앉은 말의 운명과 삶의 질감,그리고 그 수평의 양극에서 길항하는 무게들,또는 언어의 표면 위에서 이윽고 소멸해버리는 그 무게들의 비밀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과연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일까. '잠'든 김기택의 시들은 죽음과 신생,정지와 동작,또는 비워냄과 채움 사이를 버팅기면서 팽팽한 수평을 이룬다.그 수평은 양극의 무게를 양쪽에 매달고,평정으로 가기 위하여 시달려야 할 흔들림의 대가를 정확히 치르는 것이어서,그 팽팽한 수평은 미세한 흔들림 위에서 부드러운 질감을 이룬다.
그 부드러움이 양 극에 매달린 무게의 안쪽까지 스밀 때,그부드러움은 혼곤함이다.
불꽃이 끓는 고압은 날개와 날개 사이
균형을 이룬 중심에서 고요하고 맑은 잠이 된다
바람이 마음껏 드나드는 잠속에서 내려다보면
어둠과 바람은 울부짖는 한 마리 커다란 짐승일 뿐
그 위에서 하늘은 따뜻하고 환하고 넉넉하다
힘센 바람은 밤새도록 새를 흔들어대지만
푸른 공기는 어둠을 밀며 점점 커가고 있다
-[겨울새]부분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꼽추]부분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 이 모든 소리들이 녹아 코가 되고 얼굴이 되려
면 심장이 되고 가슴이 되려면 잠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 것
일까 잠의 힘찬 부력에 못 이겨 아기는 더 이상 숨지 못하
고 탯줄이 끊어지도록 떠올라 물결따라 마냥 흔들리고 있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
고 있다 ----[태아의 잠 1]
이런 시행들 속에서,언어의 저울대 양쪽에 매달려 있던 무게들은 얼마나 아름답게,그리고 부드럽게 언어의 거죽에서 소멸되어 있는 것인가.
새는 고압선과 푸른 하늘 사이에서 "고요하고 맑게" 잠들어 있다.바람이 잠속을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구절을 보니,새의 잠은 고압선 위에 물리적 구조물을 전혀 세우지 않는 잡이다.잠든 새는 바람에 흔들리지만,잠든 새의 잠은밞에 흔들리지 않는다.바람은 잠속을 드나들 수있지만,잠을 흔들 수는 없다.
잠은 빈 것이고,잠은 물리적인 헛것이지만,새가 흔들리 때 잠은 새가 흔들린 자리에서 아주 재빠르게 새를 흔드는 것들과 균형을 이룬다.잠의 "고요하고 맑은" 중심에서,그 명증하고도 혼곤한 중심부에서 "불꽃이 끓는" 고압선은 소멸한다.'고압'은 '잠'이 된다.이러한 소멸에 대하여 무슨 첨언을 해야 옳은가.아 마도 무게의 저러한 소멸이 무게의 무화(無化)는 아닐 것이다.
저러한 소멸 속에서,어떤 무게도 무화되거나,제거되지 는 않는다.흔들리다가 '위태로운 마지막'에서 멈춘 말 위에 그 무게들은 여전히 실려 있다.팽팽하고도 순한 그 말들은 그 위에 실려있는 무게의 하중을 과시하지 않는다.말들은 무게의 외형을 풀어헤쳐버리고 무게의 무거움만을 정밀하게 챙겨서 거느리고 있는데,그 무거움은 말의 저 깊은 밑바닥에 추처럼 또는 저울 쟁반처럼 늘어져 있다.무거움은 그 깊은 곳으로부터 말에 대하여 길항하는데,말의 표면은 그 길항력을 끌어들이며 고요하다.
'꼽추' 노인이 죽을 때 꼽추의 '알'은 죽은의 진행 과정 속에서 부화한다.꼽추의 '알' 속에는 '잠'과 '신생'이 분리되지 않은채,같은 운명 속에 풀어져 섞여 있다.잠은 죽음의 무게와 신생의 힘을 함께 버팅긴다.거지 노인이 죽을 때,노인의 전존재는 꼽추의 '알' 속으로 들어가 있다.'알' 속에서 죽음과 신생은 교차하는데,그 '알'의 부화는 신생이 죽음을 몰아내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죽음의 진행 속에서 신생이 이루어지고,새로 부 화하는 신생이 밀려나가는 죽음을챙겨서 거느리고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음악의 선율처럼 앞선 순간들과 뒤따르는 순간들이 미분된 한 점 위에서 만나면서 '위태로운 마지막'을 이룬다. 그 '위태로운 마지막들'의 위태로운 지속이 삶이며 언어이다.세계의 소음은 '알'의 잠속에서 잠들고,'알'이 기지개를 켜며 부활할 때,이 세계의 땅바닥에 눌러붙은 견고한 구조물들은 무너질 듯이 위태롭다.
'알'이 위태로울 때 세계도 위태로운 것이다. 노인은 그 위태로움 속에서 고요히 죽는다. [태아의 잠] 속에서 잠은 이목구비나 심장이나 가슴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혼돈 속의 한 개체를 혼돈의 밑바닥으로 한없이 끌어내리는데,그 끌어내리는 힘은 태아에게 생명의 형식과 기능을 부여하는 '부력'으로 작용한다.잠은 빠져 죽을 듯이 혼곤하고, 그 혼곤의 끝에서 형식과 기능은 발생하고 있다.
잠이 혼돈과 형식의 양쪽 무게를 감당하면서 고요할 때,이 지상에서 최초의 생명은 태어나는데,그 생명은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아마도,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생명은,그리고 모든 생명은 이 세계와 더불어 아무런 별 볼 일이 없어야 옳으리라.아무 별 볼일이 없을 때,다만 세상을 눈부셔할 때,생명은 아름답고 고요하고 힘차다.
김기택의 시 속에 나오는 짐승․ 동물 들은 그들의 내면을 흐르는 음험한 힘이 세계와 부딪치는 지점에서 다들 한 탕씩의 운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그것들은 호랑이가 되었건 쥐가 되었건 모두 멸종 위기의 시간들을 디디고 있다.그것들의 멸종 위기는 그것들의 내면에서 온다.그것들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앞에서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에 끄달리고 있거나 죽은 닭의 발처럼,혼신의 힘으로 죽어서 잡히지 않는 허공 속에서 응고된 동작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것들의 운명 속에서는 생명이 음식이고,살이 먹이다.그것들의 운명 속에서는 빈 깡통/소리,쥐약/밥알,주림/비누 조각,평화/정글,빈 위장/눈의 광채, 먹이/살,힘/죽음같은 대립항들이 격렬하고도 고요하게 뒤섞이고 있다.김기택의 시 속에서 그 운명들은 존재의 배후에 깊숙이 파묻혀 있으면서,존재의 표면은 폭발이나 소멸,또는 도괴 직전의 고요한 긴장으로 충전되어 있다.
그 '위태로운 마지막'으로 세상을 받아내고,말과 삶이 그 '마지막'위에 얹혀서 숨쉬고 있는 운명은 아무래도 생(生)의 신비인 것 같다.
-▩ 시집 [태아의 잠]-문학과 지성사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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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김기택 시인 네번째 시집 '소'
버스·빌딩 … 그 속에 꿈틀대는 생명
김기택(48.사진) 시인을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참 시인같지 않다'. 시인에겐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김 시인은 시인하면 으레 떠오르는 인상과 거리가 있다. 시인의 인상이란 걸 꼭 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여하튼 그는 시인처럼 생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오늘 아침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어깨 부대낀 중년의 샐러리맨처럼 생겼다. 무표정한 얼굴이 그렇고,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가르마도 그렇다. 지난해 미당 문학상을 받은,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하나인 김기택은 그렇게 생겼다. 최근 나온 네번째 시집 '소'(문학과지성사)도 꼭 이렇게 생겼다.
경기도 안양 출신인 시인은 지금 서울 미아리에 산다. 그리고 오늘부터 전업 시인이 됐다. 지난달까지 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패스트푸드 회사의 부장이었다. 샐러리맨처럼 생긴 게 아니라 샐러리맨이었다! 그래서인지 시는 회색 콘크리트 도시에 갇혀 하루하루를 치이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팍팍한 일상을 주로 다룬다.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무단 횡단'부문)처럼 운전 중 일어난 일이나,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가듯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여 두 청년의 논쟁을 따라갔다"('수화'부문)처럼 버스 승객의 싸움 구경이 시로 돼 나오고, 전철역에 사는 비둘기는 존재감 상실한 도시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상계동 비둘기'부문)
시인은 갑갑한 도시에 갇혀있다. 그러나 결코 말라죽어가지 않는다. 멀찌감치 떨어진 자연을 동경하거나 찬양하지도 않는다. 외려 도시의 삶 속에서 생명력을 찾으려 애쓴다. 꼼짝않고 콘크리트 바닥을 굳게 딛고 서있다. 그래서 고맙다.
"그녀는 서류 뭉치를 나르고 있었다/…/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던 사과들을/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빌딩이 땅이라는 것을/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미당문학상 수상작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부문)
시인은 농처럼 자신을 "5000부 시인"이라고 부른다. 여태 시집 세 권을 냈는데 하나같이 1만 부를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지금의 출판 상황을 고려할 때, 그는 적지 않은 독자를 거느린 순수시 작가다. 그런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오늘 저녁 퇴근길 지하철에서 반듯한 가르마의 중년 남성이 곁눈질 하나 없이 묵묵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거든, 시인 김기택일 수 있다. 시인은 오늘도 서울 복판 어딘가에 있다.
글=손민호<ploveson@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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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집 <소>
김기택(48)씨가 네 번째 시집 <소>(문학과지성사)를 내놓았다.
김기택 시의 창작 원리가 관찰과 발견에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남들이 범상하게 보아 넘기는 사물과 현상을 놀라운 집중력으로써 들여다보고, 그 결과 얻어진 낯선 풍경과 의미를 즐겨 시로 노래해 왔다. 김기택 시의 특장이라 할 그런 면모는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하다.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실뿌리에서 잔가지까지 네 몸 안에 나 있는 모든 길은/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 구불구불한 길은/뿌리나 가지나 잎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는 너의 길고 고단한 길은”(<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이즈음의 김기택 시가 단순한 관찰과 기록에 머물지 않고 도시와 문명의 불모성을 고발하는 쪽으로 나아왔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이 시집에서도 아파트 10층 창문까지 기어 올라온 송충이(<유리창의 송충이>)라든가 불 밝힌 빌딩 창에 부딪쳐 죽은 나방들(<그들의 춘투>)은 문명의 거짓과 폭력을 생생히 증언하는 존재들이다. 벌레나 동식물들만이 아니다. 벽으로 변한 승객들에 갇혀 만원 전동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할머니(<벽>)나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한가운데를 위태롭게 건너는 할머니(<무단 횡단>)는 인간 역시 문명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문명에 대한 비판은 그 문명이 억누르거나 소멸시킨 자연적 가치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진다. 초기 시에서 주로 동물의 형태와 동작을 꼼꼼히 묘사했던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풍성한 식물적 이미지를 선보이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그녀는 서류 뭉치를 나르고 있었다/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 빌딩 사무실 안에서/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어떻게 기억해냈을까> 1·2연)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라는 시는 좀 더 직접적·적극적이다. 이 시에 따르면, 도시는 표면적으로는 수직과 콘크리트로 뒤발되었지만, 그 안에서 초록은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 같은 초록의 부활을 두고 시인은 “저돌적인 고요”라 표현하고 있는데, 광물성을 이기는 식물성의 힘은 고요하지만 강력하다는 것이 시인의 낙관적인 전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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