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시인 시모음]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틈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큼! 틈, 틈,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고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려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에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유리에게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빗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란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란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우주인
허공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허공에서 허우적 발을 빼며 걷지만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
기댈 무게가 없다는 것은
걸어온 만큼의 거리가 없다는 것은
그동안 나는 여러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引力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자국 발자국이 보고 싶다
뒤꿈치에서 퉁겨오르는
발걸음의 힘찬 울림을 듣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고 삐뚤삐뚤한 길이 보고 싶다
바늘 구멍 속의 폭풍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
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 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
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
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
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
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 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
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나온다. 기
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
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
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
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
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너는 없다
너의 흔적은 머리카락이나 지문이 아니다
손때 묻은 책이나 냄새나는 옷가지도 아니다
기억 속에 사는 목소리나 표정도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면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너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다만 온기가 없을 뿐이다
날아와 여기 쌓이기 전에 너는
끈적끈적하거나 꺼칠꺼칠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뜨거운 바람을 불어내며
단내와 시큼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단내, 아, 그 숨막히는 열기여!)
사람과 사람 사이
베면 피가 나올 것 같은 살가죽 같은 공기를
걸치고 다녔을 것이다
식어버리자 쉽게 흩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온기가 있다면
울거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너는 지금 차갑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어도 풀썩거린다
그렇다 너는 없다
없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너의 흔적은 없다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지듯 그렁그
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
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
에서 꺼내어
다시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
어 짓이긴다.
소 2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갈증 속으로 물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음매에 슬픈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
깊고 가는 빈틈으로 물이 채워진다
이윽고 울음에서 떨림이 없어지고
헉헉거리며 울음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완강한 힘이 울음을 채운다
울음은 이제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부룩 부루룩 물 사이로 빠져나온 공기로 숨을 쉬며
뱃가죽에서 규칙적으로 불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다
크고 단단한 무거움 속에 조용히 정지하여 있으니
보인다 가죽 속에
우연히 들어와 무게가 된 한 줄기 바람
이제 고기가 되어 버린 한 방울 물 한 모금 공기
무거움의 밖에서는 또 다른 한 떼의 공기들이
파리들처럼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혀를 간지르고 있다
마시려 하면 앵앵거리며 순식간에 흩어지고
힘들여 마신 한 호흡의 공기마저
목구멍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기어코 밀어낸다
눈알 가득 앉은 간지러운 파리 떼를
이젠 눈을 끔벅거려 날려보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눈물로 씻어내도 날려보낼 수 없다
소 3
저 쇠가죽 부대 속에 한때는
풍선 같은 바람이 들어 있었다네
가죽 구석구석 팽팽하게 부풀어
뛰어다니기도 하고 쟁기를 끌기도 하고
목구멍으로 음매에 떨며 나오기도 하였다네
가죽 부대를 빠져나오려고
길길이 뛰고 발길질도 하였지만
결국 바람은 잔잔해지고 풀을 뜯으며 커갔다네
그러나 이제 바람이 빠져나갔다네
백정이 칼을 들어 한가운데를 가르자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네
바람 빠진 가죽부대 털레털레 실려가고
떠돌던 바람들이 모이고 자라서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는 저녁
우연히 천막 안으로 들어간 바람 하나
천막을 들고 일어나려 하네
밤새도록 천막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들먹이며 그르렁거리네
마치 내장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내장의 어두운 통로마다
냄새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그 비린 냄새를 진동시켜
울을 소리를 내고 있다는 듯이
그 떨리는 목울대 끝에
펄쩍펄쩍 뛰는 심장이 달려 있다는 듯이
뱀
팔과 다리란 무엇인가
왜 살가죽을 뚫고 몸에서 돋아나는가
나는 안다 팔다리 달린 몸들을
그 몸들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그 끓어오르는 몸 속에
얼마나 많은 울음이 들어 있는가를
갓난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몸에서 울음부터 꺼내야만 하고
평생 동안 부지런히 지껄여
말들을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쉬지 않고 난폭한 힘을 배설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자신의 열기에 못 견뎌 뇌는 녹고
심장은 타고야 말 것이다
몸 속의 열기가 살가죽을 밀고 터져나오지 않도록
살가죽 터진 자리마다 거추장스런 팔다리가 돋아나지 않도록
그리하여 온몸에 차가운 피가 흐르도록
모든 힘을 독으로 만들어야 한다
얼음처럼 차고 빛나야만 맑아지는 독
그 푸른 힘으로 끓어오르는 열기를 잠재워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가늘고 긴 선 하나만 몸에 남게 될 것이다
가벼워라 아아 편안하여라
팔과 다리 털과 꼬리 모든 것이 생략되고
한 줄의 긴 몸으로 단순화되니
머리와 심장으로 언제나 땅을 만질 수 있고
마음껏 땅의 차가운 힘을 마실 수 있고
그 즐거움으로 독은 더욱 올라 꼿꼿하게 날이 서는구나
나무처럼 땅의 고요한 기운을 받아 숨쉬니
굶을수록 눈은 광채를 더하고
빠를수록 몸은 바람보다 소리가 작구나
번잡스럽게 바둥거리던 팔과 다리
그 몸에서 줄창 쏟아내는 비명과 아우성도
독으로 소화시키면 이내 형체를 버리고 열기와 소음도 버리고
기꺼이 화사한 꽃비늘이 되는구나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나마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새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히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배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자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중년의 얼굴에서 뛰어나왔다
작고 어린 네가
다리 사이에 털고 나고 브레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들이 나왔구나
오랜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30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들어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먹자골목을 지나며
먹자골목을 지나는 퇴근길
돼지갈비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다
냄새를 맡자마자 어서 핥으려고
입과 배에서 침과 위산이 부리나케 나온다
죽은 살이 타는 냄새임이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달콤할까
이것은 죽음의 냄새가 아니고 삶의 냄새란 말인가
필시 그 죽음에는 오랫동안 떨던 불안과
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냄새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오로지 감칠맛나기만 해서 천연덕스럽고 뻔뻔스럽다
정말 이것이 죽음의 맛일까
비리고 고약한 냄새인데
혀와 위장이 잠시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죽음을 품어 아름다워지고 풍요해진 산처럼
한몸 속에 삶과 죽음을 섞어놓으려고
서로 한 곳에서 살며 화해하게 하려고
혀와 위장을 맛의 환각에 홀리게 한 건 아닐까
지근지글 타고 있는 것이 고기이건 시체이건
돼지갈비, 그 환각의 맛과 냄새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먹자골목
병
병이 들어오면 몸은 뜨거워집니다
한 그릇 고요한 물처럼
마음은 찬 데 있어야 투명하고 맑아지는데
뜨거운 그릇 속에 앉아 있자니
울렁울렁 속이 일어나 뒤집히고
한 방울 두 방울 기포도 생겨 떠오릅니다
그릇 오목한 바닥에 착실하게 엉덩이 붙이고 싶어도
자꾸 들썩거리게 되고
끝내 마음은 소리지르며 끓기 시작합니다
끓어오르느라 온몸 가득 닭살이 돋습니다
그래도 병을 이기려고 부글부글 끓습니다
마음도 한몸 속에 너무 오래 담겨지면
먼지도 앉고 잡균도 꼬여 흐려지겠지요
비우지도 않고 마냥 채우기만 하면 더 흐려지겠지요
사는 곳이 맑고 고요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니
마음은 가끔 이렇게 푹푹 끓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고요하다는 것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몸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의 시
바람이 분다
바람에 감전된 나뭇잎들이 온몸을 떨자
나무 가득 쏴아 쏴아아
파도 흐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보자고
바람의 무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보자고
작고 여린 이파리들이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실처럼 가는 나뭇잎 줄기에 끌려
아름드리 나무 거대한 기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나무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리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나뭇잎 떨어지다
나뭇잎에도 무게도 있네. 그 무게에 나뭇잎이 떨어지네. 나뭇잎 무게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
네. 바람과 공기가 떨어지는 무게를 건드려보네. 바람이 자신을 붙들고 마음껏 흔들도록 나뭇잎
은 그냥 내버려두네. 후려치고 할퀴는 것을 다만 쳐다보기만 하네. 바람의 힘이 세면 셀수록 그
힘을 타고 나풀거리는 무게의 곡선은 더욱 신이 나네. 그 곡선은 바람의 힘을 넉넉한 부력으로
삼아 바람에 등을 대고 눕네.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는 힘도 나뭇잎을 쫓기만 할 뿐 어찌하지는
못하네. 바람이 힘 빠지면 나뭇잎은 땅으로 살짝 내려오네. 풀잎 위에 누워 쉬면 바람은 다시 잎
을 나꿔채서 쥐고 흔들어보네. 나뭇잎은 바람의 성깔이 엽맥 속으로 숨구멍 속으로 깊이 스며들
도록 놓아두네. 오히려 그 흥분으로 온몸을 파르르 떠네. 나무 밑에는 나뭇잎들이 가득하네. 겨
울 나무 밑에는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들이 가득하네.
얼음 속의 밀림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 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놓은 힘은
절망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法과 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들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생각해본다
청정한 法과 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생각해 본다
먼지에 대하여
走光性 하루살이 떼처럼
한 줄기 빛 속으로 먼지들이 모여든다
어지럽게 빛을 뒤틀고 돌리며 날아다닌다
손짓 발짓 같은 움직임들이 끈질기게
내 주위에서 기웃거린다 미안하지만
그대들의 몸짓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누구의 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누구의 슬픈 편견들이 삭아 부서진 것인지
난 알지 못한다 눈물에서도 잉크에서도
묻어 나오고 있지만, 말할 때마다 떨며
목소리에 섞여 나오고 있지만
다리를 떠는 남자
컴퓨터 자판을 두리리면서
그는 명렬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자기 꼬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에 흠뻑 취한 사이
마음은 저 혼자 몰래 춤을 춘다
그와는 무관한 또 다른 그가
엉덩이 밑에서 열심히 놀고 있다
밥 생각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 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리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 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시인 김기택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
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꼽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95년 김수영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2004년 이수문학상
<시집>
바늘 구멍 속의 폭풍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08월
태아의 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01월
사무원 / 창작과비평사 / 1999년 05월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틈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큼! 틈, 틈,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고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려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에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유리에게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빗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란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란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우주인
허공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허공에서 허우적 발을 빼며 걷지만
얼마나 힘드는 일인가
기댈 무게가 없다는 것은
걸어온 만큼의 거리가 없다는 것은
그동안 나는 여러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引力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자국 발자국이 보고 싶다
뒤꿈치에서 퉁겨오르는
발걸음의 힘찬 울림을 듣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고 삐뚤삐뚤한 길이 보고 싶다
바늘 구멍 속의 폭풍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
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 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
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
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
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
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 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
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나온다. 기
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
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
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
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
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너는 없다
너의 흔적은 머리카락이나 지문이 아니다
손때 묻은 책이나 냄새나는 옷가지도 아니다
기억 속에 사는 목소리나 표정도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면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너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다만 온기가 없을 뿐이다
날아와 여기 쌓이기 전에 너는
끈적끈적하거나 꺼칠꺼칠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뜨거운 바람을 불어내며
단내와 시큼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단내, 아, 그 숨막히는 열기여!)
사람과 사람 사이
베면 피가 나올 것 같은 살가죽 같은 공기를
걸치고 다녔을 것이다
식어버리자 쉽게 흩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온기가 있다면
울거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너는 지금 차갑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어도 풀썩거린다
그렇다 너는 없다
없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너의 흔적은 없다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지듯 그렁그
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
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
에서 꺼내어
다시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
어 짓이긴다.
소 2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갈증 속으로 물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음매에 슬픈 울음 속 떨림의 사이사이
깊고 가는 빈틈으로 물이 채워진다
이윽고 울음에서 떨림이 없어지고
헉헉거리며 울음에서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완강한 힘이 울음을 채운다
울음은 이제 형식적으로 입만 크게 벌리고 있다
부룩 부루룩 물 사이로 빠져나온 공기로 숨을 쉬며
뱃가죽에서 규칙적으로 불어났다 꺼졌다 하고 있다
크고 단단한 무거움 속에 조용히 정지하여 있으니
보인다 가죽 속에
우연히 들어와 무게가 된 한 줄기 바람
이제 고기가 되어 버린 한 방울 물 한 모금 공기
무거움의 밖에서는 또 다른 한 떼의 공기들이
파리들처럼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혀를 간지르고 있다
마시려 하면 앵앵거리며 순식간에 흩어지고
힘들여 마신 한 호흡의 공기마저
목구멍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기어코 밀어낸다
눈알 가득 앉은 간지러운 파리 떼를
이젠 눈을 끔벅거려 날려보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눈물로 씻어내도 날려보낼 수 없다
소 3
저 쇠가죽 부대 속에 한때는
풍선 같은 바람이 들어 있었다네
가죽 구석구석 팽팽하게 부풀어
뛰어다니기도 하고 쟁기를 끌기도 하고
목구멍으로 음매에 떨며 나오기도 하였다네
가죽 부대를 빠져나오려고
길길이 뛰고 발길질도 하였지만
결국 바람은 잔잔해지고 풀을 뜯으며 커갔다네
그러나 이제 바람이 빠져나갔다네
백정이 칼을 들어 한가운데를 가르자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네
바람 빠진 가죽부대 털레털레 실려가고
떠돌던 바람들이 모이고 자라서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는 저녁
우연히 천막 안으로 들어간 바람 하나
천막을 들고 일어나려 하네
밤새도록 천막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리저리 들먹이며 그르렁거리네
마치 내장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내장의 어두운 통로마다
냄새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그 비린 냄새를 진동시켜
울을 소리를 내고 있다는 듯이
그 떨리는 목울대 끝에
펄쩍펄쩍 뛰는 심장이 달려 있다는 듯이
뱀
팔과 다리란 무엇인가
왜 살가죽을 뚫고 몸에서 돋아나는가
나는 안다 팔다리 달린 몸들을
그 몸들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그 끓어오르는 몸 속에
얼마나 많은 울음이 들어 있는가를
갓난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몸에서 울음부터 꺼내야만 하고
평생 동안 부지런히 지껄여
말들을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쉬지 않고 난폭한 힘을 배설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자신의 열기에 못 견뎌 뇌는 녹고
심장은 타고야 말 것이다
몸 속의 열기가 살가죽을 밀고 터져나오지 않도록
살가죽 터진 자리마다 거추장스런 팔다리가 돋아나지 않도록
그리하여 온몸에 차가운 피가 흐르도록
모든 힘을 독으로 만들어야 한다
얼음처럼 차고 빛나야만 맑아지는 독
그 푸른 힘으로 끓어오르는 열기를 잠재워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가늘고 긴 선 하나만 몸에 남게 될 것이다
가벼워라 아아 편안하여라
팔과 다리 털과 꼬리 모든 것이 생략되고
한 줄의 긴 몸으로 단순화되니
머리와 심장으로 언제나 땅을 만질 수 있고
마음껏 땅의 차가운 힘을 마실 수 있고
그 즐거움으로 독은 더욱 올라 꼿꼿하게 날이 서는구나
나무처럼 땅의 고요한 기운을 받아 숨쉬니
굶을수록 눈은 광채를 더하고
빠를수록 몸은 바람보다 소리가 작구나
번잡스럽게 바둥거리던 팔과 다리
그 몸에서 줄창 쏟아내는 비명과 아우성도
독으로 소화시키면 이내 형체를 버리고 열기와 소음도 버리고
기꺼이 화사한 꽃비늘이 되는구나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나마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새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히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배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자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중년의 얼굴에서 뛰어나왔다
작고 어린 네가
다리 사이에 털고 나고 브레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들이 나왔구나
오랜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30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들어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먹자골목을 지나며
먹자골목을 지나는 퇴근길
돼지갈비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다
냄새를 맡자마자 어서 핥으려고
입과 배에서 침과 위산이 부리나케 나온다
죽은 살이 타는 냄새임이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달콤할까
이것은 죽음의 냄새가 아니고 삶의 냄새란 말인가
필시 그 죽음에는 오랫동안 떨던 불안과
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냄새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오로지 감칠맛나기만 해서 천연덕스럽고 뻔뻔스럽다
정말 이것이 죽음의 맛일까
비리고 고약한 냄새인데
혀와 위장이 잠시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죽음을 품어 아름다워지고 풍요해진 산처럼
한몸 속에 삶과 죽음을 섞어놓으려고
서로 한 곳에서 살며 화해하게 하려고
혀와 위장을 맛의 환각에 홀리게 한 건 아닐까
지근지글 타고 있는 것이 고기이건 시체이건
돼지갈비, 그 환각의 맛과 냄새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먹자골목
병
병이 들어오면 몸은 뜨거워집니다
한 그릇 고요한 물처럼
마음은 찬 데 있어야 투명하고 맑아지는데
뜨거운 그릇 속에 앉아 있자니
울렁울렁 속이 일어나 뒤집히고
한 방울 두 방울 기포도 생겨 떠오릅니다
그릇 오목한 바닥에 착실하게 엉덩이 붙이고 싶어도
자꾸 들썩거리게 되고
끝내 마음은 소리지르며 끓기 시작합니다
끓어오르느라 온몸 가득 닭살이 돋습니다
그래도 병을 이기려고 부글부글 끓습니다
마음도 한몸 속에 너무 오래 담겨지면
먼지도 앉고 잡균도 꼬여 흐려지겠지요
비우지도 않고 마냥 채우기만 하면 더 흐려지겠지요
사는 곳이 맑고 고요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니
마음은 가끔 이렇게 푹푹 끓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고요하다는 것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몸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바람 부는 날의 시
바람이 분다
바람에 감전된 나뭇잎들이 온몸을 떨자
나무 가득 쏴아 쏴아아
파도 흐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보자고
바람의 무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보자고
작고 여린 이파리들이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실처럼 가는 나뭇잎 줄기에 끌려
아름드리 나무 거대한 기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나무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리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나뭇잎 떨어지다
나뭇잎에도 무게도 있네. 그 무게에 나뭇잎이 떨어지네. 나뭇잎 무게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
네. 바람과 공기가 떨어지는 무게를 건드려보네. 바람이 자신을 붙들고 마음껏 흔들도록 나뭇잎
은 그냥 내버려두네. 후려치고 할퀴는 것을 다만 쳐다보기만 하네. 바람의 힘이 세면 셀수록 그
힘을 타고 나풀거리는 무게의 곡선은 더욱 신이 나네. 그 곡선은 바람의 힘을 넉넉한 부력으로
삼아 바람에 등을 대고 눕네.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는 힘도 나뭇잎을 쫓기만 할 뿐 어찌하지는
못하네. 바람이 힘 빠지면 나뭇잎은 땅으로 살짝 내려오네. 풀잎 위에 누워 쉬면 바람은 다시 잎
을 나꿔채서 쥐고 흔들어보네. 나뭇잎은 바람의 성깔이 엽맥 속으로 숨구멍 속으로 깊이 스며들
도록 놓아두네. 오히려 그 흥분으로 온몸을 파르르 떠네. 나무 밑에는 나뭇잎들이 가득하네. 겨
울 나무 밑에는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들이 가득하네.
얼음 속의 밀림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 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놓은 힘은
절망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法과 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들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생각해본다
청정한 法과 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생각해 본다
먼지에 대하여
走光性 하루살이 떼처럼
한 줄기 빛 속으로 먼지들이 모여든다
어지럽게 빛을 뒤틀고 돌리며 날아다닌다
손짓 발짓 같은 움직임들이 끈질기게
내 주위에서 기웃거린다 미안하지만
그대들의 몸짓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누구의 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누구의 슬픈 편견들이 삭아 부서진 것인지
난 알지 못한다 눈물에서도 잉크에서도
묻어 나오고 있지만, 말할 때마다 떨며
목소리에 섞여 나오고 있지만
다리를 떠는 남자
컴퓨터 자판을 두리리면서
그는 명렬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자기 꼬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에 흠뻑 취한 사이
마음은 저 혼자 몰래 춤을 춘다
그와는 무관한 또 다른 그가
엉덩이 밑에서 열심히 놀고 있다
밥 생각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 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리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 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시인 김기택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
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꼽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95년 김수영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2004년 이수문학상
<시집>
바늘 구멍 속의 폭풍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08월
태아의 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01월
사무원 / 창작과비평사 / 1999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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