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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시인 이진명

by kimeunjoo 2009.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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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명 시인

 

1955년 서울 출생
1990년 계간 ≪작가세계≫에 '저녁을 위하여'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1992년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1994년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2004년 <단 한 사람> 열림원

 

~~~~~~~~~~~~~~~~~~~~~~~~~~~~~~~~~~~~~~~~~~게시된 시~~~~~~~~~~~~~~~~~~~~~~~~~~~~~~~~~~~~~~~

 

1.단 한 사람

2.들어간 사람

3.노예

4.비

5.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6.세워진 사람

7.거인이 왔으면

8.무늬들은 빈집에서

9.거기에 가면 들을 수 있을까

10.우물쭈물 우물쭈물

11.'앉아서마늘까'면 눈물이 나요

12.고아

13.고행자의 악기 
14.넓은 나뭇잎

15.바보, 흰 가제 손수건 

16.배추 파는 여자

17.다리를 건넌다는 것

18.두 사직(社稷)에 대한 비탄

19.배꽃 시절

20.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21.조금 웃다

22.정돈된 집에서는

23.복자수도원

24.9월,

25.슬픔

26.백양사역

27.저 구름

28.풀은 별이에요

29.너무 수북한

30.여행

31.그렇게 사탕을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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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 이진명

 

가스레인지 위에 두툼하게 넘친

찌개국물이 일주일째 마르고 있다
내 눈은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내 입도, 내 손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별일이 아니기에,

별일이 아니기도 해야 하기에
코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그동안 할 만큼 하더니 남처럼 스치고 있다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국물을

자기 일처럼 깨끗이 닦아줄 사람은
언제나처럼 단 한 사람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 한 사람
우리 지구에는 수십 억 인구가 산다는데
단 한 사람인 그는
그 나는
별일까
진흙일까

 

 

들어간 사람들

-이진명


외할머니 일흔일곱에 들어갔다
한해 뒤 어머니 마흔일곱에 들어갔다
두 사람 다 깊은 밤을 타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1년 반씩
병고에 시달렸지만 들어갈 때는
병고도 씻은 듯이 놓았다
두 사람 들어간 문은 좁은문은 아닌 것 같다
일흔일곱도 받고 마흔일곱도 받은 걸 보면
좁은 문은 아니나
옷보따리 하나 끼지 못하게 한 걸 보면
엄격한 문인 것 같다
두 사람 거기로 들어간 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거기 법이 그런가 보았다
하긴 외할머니 어머니
여기서도 법도 잘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들어왔으면
문 꼬옥 닫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노예 / 이진명

 

 

 


처박힌다
사랑은
노예처럼


코로 쉬는 숨을 잊어버리고
손가락 발가락으로 숨쉰다
손바닥으로 발뒤꿈치로 숨쉰다


뒤통수로 보고
등으로 만진다
머리카락으로 듣고
발바닥으로 말한다


입이 걷고 눈이 뛴다
귀는 달린다
그럴 때 정강이가 숨을 들이쉬고
팔뚝이 숨을 내뱉는다


처박힌 사랑은
노예처럼
불타는 심장을 이고 지고 메고
부둥켜안고


온 동네방네를 태우는 말도 안 되는
검둥이 검둥이 살껍질에는
검은 기름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사랑은
검둥이 노예
모욕처럼 짚풀더미에 처박힌다

 

 

 

/ 이진명 

비가 걸어온다

몇십 시간이고 걸어온다

걸음 크지 않고 빠르지 않다

그렇게 오래 걸으니

걸음 클 수도 빠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끌리고 쳐지는 커텐의

무거운 냄새를 피우는 건 아니다

눅눅한 냄새도 이미 없다

걸어, 걸어,

멍텅하게 그냥

끊어지지 않는 걸음을 걸어, 걸어서

입이 바싹 말라서

그토록 걸어와서

쓰러지자 쓰러지자는 것일까

피곤, 피곤한 온몸을 텅,

무한진공 속에 떨어뜨리고 말자는 것일까

피가 아래로 다 쏟아져내려

새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이 괴기스러운

비, 비가 걸어온다

비틀거리는 것도 잊어먹은

멍텅한 시간이 끊이지 않고 걸어온다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이진명




김노인은 64세, 중풍으로 누워 수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한다
아내 박씨는 62세, 방 하나 얻어 수년째 남편 병수발한다
문밖에 배달 우유가 쌓인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방문을 열어본다
아내 박씨는 밥숟가락을 입에 문 채 죽어 있고,
김노인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구급차가 와서 두 노인을 실어간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거동 못해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김노인은 병원으로 실려가는 도중 숨을 거둔다

아침 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
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
씹다가 군소리도 싫어
썩어문드러질 숟가락 던지고 대단스러울 내일의
천국 내일의 어느 날인가로 알아서 끌려갔다
알아서 끌려가
병자의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들어 추슬러놓고
늦은 밥술을 떴다 밥술을 뜨다 기도가 막히고
밥숟가락이 입에 물린 채 죽어가는데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
거동 못하는 그 누가

아, 눈물 머금은 신(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




세워진 사람

이진명



그는 2분 전에 세워진 사람
지하철 출입구가 있는 가로
어느 방향으로도 향하지 않고
그는 2분 전에 속이 빠져나간 사람
11월 물든 잎 떨어져 쌓인 갓길 하수구
먼저 떨어진 잎 말라 구르고
구르는 잎에 오후 남은 햇빛은 비추고
리어카와 자전거와
허름한 식당들의 골목이 있고
서성거리는 짐꾼들이
리어카와 자전거에 기대 팔짱을 끼고
남은 햇빛을 쬐고 담배를 물기도 하고
가게 앞 플라스틱 쓰레기통에선 흘러내린
빈 캔과 우유팩 구겨진 빠닥종이
리어카가 움직이고 자전거가 돌고
자동차 밀고 들어와 좌우 회전을 하고
지하에서는 수개의 환승노선이 혼교하고
혼교하느라 뱉어진 검은 숨이
입구 근처에서 자옥이 남은 햇빛에 드러나고
그는 2분 전에 뚝 끊겨 세워진 사람
끝내 이별한 사람
발이 없어진 사람
이다지도 조용한 여기
후세상의 지푸라기가 떠가고 있는 여기 




거인이 왔으면

이진명



희귀 병마와 싸우다 일찍 죽은
한 여자 시인의 시집을 다 읽은 밤

이 밤을 뚫고 거인이 왔으면 좋겠다
거인은 아주 크고 검은 그림자
안개와 구름이 솜이불처럼 두껍게 깔린 높은 산 봉우리
광휘를 터트리며 아침해 떠오를 때
반대편 구름장 위에서 보란 듯
빛바퀴 오색 커다란 원광을 두르고 온다네
원광 밝디밝고 신비로워 아름답지만
그 중심 놀랍도록 크고 검은 몸체 무시무시해
이빨을 딱딱 부딪치게 된다네

마흔세 살 고요한 여자여
지붕 밑 다섯 살 딸아이 머리 빗겨 두 갈래
방울고무줄로 묶어 달랑달랑 흔들리게 하지 않고
어디로 혼자 가는 노랑나비처럼 혼자 날아갔는가
감감한 들 오백리

내가 떨구고 간 너무나 선명하고 쓸쓸한 두 낱 빛가루

바구니 속의 계란 삼십 개
고이 들고 온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였나*

이 밤을 뚫고 거인이 왔으면 좋겠다 무시무시한
검은 그림자로 붉게 터지는 아침 태양을 맞받는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신비로이 오색 광륜을 두른 거인이

그 여자 슬프고 무섭고 아름다웠으니
나도 이 밤 그와 같으니
밤을 깨 우리 슬픈 운명을 들어 올려 줄 거인이 왔으면




*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중 「바구니 속의 계란」에서 인용.

 

 

 

 

무늬들은 빈집에서

이진명


언덕에서 한 빈집을 내려다보았다
빈집에는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했다
무늬들이다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
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때로 서로 부딪치며
빈집을 이겨낸다
언덕 아래 빈집
늦은 햇살이 단정히 모여든 그 집에는
무늬들이 매만지는 세상 이미 오랬다


 

 

 

거기에 가면 들을 수 있을까

이진명


거기에 가면 들을 수 있을까
밤이 와서 밤이 된 나무와
또 하나 밤이 와서 밤이 된 나무가
조그맣게 밤의 흰빛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걸
밤의 흰빛이 실처럼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는 걸

거기에 가면 볼 수 있을까
밤이 와서 밤이 된 나무와
또 하나 밤이 와서 밤이 된 나무가
가만히 밤의 흰빛을 손에 걸기 시작하는 걸
밤의 흰빛이 발을 벗으며 저를 구부리기 시작하는 걸

 

 

 

우물쭈물 우물쭈물

이진명


벌써 오래 됐다 예전엔 내가
그렇게 우물쭈물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언젠가부터 완전 우물쭈물이 된 게

우물쭈물, 말도 생각도 몸도 우물쭈물
밤에 꾸는 꿈마저도 우물쭈물이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라고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 난다고 하는
어린애들 노래가 있는데

정말 큰일 나겠다
어린애들 노래 속에서라면야
세발자전거에 콩 부닥치는 정도겠지만
정말 큰일 나겠다

달아나긴 달아나야 하는가본데
막 달아나야 하는가본데

 

 

 

‘앉아서마늘까’면 눈물이 나요

이진명


처음 왔는데 이 모임에서는 인디언식 이름을 갖는대요
돌아가며 자기를 인디언식 이름으로 소개해야 했어요
나는 인디언이다! 새 이름 짓기! 재미있고 진진했어요

황금노을 초록별하늘 새벽미소 한빛누리 하늘호수
어째 이름들이 한쪽으로 쏠렸지요?
하늘을 되게도 끌어들인 게 뭔지 신비한 냄새를 피우고 싶어하지요?

순서가 돌아오자 할 수 없다 처음에 떠오른 그 이름으로 그냥
앉아서마늘까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완전 부엌냄새 집구석냄새에 김빠지지 않을까 미안스러웠어요
하긴 속계산이 없었던 건 아니죠
암만 하늘할애비라도
마늘 짓쪄넣은 밥반찬에 밥 뜨는 일 그쳤다면
이 세상 사람 아니지 뭐 이 지구별에 권리 없지 뭐

근데 그들이 엄지를 세우고 와 박수를 치는 거예요
완전 한국식이 세계적인 건 아니고 인디언적인 건 되나봐요
이즈음의 나는 부엌을 맴돌며 몹시 슬프게 지내는 참이었지요
뭐 이즈음뿐이던가요 오래된 일이죠

새 여자 인디언 앉아서마늘까였을까요
마룻바닥에 무거운 엉덩이 눌러붙인 어떤 실루엣이 허공에 둥 떠오릅니다
실루엣의 꼬부린 두 손쯤에서 배어나오는 마늘냄새가 허공을 채웁니다
냄새 매워오니 눈물이 돌고 죽 흐르고

인디언의 멸망사를 기록한 책에 보면
예절 바르고 훌륭했다는 전사들
검은고라니 칼까마귀 붉은늑대 선곰 차는곰 앉은소 짤막소...
그리고 그들 중 누구의 아내였더라
그 아내의 이름 까치...
하늘을 뛰어다니다 숲속을 날아다니다
대지의 슬픈 운명 속으로 사라진 불타던 별들

총알이 날아오고 대포가 터져도
앉아서마늘까는 바구니 옆에 끼고
불타는 대지에 앉아 고요히 마늘 깝니다
눈을 맑히는 물 눈물이 두 줄
신성한 머리 조상의 먼 검은산으로부터 흘러옵니다



 이진명, 「고아」

두려워하지 마라
새가슴처럼 뛰는구나
팔딱임을 멈추지 못하는구나
여기는 자리가 아니다 일어나라
날지 못해도
너는 날았다
아비를 날았고 어미를 날았고
형제자매를 날았다
일가친척을 날았다
집도 절도 일찍이 무너뜨려 날았다
너는 처음부터 날았던 사람
떨어지지 않았던 사람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시방대천이 다 터졌다
만 개의 발우가 만발한다
문고리를 잡고 토하지 마라
심장을 다치지 마라
돌아보라
어머니가 서 있다
보관(寶冠)을 쓴 어머니가
약함(藥函)을 들고 서 있다

고행자의 악기

                          이진명  


쥐들이 들끓는 밤입니다
고행자의 악기를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한 나무 아래 당도하였고
행려의 옷자락 젖어 무겁습니다
저 별똥별 마저 지기 전
마지막 곡조를 퉁겨보렵니다

투 타 투 타 투 타 타

문이 열립니다
하나 건너 둘 건너 셋
안개 자욱한 저쪽에서 홀연 문이 열립니다
붉은 꽃 솟아납니다 움직입니다 다가옵니다
커다랗습니다 붉은 빛 퍼집니다 타오릅니다
환합니다 속 맑고 깊습니다 연꽃불입니다
아, 꽃등불 앞세우고 샘가에 다다른 행렬은

여승들입니다 여승들의 밤목욕입니다
샘물보다 먼저 달빛이 출렁댑니다
꽃등불은 마지막 물방울 튀어가 닿는 쯤에 띄우듯 놓고
한 장의 엷은 승의를 풀어냅니다
온 밤숲이 초조로 파랗게 숨이 멎습니다
찰나 일제히 샘물 속으로 손을 뻗치는 알몸들

샘물의 살결이 고요히 터집니다
안개 밤의 맥박이 휘돌아 뜁니다
바가지가 떠올리는 바가지만한 달
어깨에 걸쳐지다 미끈하게 흘러내립니다
모여 선 채 돌아가며 엉덩이를 솟구쳐 퍼올리는 물소리
맨발바닥이 밟는 부서지는 물이파리
그녀들의 맨손이 그림같이 운행하며
밤우주를 쓰다듬습니다
우주의 속이 태양 아래이듯 만발합니다
물소리 끝나고 빛이 시작됩니다
황금 별똥별 검은 능선을 밝히며 내려꽂힙니다
그녀들의 손가락 발가락이 털어내는 물방울에
백화 빛이 터집니다
밤숲이 질린 제 색깔을 서서히 풀어놓습니다
이름할 수 없는 휴지(休止)가 둘레를 흐릅니다

밤목욕이 끝났습니다
한바퀴 밤우주의 운행이 끝났습니다
붉은 꽃등불 사뿐히 들어올려
알몸의 여승들 새로 부푼 알집을 숨기며
다시 행렬을 이룹니다 돌아갑니다
하얀 작아지는 뒤통수 새알 같습니다
하나 건너 둘 건너 셋

안개 가득한 저쪽에서 처음처럼
홀연 문이 닫힙니다

투 타 투 타 투 타 타

닫히기 위해 열린 문 밤하늘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라집니다
샘물가 떠나간 음계들 맴돌다
밤별빛에 섞입니다
쥐들이 천정을 건너가듯
젖은 나무 아래 이 시간을 건너가야 합니다
행려의 잔을 자옥이 채워야 합니다
나뭇가지에 누더기 벗어 걸었고
고행자의 외줄 악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넓은 나뭇잎 / 이진명

 

 

넓은 것이 내 앞에 떨어지네
넓은 것이 걷는 내 두발을 덮네
넓은 것은 하늘 바다 들판
또 강변 모래밭 무령왕릉 금잔디
연못 속 잊혀진 내전(內殿)의 그림자
그 흔들리는 침묵 그리고
홀로 서쪽으로 가는 마음, 빈터
넓은 것이 내 앞을 쓸고 있네
넓은 것이 슬픔도 없이 자꾸 퍼지네
넓은 것이 내려앉는 내 마음
나뭇잎 발자국 반나마 찼네
넓은 나뭇잎 위에 넓은 나뭇잎으로
천 수백년 전부터 넓은 것이
발자국 그런 것이

 


시집 -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니 (문학과지성사)]

 

 

 바보, 흰 가제 손수건
이진명


전자우편으로 도착한 편지 속에
흰 가제 손수건
그때 이미지가 흰 가제 손수건 같았노라는
결혼해서 애 낳기 십여 년 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놀란 가슴, 달아오르는 부끄러움
흰 가제 손수건, 확대되는 화면의, 그 여섯 자를
화이트 아닌 화이트로 겨를 없이 지우며
흰 공백을 쳤습니다
흰 공백을 쳐 건너뛰지 않고는 도저히

오늘 같은 넷세상에서도
흰 가제 손수건이 다 튀어나오고, 그래서 놀랐고
예전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흰 가제 손수건 같다고
십여 년이 지나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욱 흰 가제 손수건만 같아. 그래서 부끄러웠고

딴은 깜깜 잊어버린
흰 가제 손수건에 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여고 졸업하고 바로 회사 다니던 사회초년병 무렵
핸드백 메는 일 어렵고 부끄러워
흰 가제 손수건에 차비를 싸서 손에 꼭 쥐고 다녔지요
촌 할마시들처럼

열아홉 서울내기 바보, 순진도 순수도 아니야, 바보
디지털 편지 세상에 이물처럼
흰 가제 손수건 어쩌구 문구 넣는 사람도 바보

(2003, 문학과사회 여름호)

 

배추 파는여자 / 이진명

 

 

시장통 입구에서 배추 파는 여자
이미 늙고 더없이 뚱뚱하다네
양은자배기에 얼마의 배추 담아올리고
나무토막 받침에 종일 엉덩이 눌러붙이고 있다네
앞자락에 찬 때 절은 전대 반들거리고
전대 깊숙이 검붉은 두 손 찔러넣고 있을 때 많다네
쉴새없이 오가는 다리들 그 허한 치맛바람 속에서
이따금 졸기도 한다네
오랜 나날 바람과 햇빛이 그냥 가지 않고
한 켜씩 앉어준 두꺼운 살갗
얼굴은 반나마 굵은 주름 안은 돌의 모습이라네
이미 늙고 더없이 뚱뚱해진 여자
졸다가 한낮의 햇살이 못내 모여와 깨우면
뻐끔히 눈을 연다네
바짓가랑이가 지나간다 치맛단이 지나간다
통통한 핸드백이 지나간다 그러나
그 여자가 연 뻐끔한 눈 속엔
어떤 세계도 담겨 있지 않다네
어쩜 양은자배기에 올린 배추 한 통 담겨 있지 않다네
일생 수많은 배추를 통으로 팔고 접으로 팔고
푸르고 싱싱하게 살진 배추들 날랐지만
시들어가는 배추잎 끄트머리 이젠 뜯어내지 않는다네
(죄 있다면, 시들어가는 배추잎 끄트머리 뜯어내면서
 판 죄 있을까)
열린 눈 느릿 닫히기 전
어느 어여쁘고 미끄러운 손이 들어와
배추 한 통 괜히 들었다 놓는 시늉한다네
시장통에서 햇살이 제일 늦도록 머무는 자리
이미 늙고 더없이 뚱뚱해진 여자
한없는 먼지내와 묵은내를 풍기면서
눈감고 눈뜨고 그냥 있다네
광에서 내다가 바깥에 꿍쳐논 오랜 부대자루처럼

 

시집 -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문학과지성사)

 

 

다리를 건넌다는 것 / 이진명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예를 들면
얼마 전 새로 생긴
비산인도교를 건너갔다 온다는 것은
햇살만을 데리고
빈손으로 건너갔다가
봄이라네 호로루루루
시장통으로 몰려나온
여인네들과 아이들에 섞여 돌다가
치자꽃 모종을 사들고 온다는 것은
커피잔만한 화분이 그 안에
모래알 흙덩이 연탄재 나뭇잎거름을 들여
그것들을 똘똘하게 잘 뭉쳐
치자꽃 봉오리를 밀어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 그렇게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너를 닦다가
봄햇살로 닦다가 봄치마로 닦다가
너를 낳는 것
웃는 너를

 

 

두 사직(社稷)에 대한 비탄 / 이진명


 

결혼 10년 내 왕조의 社稷之臣에는 이런 重臣들이 있습니다
쌀바가지 국자 걸레 행주 고무장갑 빗자루 음식가위...
 

出世 8년 딸아이 왕조의 社稷之臣에는 이런 重臣들이 있습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엄지공주 헬로키티 뮤츠...
 

면면을 보니 내 중신들이 사정이 좀 딱해 보입니다
도리없지요. 저들 인연이 그러하니 인연따라 든 것일 밖에요
 

딸아이 중신들은 공주과답게
 

시도때도 없이 내 왕조에 들이닥쳐 시비가 많습니다
일 많은 조정을 막무가내로 어지럽힙니다
 

일 잘 하는 굽은 내 중신들을 유리구두로 막 칩니다


건국이념이 요행이 理想的이거나 異常的이었대도
왕조의 운명이 천년만년 가는 거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습니다
星辰이 다른 두 사직이 서로 뒤바뀌었다는 얘기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모릅니,
우왓, 얏호! 딸아이가 엄마가 될 땐 완전히 뒤바뀐다! 뒤집어진다!
 

두 사직의 화해를 권유하는 찬송이 다 들려옵니다그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천년만년 누리과저
 

좋아요 좋고말고요 허나 社稷爲墟
생이란 왕조에 불이 꺼질 때면 社稷爲墟
 

빈 들판에 흥망성쇠의 바람이 휘돕니다
 

토지와 곡물이 말라가는
내 왕조의 사직단 앞을 대면한 어느 날은
딸아이의 남은 사직이 많음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만
일어났던 사직이란 모두 슬픈 인어공주
제 사직의 비밀을 홀로 품고 벙어리, 벙어리로
깜깜한 바닷속 물거품되어 꺼지는 것을
 

깜깜한 하늘에는 또
슬픈 국자 북두칠성이 박히겠습니다  


시집 『단 한 사람』(2004년 열림원 )

 

 

 

배꽃 시절 /  이진명

 

 

열일곱일라나, 저 배꽃, 배꽃들
하얗게 미쳐 피었다
 

나, 열 하고 일곱일 때
엄마가 상심한 듯 말했다
 

옛말에, 미쳐도, 이쁘게 미친다는 말, 있는데
네가, 그짝인 게, 아니냐
 

조그만 아니 커단 향낭이 순간 터진 듯
쓰거운 향내가 확 끼쳤다, 심장까지


이상도 하지
나, 그때, 전혀
탈 없는, 하얀 여학생이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너무 탈 없는, 그것이 바로 탈이 되어
하얗게, 죽음을 뒤집어쓴, 그림자 같은 거였을라나
배꽃시절이다
절정이다


미쳐도 이쁘게 미친다는 옛말 같은
자기 엄마가 어둠에 잠겨 떠듬거리는
그런 말의 매 맞지 않고서는
저 비탈에 뒤집어진 열 일곱은 없다
 

시집 『단 한 사람』 (열림원 , 2004) 중에서

 

//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이진명 

 

 

나를 낳아준 집
그 죽음을 떠나 벌써 학교생활 서른 아홉 해
해도해도 공부는 끝없고
새 과목 늘어가기만 한다.
점수 나아지는 기색도 없어
흥미 잃을 때 많다.
집에 대한 그리움 남아 있을 때
집에 대한 기다림 남아 있을 때
이젠 됐으니 그만 돌아와도 좋다
연락 왔음 좋겠다.
모두 동댕이치고 보내온 사람 따라 가겠다.
집에서는 언제나 연락이 오려나
사실 집은 학교에 들여보낸 후 냉담하기만 했다.
공부 힘들고 병나 몸 아프면 언제라도 돌아오거라
다정한 목소리 보내준 일 없다
환상과 환청이 와서 집 쪽을 보여주곤 했다.
집이 어떤 기슭 아래서 너울거렸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창의 커튼이 밖으로 흘렀다.
어머닐까. 어머니 깥은 여자 웃는 듯 손짓이
아버질까. 아바지 같은 남자 어스름히 이쪽을
그 먼 거리를 순식간에 달려온 어떤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정녕 그냥 돌아오겠느냐
데려올 사람에게 채비를 시키겠다.
그렇게 환상과 환청이 깊게 오고 나면
돌아갈 날짜를 꼽다가 꼽은 숫자를 자꾸 놓친다.
지친다. 집에 대한 그리움도 기다림도 흐려진다.
아주 가끔 지루한 학교 생활 속에 비상이 울린다.
지난 봄 소풍 땐 어지럼증이 있었던 소년 하나가
뱅뱅 나비를 잡다가 쓰러졌다.
집이 가만히 다가와
늘어뜨린 팔소매로 소년을 안고 사라졌다.
반란과 거역의 아름다움을 이루려는 젊은이 하나는
주머니칼로 제 성기를 잘라 집을 향해 먹였다.
그럴 때면 그들의 친한 이웃 몇몇은
아련해하고 안타까와하다가 말수가 줄었다.
이웃들의 마음 속엔 어쩜
십 년짜리 공부 마치고
또 이십칠 년짜리 공부 마치고
일찍 어쨌든 당당히 돌아가는 이들도 있는데 하는
부러움이 섞여 있지 싶기도 했다.
이 삶이라는 거대한 학교에 모여
얼마만큼 당당해져야 할까
밤늦도록 눈을 비비며 생활을 계산하는
동문수학하는 거대한 수의 학생들의 얼굴 경이롭고 두려웠다.
자퇴와 무단 결석을 맘먹기도 했다.
오직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만 공부하는 거라면
아닐 것이다. 어떻게
집으로 잘 돌아갈 것인가를 위해 그것을 위해
쉰두 해 예순여덟 해 넘기도록 기다리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나는 잘 돌아갈 가망이 있는 것일까
처음엔 쉰두 해 예순 여덟 해 넘기도록 학교에 끌려나와
그래 끌려나와 공부건 청소건 심부름이건 해야 하는 이들
나보다 더 지지부진한 이들이 없진 않구나 위안삼았지만
학교의 뿌연 유리창을 잘 닦자고 닦다가 깨트린 날부터
훌륭해 보이기 시작하는 그들
그들도 모두 떠나온 집을 사랑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집에서는 언제나 만족하려나
언제나 우리의 공부를 멈추게 하고 따뜻이 불러들이려나
그 집, 죽음 말고 어디를 더 갈 데가 있겠는가
그 집, 죽음 말고 어디가 우리를 품어주겠는가
집이 사랑으로써 우리를 학교에 보내 가르쳤으니
공부 다 마친 날
학교 입학하기 전의 일곱 살짜리 어린 아이의 명랑한 말씨로
집 앞에 당도해 대문을 열며 크게 인사할 것이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얼마든지 쉬고 잘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안고서 다시 한번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 올올한 공부를 위해 오늘도 학교에 출석하였으니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본다는 일은 부질없다.
집이 나를 꼭 부를 것이고
집으로 내가 태어난 죽음으로
왜 내가 가지 않겠는가 왜 우리가

 

 

 

 

조금 웃다 /이진명

 



다 싫고 싫고 잠도 싫다는 한 시인의 노트를 보며 조금 웃


끝없이 끝없이,다리가 썩어 잘라내게 되더라도 끝없이 끝
없이, 걸어만 갔으면 한다는 그 시인의 연이은 노트를 보며
또 조금 웃다

고개를 드니 밖은 비구름 내렸다 걷혔다 하는데,장마철
비구름에 덮인 햇빛의 간신히 비어져 나오는 살만으로도 밭
의 채소들은 눈부시게 초록을 發光한다. 이 집 앞에 딸린 작
은 밭에서 밭일하는 걸 좋아하는데,뭐,그런 따위는 밭일이
아니라 흙장난이라나. 그런 낱말풀이를 한 외국어 사전에서
찾아보고 되게 웃었던 기억이 새삼 나 다시 또, 조금 웃다 


시집<제1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동학사.2002

 

 

 

정돈된 집에서는

이진명

 

 

 

저 책장만 안 쓰러지면

집 안의 사람들도 쓰러지지 않는가

가지런히 꽂힌 책들만 쏟아져내리지 않으면

집 안의 사람들 어지러울 일 없는가

저 벽시계만

교자상만하게 걸린 액자만 떨어져내리지 않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가 무사한가

식탁 유리만, 거울만 깨져나가지 않으면

파편, 파경 맞을 일 없는가

소리가 없는 정돈된 집에서는

바보 텔레비전만 혼자 다쳐 피 흘린다

피 흘리는 입 벌려

아, 하고 오, 하며 기화요초 피운다

가화(假花)가 피고 피어 물 먹는다

떨리는 붉은 물 먹는다

 

-시집 <세워진 사람>(창비)에서

 

 

 

 복자수도원

내 산책의 끝에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복자수도원은 길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붉은 벽돌집이다
그 벽돌빛은 바랬고
창문들의 창살에 칠한 흰빛도 여위었다
한낮에도 그 창문 열리지 않고
그이들 중 한 사람도 마당에 나와 서성인 것 본 적 없다
둥그스름하게 올린 지붕 위에는 드문드문 잡풀이 자라 흔들렸고
지붕 밑으로 비둘기집이 기울었다
잠깐이라도 열린 것 본 적 없는 높다란 대문 돌기둥에는
순교복자수도회수도원(殉敎福者修道會修道院)이라 새겨진 글씨 흐릿했다
그이들은 그이들끼리 모여 산다 한다
저녁 어스름 때면 모두
성의(聖衣)자락을 끌며 긴 복도를 나란히 지나간다고 한다
비스듬히 올라간 담 끄트머리에는 녹슨 외짝문이 있는데
삐긋이 열려 있기도 했다
숨죽여 들여다보면
크낙한 목련나무가 복자수도원, 그 온몸을 다 가렸다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9월 , 이진명

 

 


깃대들은 리듬을 찍는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
머리칼이 긴 여자
가지런한 두 다리 깃대 같다
혼자 길을 가는 여자 정답다고 노래한
죽은 시인의 시구 생각난다
여자는 머리칼을 흔든다 거리로 흔들어 보낸다
거리에 날려 날려가는 것은
은행잎, 강물
강물, 은행잎
여자의 머리칼은 銀紙처럼
대지 속을 폈다 접혔다

깃대들은 더 파랗게 리듬을 찍는다

 

 

 

 슬픔
- 이진명

슬픔 때문에, 허리띠가 남아돈다는
젊은 시인의 신작시구에 가슴이 쿵! 한다
나도 슬프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데
나는 왜 자꾸 허리띠가 모자라는 것이냐
물론 금방 대거리를 했지만
쿵! 소리를 들이켠 뒷맛이 계속 가라앉지를 않는다

천고마비의 계절호 신간 詩誌를 덮으니
표지가 번덕번덕 有光紙네
웬, 삧이, 뻔덕뻔덕, 어울리지 않게시리
마침 깨끗지 못했던 손가락 끝으로
표지의 有光을 뿌옇게 문질러 줬다

(<단 한 사람>, 열림원, 2004, p.68)

 

 

 

백양사역

이진명 

 

 

백양사역은 새마을호는 안 간다
백양사역은 새마을호는 안 온다
빠르고 비싼 것은 백양사역 못 선다 못 밟는다

백양사역은 내리는 사람 나를 포함해 두셋 또는 셋넷
백양사역은 타는 사람 나를 포함해 둘 또는 셋

그런 몇 번째 날
잔광도 구름에 다 가린 늦은 오후
상행길 홈
백양사역은 휘, 휘
허, 허롭게 허, 허하게
오직 나 혼자를 세웠다
오직 나 혼자를 손님으로 받았다
여행가방을 늘여들고
아직 길다란 옷을 벗지 못한 나를

그때 나는
열차가 들어오려는 2, 3분의 짧은 사이를 기다린 것이겠지만
더욱 기다리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귀기울이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마음 깊이 보고 싶었던 것은
넓디넓고 조용한 백양사역의 모든 것
특히 사람의 그림자를 지운 백양사역의 본래 얼굴
낮고 흐린 채색으로 무한히 정지한 듯 열린

건너 커단 산봉우리 멀고
서울도 멀고
장성호 지나지나 다녀온 古佛(고불)의 백양사도 이젠 멀고

간섭은 없다
백양사역은 그처럼 조용하고 넓은 채, 무슨 놀라는 일도 다 그친 채
강산의 무량한 적막이 되어

나는 서서 밟는다 짧은 2, 3분 사이
느리고 헐한 이 모든 노래를
길에서 벗어난 길의 사이 백양사역을 벽이 넘어온다

 

 

 

 

저 구름

 

 이진명

 

 

 

-저 구름이 바위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친구여

나보다 열 살도 더 아래인 젊은 시인이여

그대가 엽서 끝줄에 박아 보낸 이 문장은

노래입니까 울음입니까

망치입니까 신발입니까

 

길은 신발을 신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길은 가슴에 망치를 맞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쿵, 쿵, 쿵 소리를 들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저 하늘에 바위가 떠가는 것은

끝끝내 필생의 쿵, 소리 들이켰기 때문입니다

 

 

 

 

풀은 별이에요 / 이진명

 

하늘에만 별이 있을까요

새파랗게 풀 돋아오릅니다

처음에 어린 풀

총총 검은 땅에 박힙니다

마른 땅에 쏟아집니다

떨립니다 열립니다 일어섭니다

하늘에만 별이 흔들릴까요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파랗게 풀 흔들립니다

큰 별 작은 별 물결칩니다

빛 부서집니다 흘러갑니다

하늘에만 별이 영원할까요

풀은 발 아래 영원한 별

죽어도 다시 사는 초록의 별입니다

초록의 반지, 약속의 노래입니다

풀 하나 나 하나

풀 둘 나 둘

 

 

 너무 수북한

 

 

 

                                           이진명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잎 너무 수북한 떨어진 산새들

  바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골짜기

  너무 수북한 손뼉들 키스들

  밟으면 푹푹 쏟아지는 수북한 무덤들 젖은 나팔들

  나팔들 울음에 묻혀 돌아가는 산허리 빈 손뼉소리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입 너무 수북한 떨어진 구름

  바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또 골짜기

  너무 수북한 빨간 물 물들었던 가을 가을 일기장들

 

 

 

 

여행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여자도 첫키스도 첫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밤,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것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은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 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자꾸 틀린 말을 하더라도

 

 

 

 

그렇게 사탕을 먹으며

-이진명

더 이상 삶의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

단순화 시키고 시켜서

거의 백지화 다름없다 생각했을 때

오 아주 백지구나 하는 찰나에

온몸을 궁글리며 나는 탄식했다

사탕이 먹고 싶다

귀, 향, 하, 고, 싶, 다


참말 거짓말같이

몇 알의 사탕 살 돈도 없는 지 오래고

안에서는 시간만이 진행하는 때

밖의 넘쳐 흐르는 햇살 한 자락 끌어

주머니 적시고 싶지도

얻어 바르고 싶지도 않고

드디어 투명하게 비춰 보이기 시작한

열 손가락의 뼈들

미친다 열 개의 집게이듯

쇠갈고리이듯

......

집게가 쇠갈고리가 덩그라니 떨어지고

창문 너머 지는 햇살이 아양떨듯

슬그머니 무릎에 와 앉는다

무릎 위에 와 앉은 햇살이 가냘피 가리키는 곳

연필꽃이통

그 속에는 동전 몇 닢이 먼지에 말려


......

사탕에는 색깔이 많다

단물도 단물이지만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파랑


너 삶이라는 것

너 백지의 큰 입에

빨간색 사탕을 넣어 주련

초록색 사탕을 넣어 주련


귀향의 짧은 부딪는 소리 동그란

더 없는 단순함이여

동전 소리를 흘리는 세 살 적의 일요일이여

부스러지는 백지의 딱딱한 부스러지는

빨간

거짓말이여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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