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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김기택 시인 시모음

by kimeunjoo 2009. 12. 25.

김기택 시인 시모음
 

꼽추                                                     

-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슴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가죽                                                     

살이란 본래 먹이가 아니던가
두려움이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나는 한 덩어리의 작은 살을 알고 있지
그 살을 덮고 있던 두껍고 튼튼한 껍질은
처음엔 연한 살에 돋은 두려움이었다네
차가운 이빨이 닿기도 전에 부풀어오른
붉고 말랑말랑한 종기였다네 우둘투둘 퍼져
땅바닥 비비도록 가려움을 만들고
그 격렬한 마찰 속에서 뜨거운 숨 뿜어내며
종기들은 더욱 붉어져 곪아터졌다네
터진 자리가 굳어져서 딱딱한 껍질이 되고
조금씩 튼튼해진 껍질을 뚫고
새로운 두려움이 다시 도지곤 했다네
두꺼운 껍질 속 물컹물컹한 살은
여전히 작은 숨 콩콩 쉬며 따뜻하게 숨어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두려움을 튼튼하게 만들었다네
지금은 구두가 되고 잠바가 되고 허리띠가 되어
스타킹처럼 얇고 투명한 가죽들을 덮어주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네 저 가죽 안에 살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생명들을
추위와 이빨과 발톱을 견뎌내면서도
가쁜 숨과 더운 땀은 자유로이 통과시켜주던 가죽
안에서 착하게 떨던 여리고 약한 주인들을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는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가뭄                                                     
 
울음은 뜨거워지기만 할 뿐
눈물이 되어 나올 줄을 모른다
힘차게 목젖을 밀어 올리지만
아직도 가슴속에서만 타고 있다
매운 혀 붉은 입을 감추고
더 뜨거워질 때까지 더 뜨거워질 때까지

 
바늘 구멍 속의 폭풍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파마하는 여자                                         

어떤 머리로 해 드릴까요, 언니. 바람이 불지 않아도 항상 휘날리는 바람머
리로 할까요? 올해의 히트 상품, 파도머리는 어때요? 이마에 부딪쳐서 머리 위로 시원하게 넘어가는 물보라가 일품이죠. 언니는 얼굴이 넓으니까 파도를 높이 빗어올리면 정말 바다 같겠어요. 올 가을 신상품이요? 황금들판인데, 요즘 한창 뜨는 중이예요. 황금빛 염색 갈피갈피에 일렁이는 가을바람 무늬를 넣지요.

여자들은 머리에 파마캡을 두르고 여성지를 보거나 요구르트를 빨며 앉아
있다. 오늘 파마한 머리가 성공적으로 푸른 싹을 틔우도록 산부인과의 임신 부들처럼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다. 새로 태어날 멋지고 잘 생긴 머리를 태교하듯 열심히 생각하는 중이다. 새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살게 될 얼굴을 그려보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여자들 머리에서는 늦가을 황금들판이 출렁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복권 파는 여자                                         

빨간 지붕, 하얀 벽돌, 작은 반달창,
동화 속의 집 같은 예쁜 복권 판매점에
오늘도 그 여자는 앉아 있다.
시커먼 손, 누런 손, 하얀 손, 주름지고 딱딱한 손이
더 이상 갈 곳 없는 너덜너덜한 돈을 들고 와서
빳빳하고 깨끗하고 오색찬란한 복으로 바꾸어 간다.
복권으로 복을 받을 확률은? 십만분의 일?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
오, 얼마나 단단하고 두껍고 높은 희망인가.
이제 저 희망을 손에 쥐었으니
저들은 칼잠, 새우잠, 선잠, 불안하고 얕은 잠 속에서
필사적으로 돼지꿈을 꾸어야 하리라.
복권 파는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낡은 천 원짜리가 들어온다.
점쟁이처럼 그녀는 모든 걸 한눈에 보아버린다.
얼마나 불쌍한 손이 머뭇거리며 찾아왔는가를
그 돈이 얼마나 떠돌며 구겨지다 왔는가를
그 손이 받아갈 복이 얼마나 힘없이 찢겨질 것인가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기계처럼 민첩하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그녀는 헌 돈을 새 복권으로 바꾸어 준다.
지루하게 줄 서 있는 저 출구 없는 삶들,
사방팔방이 꽉 막혀 있는 저 삶들에 대한
그녀의 확고하고도 유일한 처방은
언제나 단 하나―복권이었다.
얼마나 많은 오갈 데 없는 돈들을 복으로 바꾸어 주었던가.
오늘도 얼마나 많은 복을 나누어 주었던가.
그래도 아직 복권은 많다.
주택 복권, 월드컵 복권, 더블 복권, 또또 복권……
2억, 4억, 7억, 10억……
당첨금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엄청난 복을
앞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그녀는 요염하게 하품을 한다,
복이 너무 많아 이제는 귀찮다는 듯
마법의 성처럼 예쁜 집에서
복을 관리하는 여신 노릇도 이제는 시시하다는 듯.


유리에게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멸치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다리 저는 사람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은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 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타이어                                                   

놀라 돌아보니 승용차가 트럭앞에서 급정거 하고 있다
그 찢어지는 소리가 도살당하는 돼지의 비명소리를 닮았다

도로가 죽음으로 질주하는 타이어를 강제로 잡아당기니
두려움의 끝까지 간 마음이 내지르는 소리가 나는구나
둥글고 탄력있는 타이어도 극한 상황에서는
돼지의 성대를 지나가는 공기처럼 진동하며 우는구나

일그러진 승용차가 견인차에 끌려 떠난 자리에
두 줄기 길고 검은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다
최후까지 악쓰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붙어버린 마음을
아무것도 모르는 타이어들이 씽씽 밟고 지나간다
 

출퇴근길 풍경                                         


아침마다 산은 어린아이들처럼 시끄럽다.
새들이 숨어 있는 나무들은
긴 목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쉴새없이 빠르게 지저귄다.

아침마다 만원 지하철은 조용하다.
피곤한 팔다리들은 얕은 잠에 취해 있고
그 위로 무뚝뚝한 얼굴들이 가득 돋아 있다.

저녁이 되면 지하철은 시끄러워진다.
얼굴들은 발그레해지고 표정 넘치도록 깔깔거리고
술 먹으러 가는 팔다리들처럼 활기차다.

저녁이 되면 산은 고요해진다.
바람이 곁을 달라고
어두운 나무들을 흔들어보다가
오히려 깊은 어둠에 빠져 빠져나오지 못한다.


주름살                                                 
 

화물차의 경적
급정거, 하는 버스
소리들이 내 관자놀이를 누른다
소리에 눌려 내 양미간이
찌그러진다 찌그러진
양미간이 종일 펴지지 않는다
사람들을 만나면 찌그러진 양미간으로 웃는다
눈 언저리와 입가도 따라서 일그러진다
거울을 보고 두 손으로 억지로 양미간을 펴본다
느닷없이 양쪽 귀에서 쏟아져나오는
화물차의 경적 소리
버스의 급정거 소리
놀란 양미간 깊은 주름이 황급히 되돌아온다
 

고요하다는 것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을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몸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배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쥐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 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명태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은 악쓰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 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노인                                                     

노인은 조용히 앉아 산을 보고 있다. 잘 일구어진 흙 속으로, 검게 바랜 얼굴과 손으로 햇빛이 들어가고 있다. 단단한 것들의 흔적이 굳어 있는 주름살은 햇빛 속에 길고 편안하게 뻗어 있다. 볕이 태워도 그을 것이 없고 추위가 후벼도 갈라질 것이 없는 손등을 흙이 묻어나올 듯한 흰 모시적삼이 덮고 있다. 모시 흰 올 같은 머리카락이 적삼과 함께 부드럽게 휘날린다. 온통 지면을 흔들며 아스팔트를 깨는 착암기 소리, 확성기마다 쏟아져 나오는 장사꾼들의 고함 소리, 자동차들의 따가운 경적들이 조용히 가라앉은 노인의 눈, 그 시선 끝에서 바람에 일어날 듯 앉은 먼 산자락.

노인은 가끔씩 헛디디며 걷는다. 앞뒤로 끊임없이 지나가는 빠른 자동차들 사이, 잔걸음은 휘어진 소나무처럼 바람에만 흔들릴 뿐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거대한 빌딩 하나 노인의 굽어진 등 위로 솟아올라 하늘 한 면을 가리고 있다. 노인은 올려다보지 않고 천천히 걷는다. 빽빽한 소음 사이로 들려오는 낯익은 산바람을 헤아리고 있다. 노인이 걷는 동안에도 빌딩은 고속 엘리베이트를 타고 산꼭대기가 있던 자리를 뚫고 올라가고 있다. 가끔씩 헛디디며 노인은 쉬지 않고 걷는다. 속도 속에는 없는 무진장한 시간을 한없이 밟으며 좁은 산길을 향해 느릿느릿.
 

실직자   
 1

툭, 몸 안에서 무엇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끊어지면 모든 것을 잃을것 같던 
끊기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그렇게 조심하고 조바심쳐왔던
끊어질까봐 소리 한번 크게 내지도 못하고
시원하게 화도 한 번 내보지 못했던
언제나 떨림과 미열과 진뇨감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철푸덕,
그 덩어리 하나가
장화 같은 하체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2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도 가는 길을 알던 걸음이
술도 먹지 않은 지금은 그길을 모른다
심장이며 허파하며 내장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체는 썰렁하고
그 모든 것들이 쌓인 다리는 무겁다
그 무게에 의지하여 나는 걷는다
걸음이란 발이 어느 곳을 향해 가는 행위가 아니라
단지 한 발이 밀어올린 몸뚱이가 앞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다른 발이 받쳐주는 것 다른 발이 그 다음에 받쳐주고
또 다른 발이 이어서 다시 받쳐주는 것
가는 곳을 모른 채 걸음은 그치지 않고 간다
텅 빈 이 커다란 무게를 지고
 

나무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던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리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난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너는 없다                                               


너의 흔적은 머리카락이나 지문이 아니다
손때 묻은 책이나 냄새나는 옷가지도 아니다
기억 속에 사는 목소리나 표정도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면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너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다만 온기가 없을 뿐이다
날아와 여기 쌓이기 전에 너는
끈적끈적하거나 꺼칠꺼칠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뜨거운 바람을 불어내며
단내와 시큼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단내, 아, 그 숨막히는 열기여!)
사람과 사람 사이
베면 피가 나올 것 같은 살가죽 같은 공기를
걸치고 다녔을 것이다
식어버리자 쉽게 흩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온기가 있다면
울거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너는 지금 차갑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어도 풀썩거린다
그렇다 너는 없다
없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너의 흔적은 없다
 
노래에 대하여                                         

울음우는 바람을 들이마셨네
꿈틀거리는 먹이처럼 목구멍과 식도를 지나며
바람은 소리죽여 떨었네 떨림은 두껍고도 굵어
첨벙첨벙 가슴을 흔들며 떨어졌네
바람은 우물 같은 가슴속에 깊이 가라앉아
오랫동안 두근거리는 소리만 듣고 있다가
따스한 온기에 몸을 녹이다가 더러는 스며들어
눈물샘 뜨거운 물줄기를 더듬다가
원통형 어두운 저음이 되어 올라왔네

울음우는 바람을 불어 날렸네
지느러미 흔드는 육중한 소리가 되어
더 큰 바람을 끌고 긴 몸뚱이는 꿈틀거리며 나왔네
떼지어 날아다니는 울음들 속에 내 노래도 섞이겠네
울음의 무게를 못 이기면 더러는 가라앉기도 하겠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쌓이겠네
손끝을 대면 비듬처럼 묻어나오겠네

병                                                         
 

병이 들어오면 몸은 뜨거워집니다
한 그릇 고요한 물처럼
마음은 찬 데 있어야 투명하고 맑아지는데
뜨거운 그릇 속에 앉아 있자니
울렁울렁 속이 일어나 뒤집히고
한 방울 두 방울 기포도 생겨 떠오릅니다
그릇 오목한 바닥에 착실하게 엉덩이 붙이고 싶어도
자꾸 들썩거리게 되고
끝내 마음은 소리지르며 끓기 시작합니다
끓어오르느라 온몸 가득 닭살이 돋습니다
그래도 병을 이기려고 부글부글 끓습니다
마음도 한몸 속에 너무 오래 담겨지면
먼지도 앉고 잡균도 꼬여 흐려지겠지요
비우지도 않고 마냥 채우기만 하면 더 흐려지겠지요
사는 곳이 맑고 고요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니
마음은 가끔 이렇게 푹푹 끓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밥생각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 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리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 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누군가 매일 너를 보고 있다                       

매일 밤 너의 얼굴은 증명사진처럼 무표정하다.
어두운 곳에서 우두커니 앞만 보고 있다.
얼굴은 어두워졌다 환해졌다 다시 어두워지고
붉어졌다 푸르러졌다 이내 울긋불긋해진다.
두 눈 속에는 똑같이 사각의 불빛이 켜져 있고
그 불빛 속으로 온갖 세상사가 지나간다.
불빛은 천둥이 올 것 같은 번개를 일으키며
검은 자위 다 지워지도록 눈동자를 지지고 또 지진다.
텔레비전은 그렇게 밤 늦도록 지치지도 않고
너의 멍한 얼굴을 이글이글 태우며 쳐다본다.
 

바람 부는 날의 시                                   

바람이 분다
바람에 감전된 나뭇잎들이 온 몸을 떨자
나무 가득 쏴아 쏴아아
파도 흐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보자고
바람의 무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 보자고
작고 여린 이파리들이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실처럼 가는 나뭇잎 줄기에 끌려
아름드리 나무 거대한 기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태아의 잠 1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따뜻한 실핏줄마다 그것들은 찰랑거린다 때로 갈비뼈 안에서 멈추고 오랫동안 둔중한 울림이 되어 맴돌다가 다시 실핏줄 속으로 떨며 스며든다 이 소리들이 흘러가는 곳 어딘가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한 아이가 숨어 있을 것 같다 생각없는 꿈이 되려고 놀란 눈이 되고 간지러운 손가락 꿈틀거림이 되려고 소리들은 여기 한 곳으로 모이나 보다 이 모든 소리들이 녹아 코가 되고 얼굴이 되려면 심장이 되고 가슴이 되려면 잠은 얼마나 더 깊어야 하는 것일까 잠의 힘찬 부력에 못 이겨 아기는 더이상 숨지 못하고 탯줄이 끊어지도록 떠올라 물결 따라 마냥 흔들리고 있다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 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


서른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가슴 대신에 머리에서 끓는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다
냄비의 얇은 금속성들은 낮은 소리로 악을 쓸 것이다
그대 지식의 갖가지 자양분을 지니고 있는 흰 골은
이제 계란처럼 딱딱하게 익을 것이다
생각들은 삶은 머리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깨어지면 물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애써 배운 것들은 얼룩을 남기며 바닥에 스며들 것이고
비린 점액질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 씻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심하라 깨져도 여전히 동글동글하고 튼튼한 생각 속에서
희면 희다 노라면 노랗다 확실하게 구분된 말들이
까기 좋고 먹기 좋고 잘생긴 말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영양가까지 계산하여 잘 삶은 목청 속에서
말들은 강한 억양을 타고 근엄한 틀을 갖추어 나올 것이고
짭잘하고 구수한 양념들이 그 위에 뿌려질 것이며
더 이상 떫은 비린내는 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구나 돈을 내고 사고 싶어지도록 탐스러워질 것이다
그대 머리는 냄비처럼 점점 튼튼해질 것이고
그대 목소리도 비례하여 점점 요란해질 것이다
시끄러워서 그대는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띔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틈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놓고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트트틈틈들을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지낟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갸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맨발                                                     
 

집에 돌아오면

하루종일 발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
가죽구두를 벗고
살껍질처럼 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검정 양말을 벗고

발가락 신발
숨쉬는 살색 신발
투명한 바람 신발
벌거벗은 임금님 신발

맨발을 신는다


다리를 떠는 남자                                     


컴퓨터 자판을 두리리면서
그는 맹렬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자기 꼬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에 흠뻑 취한 사이
마음은 저 혼자 몰래 춤을 춘다

그와는 무관한 또 다른 그가
엉덩이 밑에서 열심히 놀고 있다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한 발짝도 움질일 수 없어 답답할 줄 알았더니
일평생 꼼짝 못하고 한 자리에만 있어 외롭고 심심할 줄 알았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실뿌리에서 잔가지까지 네 몸 안에 나 있는 모든 길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 구불구불한 길은
뿌리나 가지나 잎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는 너의 길고 고단한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번개의 뿌리처럼 전율하며 끝없이 갈라지는 길은
괴팍하고 모난 돌멩이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가는 너의 길은
길을 막고 버티는 바위를 휘감다가 끝내 바위가 되기도 하는 너의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추위로 익힌 독한 향기를 몰고 꽃에게 달려가는 수액은
가지에 닿자마자 소리지르며 하늘로 솟구치며 터지는 꽃들은
온몸에 제 정액을 묻힐때까지 벌 나비 주둥이를 쥐고 놓아주지 않는 꽃들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한 몸으로 꽃처럼 많이도 임신한 너의 자궁은
불룩한 배를 가지마다 매달아놓고 무겁게 흔들리는 너의 자궁은
이빨 가진 입들을 벌려 자궁을 부숴버려야 밖으로 나오는 너의 씨앗들은
땅에 붙박힌 채 오도가도 못하고 살아도 죽어 있는 것만 같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어느 다리보다 먼 길을 지나온 네 몸이 발산하는 침묵은
다리 달린 벌레며 짐승들이 매일 들으며 자라는 너의 침묵은
잎에서 잎으로 길로 허공으로 퍼져나가 산처럼 거대해지는 너의 침묵은

얼룩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자리를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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