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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김기택 시인의 가을시편

by kimeunjoo 2009. 11. 15.

       

       

      ♧ 김기택 시인은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꼽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95년 제14회 김수영 문학상, 2001년 제46회 현대문학상, 2004년 제11회 이수문학상, 제4회 미당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문학과지성사, 1992), ‘바늘구멍 속의 폭풍’(문학과지성사, 1994), ‘사무원’(창작과비평사, 1999), ‘소’(문학과지성사, 2005) 등이 있다.


       ‘시는 사물과의 대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물은 생김새, 물성, 운동, 크기, 무게, 냄새 등과 그것이 있는 위치와 장소,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특성과 인상을 가지고 있다. 개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육체성은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정서와 감정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거나 사물을 의인화시켜 그것들로 하여금 사람의 말을 대신하게 하거나 그것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많은 문학 작품이 직접적으로 이런 내용을 다루거나 이런 방법을 사용해 왔다.’ -- ‘시 창작에 대하여’ 중 4

       

       


      ♧ 플라타너스 잎 하나 - 김기택


      급히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어

      돌아보니

      막 떨어지고 있는

      커다란 손 같은 낙엽이었다

      팔 없는 손은 내 팔을 더 붙잡지 못하고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마침 뒤에서 오고 있던 발 하나가

      무심히 밟자

      바스락!

      발밑에서 무수한 틈이 갈라지는

      쇳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발이 멀리 가버린 뒤에도

      소리들은 틈 사이에 남아

      오랫동안 저희들끼리 바스락거렸다

      가을 햇빛이 주름살을 쓰다듬듯

      깨어진 마른 핏줄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넓은 잎은 크고 앙상한 손바닥을 오므리며

      바스러진 틈으로 빠져나가는 허공을

      오래오래 쥐고 있었다

       


      ♧ 나뭇잎 떨어지다 - 김기택


       나뭇잎에도 무게가 있네. 그 무게에 나뭇잎이 떨어지네. 나뭇잎 무게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네. 바람과 공기가 떨어지는 무게를 건드려보네. 바람이 자신을 붙들고 마음껏 흔들도록 나뭇잎은 그냥 내버려두네. 후려치고 할퀴는 것을 다만 쳐다보기만 하네. 바람의 힘이 세면 셀수록 그 힘을 타고 나풀거리는 무게의 곡선은 더욱 신이 나네. 그 곡선은 바람의 힘을 넉넉한 부력으로 삼아 바람에 등을 대고 눕네.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는 힘도 나뭇잎을 쫓기만 할 뿐 어찌하지는 못하네. 바람이 힘 빠지면 나뭇잎은 땅으로 살짝 내려오네. 풀잎 위에 누워 쉬면 바람은 다시 잎을 나꿔채서 쥐고 흔들어보네. 나뭇잎은 바람의 성깔이 엽맥 속으로 숨구멍 속으로 깊이 스며들도록 놓아두네. 오히려 그 흥분으로 온몸을 파르르 떠네. 나무 밑에는 나뭇잎들이 가득하네. 겨울나무 밑에는 말라 바삭거리는 소리들이 가득하네.


       

      ♧ 바람 부는 날의 시 - 김기택


      바람이 분다

      바람에 감전된 나뭇잎들이 온몸을 떨자

      나무 가득 쏴아 쏴아아

      파도 흐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보자고

      바람의 무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 보자고

      작고 여린 이파리들이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실처럼 가는 나뭇잎 줄기에 끌려

      아름드리나무 거대한 기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 겨울을 기다림 - 김기택


      두꺼운 털 같은 추위

      둥글게 말아 웅크리면 따뜻해지는 추위

      너무 껴입어서 무거워 지는 추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추위

      이빨도 발톱도 없는 꼬리를 흔드는 추위

      배고프면 더 신나게 흔드는 추위

      숨 쉴 때마다 텅 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배고픈 배 흔들며 뛰어노는 추위

      뱃가죽과 등뼈가 서로 얼어붙으면

      저절로 허리가 공손하게 굽어지는 추위

      정신 통일하여 밥 생각을 하면

      가만히 졸다가 따뜻해지는 추위

       

       

      ♧ 또 겨울을 기다림 - 김기택


      허, 고것 참 맵다! 참 맵다! 노인은 굽어진 등뼈로 힘차게 허리를 펴본다. 등뼈도

      지지 않으려고 더 억세게 허리를 누른다.


      수십 년간 얼었다 녹았다 하느라 질기고 쭈글쭈글해진 얼굴가죽이 다시 언다. 눈

      은 성에가 끼지 않도록 연신 끔벅거리며 눈물을 추스른다. 코는 너무 매워 벌겋게 달

      아올라 있다. 턱은 단단하게 굳어 이젠 떨리지도 않는다. 귓날은 곧 유리처럼 깨질 듯

      끝이 날카롭다. 귓구멍 속으로는 뱀 혓바닥 같은 바람이 날름거리며 쉬익쉭 소리를

      내고 있다.


      어험! 고놈 참 고약허기도 허다. 요 독오를 대로 오른 놈 좀 갖다가 한 여름에 약

      으로 쓰면 참 용하것다. 험, 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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