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음 속의 밀림 - 김기택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 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놓은 힘은
절망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法과 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들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생각해본다
청정한 法과 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생각해 본다
* 한 명의 육체를 위하여 - 김기택
달려가던 승용차가 가볍게 들어올리자
사내는 조금도 꾸밈이 없는 동작으로
빙그르르 공중에서 몸을 돌리고
전혀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스팔트 위로 내리꽂혔다
얇은 가죽으로 막아놓은 60킬로그램의 비린내
안에 들어있던 분노와 꿈이
일제히 터진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은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신속하게 완벽하게 제 위치를 ㅊ아갔다
꿈은 흰 쌀밥 위를 오르는 김처럼
모락모락 공손하고 착하게 흰 골을 떠나
거대한 스모그 속으로 스며들었고
분노는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따라
하수도 속으로 얌전하게 흘러 들어갔다
크고 믿음직스런 두 손이 있었으나
체온이 있을 동안만 가늘게 떨었을 뿐
곧이어 차고 뻣뻣한 힘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군지 아침부터 해장 한 번 잘했군
지나가던 버스 운전사가 킬킬거렸고
손바닥으로 반쯤 가려진 얼굴들이
킁킁거리며 비린내를 향해 몰려왔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핏줄의 끝 수만 뿌리 모세혈관으로
모여 기지개가 되고 주먹이 되고
눈동자 속으로 빛이 되어야 할 힘들이
해골을 뚫고 풀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간 후
사내는 이제 진짜 육체가 된 것이다
무기력하고 아무 할 일도 없어 마냥 착하기만 한 육체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순한 육체가
* 교정보는 여자 - 김기택
그녀의 눈으로 끊임없이 글자들이 지나간다. 글자들은 책상 위에 휴지통에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그녀는 종일 빠지고 넘어져 잘못된 글자들을 골라내어 제자리에 앉혀준다. 글자들은 모래알처럼 맑고 모래알처럼 딱딱하다. 그녀의 눈 속에 촘촘하게 박힌다. 뜨겁고 눈부신 태양의 조명 아래 모래알 가득한 눈을 끔벅거리며 그녀는 낙타처럼 글자의 사막을 지나간다. 가끔 눈이 너무 아프면 잠시 감아보기도 한다. 글자들은 눈알에 깊이 음각되어, 감은 눈에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그녀는 곧 음각된 글자들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다시 눈을 열어 글자 속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교정지 위로 어둠이 내린다. 그녀는 넓고 두툼한 어둠으로 글자들을 덮는다. 오래 상처가 난 눈을 감는다. 눈물이 가만히 상처를 만져본다. 상처가 조금씩 소스라치며 씻긴다. 이윽고 글자들은 어둠의 두툼함 속에 묻히고 그녀의 눈은 편안해 진다. 그녀는 손바닥에 닿는 어둠을 더듬더듬 만져본다. 오래 오래 그 감촉들을 음미해 본다. 손가락 끝은 단맛을 모르지요. 향긋한 냄새와 혀끝의 짜릿함도 모르지요. 하지만 남은 표면의 우툴두툴한 편안함은 더 잘 안답니다. 허름한 잔등의 온기와 기침 속에서 떨리는 등뼈의 정다운 울림은 더 잘 안답니다.
말 속에 말들이 있다. 손가락 끝에서 만져졌던 말은 가슴에 와서 작은 누룩 속에 들어 있는 빵처럼 크고 둥글어진다. 눈에서 녹아 가슴에 내린 글자의 상처들을 동그랗게 싸고 부풀어오르는 말의 향기들. 숨쉴 때마다 그녀의 부푼 가슴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난다.
* 사무원 - 김기택
아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혀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官理臺帳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金收支心經(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장자불입)'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 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는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나무 - 김기택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는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껍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라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나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 낡은 의자 -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틈 -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놓고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트트틈틈들을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지낟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갸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 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볓에 못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 멸치 -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 바늘구멍 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 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 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릉 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 김기택 1957년 경기 안양생.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1989)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등
'♧ 문학의 향기 > ♣ 영상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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