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녹으니
김기택
녹는 눈은 누더기처럼 해어진다.
부스럼 난 살갗처럼 푸석푸석 갈라진다.
흰 철문에서 붉은 녹을 드러내며 들뜨는
낡은 페인트처럼 벗겨진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눈 사이로
달동네 추운 맨살이 드러난다.
천막으로 지붕을 기운 집들
연탄재와 쓰레기와 개똥 위에 서 있는 담장들
지붕에 어지럽게 얹어놓은 잡동사니들
양분 부족으로 누렇게 말라가는 삶들이
억지로 잠에서 깬 듯 드러난다.
개구멍 같은 쪽문에서
가끔 연탄재를 들고 나오는
무릎 튀어나온 파자마와 슬리퍼 신은 맨발,
햇빛을 받자마자 녹슨 철사처럼
헝클어지는 머리와 축 늘어지는 주름이
돋보기로 확대해놓은 듯
어쩔 수 없이 꼼꼼하게 드러난다.
누군가 내장의 힘을 다해 게워놓은 것 같은
걸쭉하고 벌건 국물을 길가에 튀기며
차 한 대가 지나간다.
녹는 눈은 순순히 으깨어지며 또 녹는다.
문드러진다 진물 흘린다 질척거린다.
지난밤 백설공주를 덮었던
순백의 그 눈부신 살갗이
한나절도 안 되어 해골을 다 드러내며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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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 당선.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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