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숲처럼 / 문정희
나무와 나무 사이엔
푸른 하늘이 흐르고 있듯이
그대와 나 사이엔
무엇이 흐르고 있을까.
신전의 두 기둥처럼 마주보고 서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쓸쓸히 회랑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오늘 저 초여름 숲처럼
그대를 향해 나는
푸른 숨결을 내뿜을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를 쑤실 가시도 없이
너무 멀어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길을 만드는 일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그대와 나 사이
저 초여름 숲처럼
푸른 강 하나 흐르게 하고
기대려 하지 말고, 추워하지 말고,
서로를 그윽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순간 / 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풍선 노래 / 문정희
나를 가지고 놀아줘
허공에 붕붕 띄워줘
좀 더 좀 더 입으로 불어줘
뜨거운 바람 넣어줘
부드럽고 탱탱한 살결
주물러 터뜨려줘
아니, 살살 만져줘
그만 터져버릴 것만 같아
내 전신은 미끄러운 빙판
삶 전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날카로운 시간의 활촉이 나를 노리고 있어
열쇠는 필요 없어
바람의 순간을 즐겨줘
아니, 신나게 죽여줘
보석의 노래 / 문정희
만지지 말아요
이건 나의 슬픔이에요
오랫동안 숨죽여 울며
황금시간을 으깨 만든
이것 오직 나의 것이에요
시리도록 눈부신 광채
아무도 모르는 짐짓 별과도 같은
이 영롱한 슬픔 곁으로
그 누구도 다가서지 말아요
나는 이미 깊은 슬픔에 길들어
이제 그 없이는
그래요
나는 보석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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