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에게 /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사모 /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러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東卓 조지훈 1920-1968
조지훈(趙芝薰)의 주도유단(酒道有段)
음주 18 계단
9급--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먹는 사람
8급--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7급-- 민주(憫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6급-- 은주(隱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5급-- 상주(商酒)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때만 술을 내는 사람
4급--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3급-- 수주(睡酒) :잠이 안와서 술을 먹는 사람
2급-- 반주(飯酒) :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초급-- 학주(學酒) :술의 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
초단-- 애주(愛酒)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
2단-- 기주(嗜酒)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
3단-- 탐주(耽酒)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酒境)
4단-- 폭주(暴酒) :주도(酒道)를 수련(修練)하는 사람
5단-- 장주(長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酒仙)
6단--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
7단--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
8단-- 관주(觀酒) :술을 보고 즐거워 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
9단-- 폐주(廢酒) 열반주(涅槃酒)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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