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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못 - 박제영

by kimeunjoo 2012. 1. 15.

 

 

 

 

 

못 / 박제영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던, 삼촌은 죽어서 못이 되었네

엄마야 누나야 가슴 속에서, 밤마다 출렁이는 시퍼런 못

녹이 슬고 있는 두 여자가 있었네

 

"엄마야 이제 그 못 뽑자 제발"

 

엄마는 이십 년을 보챘지만 외할머니는 죽을 때까지 심장에 못을 키웠네

 

"못 된 것 못 된 것"

 

외할머니 울음을 삼킬 때마다 못은 조금씩 깊어졌네

눈물샘이 다 마를 때까지 깊어진 못이 마침내 외할머니를 삼켰네

외할머니 봉분 올린 그 밤 엄마는 외할머니가 막내 삼촌 젖을 물리고 있는 꿈을 꾸었네

 

"엄마가 이제야 못을 뽑았구나"

 

엄마가 환하게 울고 있었네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 박제영

 

어머니는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열일곱 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 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면,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무식하고 억척스런 어머니가 내 모국어이다 그 무식한 말들, 억척스런 말들이 내 시의 모국어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써 온 수백편 시들을 전부 모아 밤새 체를 쳤다 바람같은 말들, 모래같은 말들, 다 빠져나가고

오롯이 어, 머, 니,만 남았다 당연하다

 

 

 

 

노스탤지어 / 박제영

 

책상을 정리하다 말고 생각에 잠긴다

 

달걀 귀신이 무서워 언제나 형을 깨워 뒷간을 가야 했다

"행님아, 거 있나?"

"있다. 짜슥, 뭐가 그리 무십노?"

"가지마래이, 무십다"

 

군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가던 날, 고향을 떠난다는 게 무언지 몰랐다

"어무이, 와 우노? 서울 간다 안캤나?"

"니, 서울이 그리 좋나?"

"하모, 좋재, 행님아, 니도 좋재?"

"짜슥, 가만 있그래이, 즈그 집 버리고 넘우 집 살러가는 게 무에 좋노?"

 

주인집에는 텔레비젼이 있었다, 몰래 훔쳐보곤 했었는데, 어머니는 그게 언제나 싫으셨던 모양이다

"이눔아 자슥, 일루 안오나? 니가 그지 새끼가?"

"와 때리노? 뭐 잘못했노?"

그날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는 심하게 다투었고, 형한테 나는 처음으로 맞았다

 

겨울 어느 오후, 햇볕 한 줌같은 옛기억들

참으로 오랫만에 나는 유년의 강물에 뛰어들어 멱을 감는다

 

"여보, 국 다 식는데, 아까부터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아, 아이다, 그래 곧 가께"

"오래 기다렸나? 방 좀 치웠구마, 묵자"

"봐라, 우리 아 하나 더 노까?"

 

 

[시작노트]

 

어느새 이만큼 세월이 흘렀나 봅니다. 화장실조차 무서워 형을 꼭 앞세워야 했던 시골 아이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처자식을 둔 가장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바쁘더라도 가끔은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너무 오래 앞만 보고 가다가 자칫 내가 어디서 왔는 지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잊으면 어디로 가야 할 지 길을 잃을 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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