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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시인뜨락

윤동주 시모음

by kimeunjoo 2011. 8. 29.

편 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쉽게 씌어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일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프랑시스 잠',‘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또 다른 고향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

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

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

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 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

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

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

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

의 얼굴은 어린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고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걸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오줌싸개지도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못 자는 밤                                              

 

하나,둘,셋,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윤동주 尹東柱 (1917. 12. 30 - 1945. 2. 16)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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