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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오래 된 서적(書籍) / 기형도

by kimeunjoo 2011. 4. 22.

 

 

 

 

 

 

오래 된 서적(書籍)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을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흔해빠진 독서 / 기형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은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추억에 대한 경멸 /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나리 나리 개나리 / 기형도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컹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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