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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사랑은.. 이승희

by kimeunjoo 2011. 2. 5.

 

 

                이승희

1965년 경북 상주 출생.

1999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시집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2006 창비

 

 

[1]1부

 

1.벽제 가는 길

  달이 뜨네요, 오늘은 조선 막사발로 뜨네요 어쩌라는 건가요, 가슴에 시퍼런 불 질러

넣고 허 참, 막사발로 뜨네요. 조선 낫 한 자루 다 닳아가도 깎이지 않을 마음의 불길 어쩌 라고, 막사발에 맑은 물 한잔 출렁이네요. 저거 흐를까 발걸음 늦어지고, 더디게 가는 길 불길은 저 혼자 타올라라 하네요.

  허기진 하늘 둥글게 돌아 이마를 짚으며 벽제 가는 길, 달빛에 젖은 나무들 툭툭 쓰러지

는데요, 숲이 큰 호수 같기도 하여, 그만 첨벙 들고만 싶었구요. 굽이굽이 돌아도 허기진

골목이더니 또 이렇게 예까지 왔네요. 공장 불빛이 보이고, 하늘엔 막사발에 간장 종지가

수도 없이 떠있네요. 아주 큰 밥상이차려졌나봐요.

 

 

2.아직은 봄이 아닌 걸

 

못자리로 들어가는 논물을 본 일이 있는가?

그렇게 쏜살같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맹렬하게

들어가지. 아 얼마나 이쁘냐. 언젠가는 멈출

일이지만 그야 논둑 안의 물들이 평등한 높이

가 되어야 하지. 어느 구석, 어느 낮은 곳 남겨

두고서야 그 물길 멈추는 것 보았는가.

눈물 회오리 멈춘 그 자리 참 맑아, 꽃보다

맑고 하늘보다 푸르른 착한 누님 발 씻겨드리면

정말 좋겠네.

벽제 가는 길

 

열하홉살 방직공장누님 눈물도 없이 말라갈 때,

내가 던진 돌은 다 어디 있는가. 누님의 가슴팍에

빼어 던진 돌이 왜 아직 거기 그대로 있는가.

 

3.바람 불어 아픈 날

 

온몸이 뭉특한 바위가 있다. 수억년 불길에도 살아남았지만 그 불의 내력에 들지 못한

삶은 오로지 깎이고 깨지면서 살아야 하는 생이 되었다. 날 선 칼에는 미동도 않더니

제 밑을 파고든 여린 풀들에게는 몸을 기울여 순순히 자리를 내주는 코 뭉툭한 바위.

누님 만나러 벽제 가는 길에 바위에 앉는다. 바위 속에서 쓰아악 대숲의 바람이 불기도

하는 것이 수천년 수도의 공력이 절정이다.

바위에 앉아서 보면,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안쓰러운가, 또 얼마나 늠름한가.

 

4.찔레꽃

5. 오늘 또 하루를

 

달이 뜨네요, 오늘은 조산 막사발로 뜨네요 어쩌라는 건가요, 가슴에 시퍼런 불 질러

넣고허 참, 막사발로 뜨네요. 조선 낫 한 자루 다 닳아가도 깎이지 않을 마음의 불길 어쩌 라고, 막사발에 맑은 물 한잔 출렁이네요. 저거 흐를까 발걸음 늦어지고, 더디게 가는 길 불길은 저 혼자 타올라라 하네요.

  허기진 하늘 둥글게 돌아 이마를 짚으며 벽제 가는 길, 달빛에 젖은 나무들 툭툭 쓰러지

는데요, 숲이 큰 호수 같기도 하여, 그만 첨벙 들고만 싶었구요. 굽이굽이 돌아도 허기진

골목이더니 또 이렇게 예까지 왔네요. 공장 불빛이 보이고, 하늘엔 막사발에 간장 종지가

수도 없이 떠있네요. 아주 큰 밥상이차려졌나봐요.

 

 

6. 돌멩이

 

돌멩이를 보면 아직도 화염병 냄새가 진동해. 떠날 사람들 다 떠나고

남은 이들 없지만, 아직 돌멩이는 화염병 냄새를 제 속에 품고 있었던

거야. 누가 오라고 불렀는가, 누가 가라고 했는가, 남은 것은 말없이

오랜 강물바닥을 흘렀을 돌멩이뿐인가.

누님 만나러 벽제 가는 길

 

못난 돌멩이 하나가 젖먹이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7.웃는 돌을 보았어

          -임진강에서

 

웃는 돌을 보았어. 두 눈꼬리를 아래로 깊숙이 내리고, 마치 길을 머리에 이고 있는 어느

달동네 지붕처럼 그렇게 낮고 깊었어.

  또 그 토를 보라고, 뭉툭하니 고향집 순하디순한 똥강아지 같아서는 말이지, 다문 입으로 그렇게 웃더라고.

 

  한때 바위의 펄떡이는 심장이었을, 천년 만년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었을 것이

이루고자 한 것이 이처럼 사람을 닮는 일이었다니, 남루한 바람이 부는 시장의 귀퉁이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사람이었다니, 공장 잔업을 마치고 달빛 아래 귀가하는 어깨 가라앉은 그 가장이었다니.

 

 

8.둥근 것들의 다른 이름

9.그 시절 다 갔어도

 

10.돌멩이를 쥐고

1

돌멩이, 라고 나직이 불러보라. 마음이 돌멩이 쪽으로 기운다. 또 돌멩이, 라고 불러 보라.

울퉁불퉁 못난 그것이 마음을 나직막이 눌러준다.

돌멩이를 손안 가득 쥐어보라, 손안 가득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마음 있으니, 그대는 뭐라 부를 것인가, 마음이 단단하니 무서울 게 없구나, 이리 가슴 환하니 내가 돌멩이가 되는구나, 아 돌멩이 같은 마음은 어디로 날아갈 것인가. 어디로 날아가 누구의 이마를 깨고,

간단히 중심을 무너뜨릴 것인가.

 

한데, 명치 끝, 여기 단단히 박힌 돌멩이는 누가 던진 것이냐

 

2

이 온기, 온몸이 하나의 격렬한 저항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살아온 내력이려니 싶은데,

이 온기는 어디서 오는가. 둥글지 않은 온기, 모난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마음들이라니,

고맙지 않은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 따뜻한 온기가 있기에 더 식지 않고 더 격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11.감자

 

온몸이 다

눈이 되기 위하여

어둔 땅속에서

 

노동만이 살 길이다.

접어두었던

녹색 줄기의 꿈.

 

가슴을 짓눌러오는 햇살에 대한 이 그리움, 차라리 더 꽝꽝 어두웠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무엇에게도 들키지 않는 시간 속을 부풀어만 가는

눈뜨지 못하는 세월.

 

12.감자2

 

13.희고 붉은 감자꽃 필 때

 

햇살의 애를 배어,
 석 달 열흘을 보채는 햇살의 마음을 배어

 땅속 깊은 곳에 흰 등(燈)을 걸어두고
 날마다 그리움의 신방(新房)을 차렸구나.
 오, 어여뻐라
 이 죄 없는 사랑 앞에 나는 무릎 꿇고 운다.
 이 모든 비밀을 가슴에 묻고
 부풀어 오르는 뜨거움을 한칼씩 베어내며 살았을
 이 물기 가슴에
 엎드려 나는 오래 운다.

 초승달이 보름달로 옮겨지던 그 저녁이었구나, 까닭도 없이 가슴이 터질 듯하던 그 밤이었구나. 열손가락을 다 비추고도 남던 그 달빛 아래서 몸 풀었던 게구나. 수천수만의 강줄기가

내게로 와 노래 불렀고, 낮고 오랜 기다림의 편지가 결국 네게 닿았구나. 그랬니? 그랬었구나, 내 눈물 자꾸 뜨거워지고, 푸른 행성이 지나며 둥글게 내 신방을 가려주었던 게구나.


 

12.동틀 무렵

 

 한 우주가 지난다는 게 뭐 다른 일이겠습니까, 새벽 첫차를 타는 사람들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잠 같은 것이거나 휘어진 골목을 돌아 나오는 두부장수의 손끝에서 울리는 종소리거나 그의 터가는 손등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동틀 무렵, 그렇게 우주가 사람의 마을로 손금처럼 내려오고 아직 저마다의 이름을 채 밝히지 못한 시간, 가난은 그래도 사람들을 먼저 깨워 이 시간을 온전히 지키라 합니다. 산을 내려오는 길과 저 산을 지나 우주 한끝에 닿는 길을 당신이 먼저 걸어보라 합니다. 아마 그 몸에도 동이 트려나봅니다. 아직 잠든 식구들을 두고 시퍼런 눈으로 동트는 사람들, 그들이 한 우주가 아니겠습니까?

 



[2] 제2부


1. 수련

     -뿌리에게

 

당신을 수면 아래 묻고

당신의 이름은 물 속의 흙에 묻었습니다.

나는 물 위에 떠서

가만히 당신을 생각합니다.

여전히 한 몸인당신의

이야기가 오늘 하루의 양식입니다.

난 여전히 당신을 읽고

당신은 여전히 나를 읽습니다.

때로 당신은 자꾸만 나를 밀어 올리려 하지만

난 결코 이 물을 떠나지 못합니다.

저 공중으로 가버릴 수가 없습니다.

수면에 닿은 곳, 여기까지가

내가 당신을 버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난 당신으로 인해 꽃 피지만 당신은 나로 인해

당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밤이 되어

달빛을 타고 당신에게 내려가

물속의 흰 방에서 잠들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이 꽃잎을 거두어

송이째 당신에게 지고 싶어집니다.

물속

물의알갱이들을 두드려 밟으며

달빛이 그러하듯

오랫동안

아주 느린

세월의 무게로

가라앉고 싶습니다.

다시는 떠오르지 않고

다시는 저 공중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다시는 꽃 피우지 않으며

지고 싶습니다.


2. 수련

       -꽃에게

 

너무 멀리있다

오늘 아침 당신의 안부를 들었다

물소리가 섞여

반쯤은 젖어 있거나

몇 개의 글씨가 파랗게 번져버린 편지

당신은 왜 꼭 번져버린 그 글자마다에 들어 있는지

여전히 난 당신을 읽어낼 수 없다

 

때로 당신은

물에 젖은 흰빛으로 내게 온다

해질녘이었는지

달빛이었는지 수면엔 온통

흰빛의 무리로 연못 전체가 꽃 핀 듯 둥글어지고

내 가슴팍에도 묵직하게

물은 깊어지고, 깊어져서 한없어지고 나는 진흙 속에

집 한 채를 짓는다

입 안 가득 물을 머금은 창문을 달고

천창을 내어 환한 집

내 손가락 사이마다 짓는 집

 

파란 우체국 도장이 찍힌 엽서 한 장 같은 물결의 무늬


 

3. 사랑은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맟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 속에서 오래도록 저물어 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래 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 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4. 물방울

 

물방울은 왜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맺혀지는 것일까? 맺힌다는 그 말 속 들어 있는

단단한 뼈 같은 마디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하나의 맺힘이 있기까지 그 오랜

습기의 기억들은 어느 바람 속, 어느 쓸쓸한 저녁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일까,

얼마나 사무쳤기에 저리도 둥글어진 것이냐, 물방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다.

그러므로 사랑은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을 만나는 것처럼 그런 것이어야 한다.


5. 봄에 놀다

 

겨울로부터 쫓겨난 것들아, 아기 잇속 같은 잎들아, 망울진

꽃들아, 그리고 너 키 작은 코끼풀, 민들레야 모두 나와 술

한잔 하자. 어디 나를 버린 겨울일랑 용서하자, 떠밀려

살아온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오늘뿐이겠느냐. 집나 온

자식들 모여 질탕하게 놀아보자.

 

놀다가 지쳐 쓰러져 죽을 때, 그때까지만 딱 놀아보자.

 

논둑에서 울다 2

 

그냥 보면 안다. 다 안다. 도랑 쪽으로 귀 열어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저 살림살이의 간결함. 산 하나를 다 담고도, 천년에 걸친 한 가계(家系)의 역사를 저리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음을.
 아프면 아픈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해, 네 맘 다 알고말고, 괜찮아, 좀 쉬었다 가면 돼, 덮고도 남지, 알고말고 도랑물이 논으로 흘러든다


6. 집에 오니 집이 없다

 

이 길은 어느 길 따라 예까지 왔을까. 길이 길을 업거나 안거나, 질질 끌고 달려온 이곳을 나는 모른다. 하나는 신촌에서, 하나는 여의도에서, 하나는 용산에서, 하나는 광화문에서 왔지만 공덕동 오거리에서 서로 몸 섞고, 서로의 길을 막으며, 서로의 길을 비켜주며 떠나갈 때, 나는 길 하나를 데리고 만리동 고개를 오른다. 한겨레신문사를 지나 만리동 고개 턱밑에 이르러 어깨동무를 풀고 쉬는 곳. 나는 다시 길의 손을 잡고 연봉파출소 골목으로 들어간다. 얌전하던 길에 층계에 걸려 가쁜 숨을 쉰다. 그러나 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여전히 나를 따르는 길과 나는 집으로 간다.

 

벌레 먹은 나뭇잎 같은 창을 달고

서로 부둥켜안고 사는 집들

그렇게 고개를 넘어 청파동으로

서울역으로 가는 집들이 있네

나는 길을 그 자리에 누이고, 잠을 재운다.

다투어 내미는 골목들의 손을 잡아

한번쯤 반갑게 손 흔들다 보면

60촉 전구 두 개를 켜고 재봉틀을 돌리는

주인집 부부의 모습이 불빛에 흔들리고

그 한켠으로 두 딸이 누워 엉킨 실밥 같은 꿈을 꿀 때

나는 어둠 속에서 열쇠구멍을 찾는다.

 

익숙해지는 어둠이 흰 이빨을 드러낼 때

열리는 문, 거기

집은 없고

수도 없이 열린 길들이 나를 맞는다.


7. 집은 없다
8. 할머니가 컴퓨터 속으로

9. 씨앗론

 

1

꽃이 피거나

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

본성이 아닌 거야

검은 흙 속을

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 온 시간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풀려지는 일이야

 

감자꽃이 피는 것은

하얗게 피어 말하는 것은

땅 속에 말 못할 그리움이

생겨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

 

2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봐, 저 들판, 저 강가, 네가 발 딛고선

이 언 땅 속 어디에든 바람이 숨겨 둔 풀씨들이 발꼬락을 움직여

무엇으로 일어서려 하는지, 한 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날개의

길이로, 그 불균형으로 바람을 타고 올랐을 것이고, 혹은 가능한

멀리로 자신을 뱉어 내는 그 모든 세상에서 밀려나 아주 쓸쓸한

저녁을 맞았을지도 모르지. 잘 보면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분명히

보일거야. 바로 네가 발 딛고선 그 자리일지도 몰라. 네가 가둔 것들,

네가 끝끝내 손에 쥔 그것들을 놓아봐.


10. 풀과 함께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끈해지는지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어린 풀들

쑥숙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11. 식품 가게
12. 식품 가게 2


13.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옴폭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대는 달

 

밥 먹듯이 이력서 쓰는 시절에


14. 산수유네 집에 가다

[3] 제3부


1. 식물 기간

씨앗이 기다리는 것은 봄이 아닐 거야

 

대륙풍을 따라 한세상을 건너가고 싶은 마음에 끊임없이 제 무게를 버리는 일이나,

강물에 실려 하염없이 흘러가는 것도, 그리하여 온몸에 퍼렇게 멍들어도 몸을 열지

않는 마음은.

 

마디마디 한번씩 오지게 견뎌야 했던 날들 왜 그리 많은지, 밤이면 밤마다 마디에선

뼈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맺힌 곳에서부터 다시 풀어가야만 하는 게 세월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소리도 들었다.

 

상처가 생긴 그 안쪽에서부터 흔적처럼 물기가 생기면 나는 그 상처 속을

태아처럼 오래 떠다니겠지, 먼 사막의 씨앗들은 오늘도 폭우를 기다리며

십 년 세월을 하루로 살지, 마음속의 다짐이 더 깊고 푸르러지면 나는

나무가 될까, 내 마음의 잎들이, 줄기가 햇볕을 따라갈 때 그것이 남은

자들의 그늘을 키우는 힘이 되어, 언제나 세상을 조금씩 올릴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전 생애가 씨앗으로만 굴려진다고 해도.

 

2. 식물 기간 2

 

작은 손들은 어디서 왔을까,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강물이 열리고, 반달 같은 눈과 잎들이 생기면서 나는 꽃의 중심에 앉아 있다. 여기에선 꽃의 오랜 과거와 눈물 나는 한 생이 다 보여, 그것들이 내 몸의 구석 어디라도 흐르다 멈추면 거기에서 나의 숨소리가 들리곤 했어. 아직은 여기가 좋아, 자주 바람이 스치듯 나의 안부를 묻거나, 늦은 저녁이면 늙은 잎사귀들이 긴 손을 뻗어 내 마음을 읽고, 뿌리는 잔 물살로 나를 밀어 올리려고 하지만 아직은 내 방의 은밀함으로 살아갈 수 있지.
 내 손바닥을 흐르는 강물 모두 마르고, 저 산들의 푸름이 조금씩 단단함으로 모이면 그대는 여기를 지나갈 거야, 그 모든 단단함으로 길을 내면서 번져갈 거야. 그렇게 목숨을 하나씩 풀어내는 일이 세상과 화해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도 하나의 또다른 씨앗으로 영글어간다는 것일 게야.

 

3. 식물 기간 3

 

옥탑방 앞에 아주 작은 화단이 있었지. 오랫동안 흙 속을 살던 풀씨들 자라고, 빌딩들 사이를 날아온 민들레도 꽃을 피웠고, 찬바람의 무늬를 닮은 억새 한 대도 솟았는데, 그것은 모두 지난 일이야. ...


4. 식물 기간 4


5. 논둑에서 울다

-오월

 

이상하지? 여기만 오면 고해성사하고 싶어져, 논둑에 앉아서 그냥 똥 누는 자세로 앉아서 보면 살아 있는 죄 낱낱이 고백하고, 용서라는 말도 여기에서 듣고 싶어져.

어떤 성자가 다녀가셨나? 얕은 물속 물방울 같은 발자국들, 아 사람의 역사가 저리 아름다우니 내 눈을 보여도 괜찮으리, 잘못 살아 미안 하다고 중얼거리지 말고 논둑에 앉아 볼 일이다.


6. 논둑에서 울다 2

7. 그냥

 

  그냥

  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아니면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다. 그것들 중 일부는 잠을 털고 일어나거나 아니면

영원히 그 잠 속에서 생을 마쳐 갈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냥 속에는 그냥

산다는 말은 맞다. 그냥의 집은 참 쓸쓸하겠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술처럼 그렇게.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진짜로 그냥이 산다. 깊은 산그림자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어둔 강물 혹은 그 강물 위를 떠가는 나뭇잎사귀 같은 것들이 다 그냥이다.

그래서 난 그냥이 좋다. 그냥 그것들이 좋다. 그냥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들의

물살이 가슴에 닿는 느낌이 좋다.

그냥 속에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는 일처럼.


8. 호박

 

 엎드려 있었다지, 온 생애를 그렇게

 

단풍 차린 잎들이 떨어지며

는실는실 휘감겨와도

그 잎들 밤새 뒤척이며 속삭였건만

마른풀들 서로 몸 비비며

바람 속으로 함께 가자 하여도

제 그림자만 꾹 움켜잡고

엎드려만 있었다지.

 

설움도 외로움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 걸까

제 손 가득 씨앗들 저리 묻어두고

밤낮으로 그놈들 등 두드리며

이름도 없이, 주소도 없이

둥글게 말라가고 있었다지.

 

늙은 호박을 잡아

그 둥글고 환한 속을 본다

사리처럼 박힌

단단한 그리움.


 

9. 관계, 물들다

-솔에게

 

햇살에 잘 마른 광목이 마당 가득 펄럭이는 여기는 너의 하늘정원

꽃잎만한 어깨선 위로 채송화 은빛 씨앗 같은 눈을 뜨고

종일 달빛보다 깊은 노래 부르네.

손가락 마디마다 과자냄새, 볼에 입 맞추면 복숭아 두어 개 둥실

떠올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까르르 강물 지는 세상.

 

너의 눈썹을 타고 그 끝에서 새들 무수히 날아가고

붉은 꽃잎 따서 네 열 손가락 물들이면

손가락 끝에서 점점 커지며 자라나는 동그라미 하늘에 올라 뭉게구름 되고

나도 그 꽃잎을 따라 네게 물들거나 구름 위로 몸을 누인다.

물든다.

물든다는 거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 그 투명한 방 속에 간장 종지 같은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살림을 차리는 거라네. 그 방 속에 산을 들이고 하늘을 들여 한세상 가만히

걷는 것이야.

 

들리지 않니?

세상천지에 불 켜는 소리, 달이 둥글게 돌아 네게로 오는 소리.


 

10. 그날 이후

           -여림 시인을 기억하다

 

동네 골목 끝 헌책방에서 금방 나온 듯한 너의 유고 시집을 보았다.

어떻게 예까지 흘러왔을까? 세상은 아직 너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닌지. 외로워, 외로워 죽을 것만 같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책갈피 마다 강물의 푸른 안개로 피어나고 때로는 인사동에서 마석

가는 막차를 놓치고 난 뒤의 쓸쓸함처럼 새벽안개로 흩어지는데, 벼랑진

너의 시간은 아직도 골목 끝에서 첫사랑처럼 나를 맞고, 쓸쓸한 여인숙

방 너머에서 들리는 라디오 노랫소리처럼, 통화가 끊어진 뒤의 부재음

처럼, 네 목소리가 단음으로 들려온다.

너는 햇빛 없이도 푸르렀는데, 물기 없이도 스스로 뿌리였는데, 그 모든

푸름과 뿌리라는 게 상처였고 외로움이었다고 말하는 너를 주문처럼

속으로 읽는다. 상처로 깊어질 수 있었던 너는 정말 강물이었다. 열손

가락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 아프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오늘 내게로

와 꽃핀다. 술 취한 어둔 골목 모퉁이에서 더 이상 토해낼 것 없는 살아

가야 할 날들을 퉤퉤 뱉어내던 너의 흐려진 눈빛이 그랬을까. 네 눈 속

그 길고도 깊던 동굴이 끝없이 널 부른다고 했지. 그래서 넌 그 속으로

너를 스스로 거두어 간 것이지. 중환자실에서의 마지막 밤과 네 영정을

보던 그날 사이, 첫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수천 마리의 새떼들이 널 데

리고 갔다는 걸 사람들은 몰라. 아마도 모를거야.


11. 벽과 놀기

           -여행

 

발을 뻗어 여행을 시작한다.

아니 마주 선 순간에 이미 시작된 거다

캄캄한 속을 걸어 걸어

다시 캄캄한 속에 이를 때까지

벽 속으로의 여행은 길고 지루하지만

흔들리는 잎 하나 없지만

멈춰지지 않네

말 걸지 마라, 말 걸지 마라

그렇게만 말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기

 

벽에 사진을 걸었다. 또 다른 벽이 있는 사진, 그 사진 속으로 끝없이

중첩된 벽, 그거 알지? 사방이 벽이면 그 안은 공간이 되고, 한 세계가

되지, 갇히는 것과 보호 받는 것의 차이란 결국 집의 또 다른 이름

이기도 한, 난 아침마다 벽에 글씨를 쓴다. 벽 뒤엔 뭐가 있을까?


12. 여름 나무
13. 벽과 놀기 2
14. 바위


15. 나무 타는 법

..우선은 소곤거리듯

아주 부드러운 말로 만져주어야지,

잎들이 녹색의 알갱이를 가득 물고,

아침 햇살에 입을 다 헹구듯이

서둘지 말고 따스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다 보면

아주 조금씩 길이 열릴 거야,

그러면 그 알갱이들 사이로

네 마음을 밀어 넣어두는 거야.

 

아주 느리게

잎사귀를 둥글게 말아 쥐고

잠드는 벌레들처럼 말아야.

 

그러고는 수액의 물결을 타고

때로는 격렬하게 몸을 뒤틀어

나무 꼭대기에도 올랐다가

느리게 느리게 온 가지들 끝으로

오므리거나 풀어져내리기도 하면서

그 나무 속, 하늘로 흐르는 강을 흘러 흘러

둥둥 떠밀리거나 떠밀어 갈 수 있지.

 

..햇살에 잠겨 있는

어린 나무들의 잎사귀를 본 적 있지?

그 말았다가 펴는 손바닥의 따뜻한 피,

손가락 끝까지 흐르는 생명줄.

그런 어리고 순한 나무들을 낳는 거야,

솜털 가득한 그 눈들을 보며

그것들이 작은 숨을 쉴 때

그 숨을 나누어 마실 수 있지.

그러면 참 사는 거 같을 거야.

 


[4] 제4부

1. 공기의 집

 

공기를 기둥으로 세워 집을 지어볼까. 빈 공간 끌어다가

지붕을 얹고, 공중의 벽에 편지봉투만한 창을 달고,

지나는 바람 조금, 꽃냄새 조금 당겨와 앞마당과 뒤란을

만들고, 한 세월 말 못할 세월만큼의 깊이로 우물을 파고

식구들의 이름 붙혀 항아리도 놓아주고, 햇살 잘 드는

날에는 뒤란에서 늙으신 어머니 손등을 만지며 대숲 같은

소리로 노래라도 부를까.

 

만져지지 않는 집, 고스란히 내가 읽히는 집

잠들지 못했던 세월 이부자리로 깔아

하늘 아래 한없이 겸손한 집에서

달빛에 온몸이 오래도록 잠겨들도록 하자

이 집에 살려면 몸은 헐고, 영혼만 와야 한다네

 

내 몸 수시로 흩어져

몇은 바람 따라나서고 또 몇은

아주 당신에게 가버린대도

탱자나무 울타리 꽃 피는 봄을 꿈꾸진 않으리

햇살이 눈 찌르던 세월도 가고

내 팔로 울타리를 두르고

거기서 난 새로운 애인을 기다리지

난간을 따라 당신의 저녁을 지나온 시간이 내게 찾아

들어 느닷없는 허기에 꽃 피면

그림자와 함께 저녁 산책을 나서겠네.

만져지지 않는 시간을 밟으며

한없이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공기의 집으로 갈 것이라네.


2. 오래된 집

 

1

이 집은 낡고 오래된 악기와 같아서

소리를 냈다. 낮잠처럼 햇살이 흘러들고 나가는 마당은 깊어서, 아 너무 깊어서

깊어서 어머니 등 뒤의 세월처럼 눈물 나, 눈물 나. 배냇저고리 같은 옷을 입은 풀들,

아기들, 녹색으로 몸 물들이며 마당 가득, 피어올라, 동굴 같은 눈으로 노래 부르네,

노래 부르네. 다시 고욤나무로 돌아간 감나무 한 그루가 보낸 엽서가 마당에 가득하다.

 

2

우물가에 앉아

햇감자를 숫가락으로 긁을 때마다

공중에도 둥글게 우물이 파였다.

 

3

이젠 덜 아픈 거니?

지금 난 네 안에 있어

네 안에서 자고 싶어

달이고 달인 세월

아직 따듯하구나, 종일 햇살에 발 담근 세월아. 난 마루에 앉아 자꾸만 네게 말 걸지,

세월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저승의 세월이 이승의 세월로 꽃피는

늙음이, 낡음이, 이젠 떠나고 없음이 이리도 편안할 수 있는지

 

3. 나무젓가락

 

내가 바라본 것은 푸른 하늘과 구름, 내가 들었던 것은

반달 같은 시내를 따라 흐르고 흘렀던 결 곱던 노래들,

미루나무 온몸으로 흔들리던 그 낮은 시냇가의 낮잠

 

딱 한 끼 밥을 위해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잃어야 했던,

 

4. 패랭이꽃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꽃잎마다

살림을 차리고 살지,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을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 간다지

저이들을 봐, 꽃잎들의 몸을 열고 닫는 싸리문 사이로

샘물 같은 웃음과 길끝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 보이잖아,

해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복 자 새겨진 밥그릇을

앞에 둔 가장의 모습, 얼마나 늠름하신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5. 마포 공제회관에서 한겨레신문사까지
6. 여름 산에서 잠들다

7. 달

 

달이 뜨면

나무들의 속 살림살이가 환하게 다 보여

간장 종지 같은 밥그릇들과

낡은 신발 몇 켤레

아린 속 씨앗처럼 단단한 속잎들의 몸

그 몸에서 자라나는 어금니 같은 세월

둥글게 감아올린 달의 역사

환하다

 

8. 달의 집

 

아직도 누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저 달 저리 환하게 문을 열어두고 댓돌 위 작은

신발 몇 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오늘은 누가 달을 저 하늘로 밀어올렸을까, 눈물 얼룩마저 지우지 못하고 구름 속에서 들어기버리는 세월을


9. 꼭지

잎 진 자리

씨앗이 한 생을 마무리 하고 떠나간 자리

떠난 것들의 아주 오래된 그리움과

속으로

 

깊디 깊은 연못

 

거기서 놀던

수천 수만의 물고기

지금 어디서 지느러미 쉬고 있는가

 

그 연못 속으로 오랫동안 몸 부딪혀 오는 잔물결 같은

검은 연못.

 

10. 내가 바라보는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에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11. 집, 난곡동에서 길을 잃다

 

꽃잎 하나마다 집 한채씩 들어 있다.

꽃잎들이 골목길로 다투어 피어나던 그해 봄

가장들은 아침이면 집을 나가 강물을 따라 멀리멀리

흘러갔다, 몇몇은 흘러가서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꽃잎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거나

꽃잎을 갉아먹었다, 뱉어냈다, 토했다.

저녁이면, 닳아진 문지방까지 잔물결이 스며들어 울었다.

물결, 그 흔적들이 층층이 쌓여갈 동안

씨앗들은 익어갔고,

꽃이 지면 물결무늬만 남아 산을 이루고

골목 끝으로 달이 올라왔다.

산 속 깊이 씨앗이 감춰둔 기억들이 비를 맞는다

비를 맞으며 입술을 깨무는 씨앗들

난곡에서 길을 잃는다.


12. 라일락 피는 그 집

1

철야를 하고 돌아온 아내의 어깨 위에 라일락 꽃잎 같은 흰 새벽이 묻어 있었다. 라일락 피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더니 밤새 그 꿈에 울었나보다. 밤새 그 집 담벼락에 몸 부딪혔나보다. 안지 않아도, 바라보지 않아도 쓸쓸하게 눈물 나는 가라앉은 그 어깨에 손을 얹는다. 단단하게 만져지는 허공 속으로 아직도 밤길이 깊고 깊기만 하여.

 

2

내 마음 쓰러져 오래 묻히면 여기서도 씨눈이 생길까, 뿌리로만 자라기엔 이 불 같은 그리움이 커, 빈집을 지키는 날들이 길어지고 라디오에서 시작된 캘리포니아 드림이 온 방을 안개처럼 적셔왔다. 너의 목젖 너머로 숨막히는 상처가 자꾸 손 내밀 때 비행기 한 대가 창 왼쪽에서 떠올랐다. 옥탑 아래로 무수히 집어 던진 종이배들은 지금 어느 복숭아밭에서 떠다니는지, 또 어떤 배후로 자라는지.

 

3

보이지 않지만 만져지는 것들이 있다면 거기는 이미 제 안으로 심어진 씨앗들이 꽃 피지 못하고 짓물러 짓물러 저녁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날마다 벼랑인 삶도 내딛기만 하면 바닥을 딛고서라도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4

아내가 돌아오려면 다시 이 밤이 지나야 한다.


13. 푸른 연꽃

 

14. 당신

 

당신 가슴에 붉은 알전구 두 개

해질녘 햇살에 비친 감처럼 붉디붉어

거기에 내 젖니 깊게 박아두고

한세월 살았으면 좋겠네

 

당신 가슴에 붉은 알전구 두 개

불 켜진 옛집

탱자나무 울타리 늙어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 언젠가 당신 가슴에 흰 등을 내어 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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