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그마니네 / 고 은
갈뫼 딸그마니네집
딸 셋 낳고
덕순이
복순이
길순이 셋 낳고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딸그마니 아버지 홧술 먹고 와서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산후 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 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삭은 울바자 따 쓰러뜨리고 나서야
엉엉엉 우는구나 장관이구나
그러나 딸그마니네 집 고추장맛 하나
어찌 그리 기막히게 단지
남원 순창에서도 고추장 담는 법 배우러 온다지
그 집 알뜰살뜰 장독대
고추장독 뚜껑에
늦가을 하늘 채우던 고추잠자리
그 중의 두서너 마리 따로 와서 앉아 있네
그 집 고추장은 고추잠자리하고
딸그마니 어머니하고 함께 담는다고
동네 아낙들 물 길러 와서 입맛 다시며 주고받네
그러던 어느 날 뒤안 대밭으로 순철이 어머니 몰래 들어가
그 집 고추장 한 대접 떠가다가
목물하는 그 집 딸 덕순이 육덕에 탄복하여
아이고 순철아 너 동네장가로 덕순이 데려다 살아라
세상에는 그런 년 흐벅진 년 처음 보았구나
재철이 어머니 / 고 은
재철이 어머니는
죽산서 시집 와서
뜬 20년
아수룩아수룩
아들 셋 쪼르르 나서
내년이면 큰놈이 공주사대에 갈지도 모르니
치통도 좀 수그러져야지
20년 동안
땡볕에 농사짓느라
낭떠러지 자식 짓느라
열 바가지가 플라스틱 바가지 되어
기껏해야 60리 길 친정 한번도 못간 세월
사발농사 안 지으려고
평택장은 고사하고
친정 한번 못간 세월
이내 발밑 꿩 날으듯이
친정 아버지 어머니
세상이나 떠나야 그때나 부랴부랴
20년 전 새색시로 흰 머리 풀고 울며 가야지
가사메댁 / 고 은
새터 두희봉이 마누라 가사메댁은
울음소리 청승맞기로 으뜸이어요
남원 운봉 지리산 물소리 받아왔다지요
그 울음소리 옆에서는
절구통도 절구공이도 따라 울게 되어요
한규 할아버지의 꼬부랑 자당께서
그 좁쌀여우 뒷호강하더니
여든여섯에 세상 떠났는데
고씨네 사촌 육촌 팔촌 아낙 가운데
울음소리 하나 변변한 것 없어서
한규 할아버지 끌끌 혀를 찼지요
할 수 살 수 없이
가사메댁 보리 한 말 주고 사다가 울었어요
그 울음소리
그 사설 풀어나가는 울음소리 판소리
꼬부랑 자당 한평생을
산등성이 기어 오르다가 내려 오다가
갖은 양념 청승고개 다 떨어 엮어내려가는데
그 울음소리 판소리
큰 초상 난 집 마당 한번 오젓 짭짤하구나
쌍례네 / 고 은
딸만 아홉에다가
슬슬 계명워리짓도 해
어느 놈은
딴 서방 소생이기도 하지만
다 본서방 성 받아
어엿이 임금 왕자 왕씨 딸들이라
그러나 딸부자가
어디 부자인가
태어난 코맹맹이 소리로
멸치젓 사아
갈치젓 사아
자하젓 사아
환갑 회갑 넘어서도
멸치젓 사아
새우젓 사아
갈치속젓 사아
이 세상 사는 일이
젓 이고 다니며 파는 일이요
젊어서는 사잇서방질도 더러 하는 일이요
가을 하는 푸르건만
그 푸른 것이 무슨 까닭이겠는가
쌍례네야
하늘 모른다
구름 모른다
젓냄새밖에 낼 줄 모르는 쌍례네
달 밝은 밤에도
한숨 모른다
노여워 욕사발 퍼부으면 퍼부었지
한숨 따위 모른다
그것 하나 기막힌 힘이라
밤새 달빛 저 혼자 부서진다
딸년들 제 힘으로 시집갈 년은 가고
못 가는 년은 못 가
집이나 보거라
집 보다가 나가고 싶거든 나가거라
고은이 '만인보'를 구상한 것은 1980년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남한산성 아래에 있는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라고 합니다. 고독한 감방 안에서 고향땅과 거기서 만난 사람들을 회상하면서, 감옥에서 나가면 그들의 삶을 시로 써서 되살리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머슴 대길이, 딸그마니네, 옥정골 철곤이 같은 무지렁이들의 삶이야말로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온 힘의 원천임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겁니다.
‘만인보(萬人譜)’라는 제목처럼 만 명의 사람들을 시로 다루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출발한 이 연작시는 1986년에 처음으로 1,2,3권을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23권째가 출간되었습니다. 애초 구상대로 만 명을 채우지는 못하지만 30권으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그때까지 약 4,000명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다룰 계획이라고 합니다.
『만인보』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의 역사를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유명 정치인 등이 끼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밑바닥 인생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끈질기면서도 건강한 생명력이 넘쳐나며, 위 시에 나오는 ‘쌍례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남자와 몸을 섞는 행위는 도덕관념으로만 보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겠지만, 쌍례네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도덕군자인 척하는 양반 가문 출신들이 오히려 뒷구멍으로 온갖 추잡한 짓을 다하고 다니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쌍례네가 계명워리짓을 좀 했기로서니 누가 감히 나서서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향한 그런 보짱(마음속에 품은 꿋꿋한 생각이나 요량)을 갖추고 차라리 욕사발을 퍼부을망정 ‘한숨 따위 모’르는 쌍례네의 ‘기막힌 힘’이 딸 아홉을 건사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계명워리’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정확한 유래를 밝혀놓은 문헌은 없지만, 추측컨대 기생 이름에 계월이니 명월이니 하는 이름이 많다 보니 계월이 명월이를 이어 부르다가 생긴 말이 아닐까 합니다. 몸을 파는 기생과 같은 부류의 여자라는 뜻이지요. 이인직의 『은세계』라는 신소설에 ‘본평부인이 실진이 되야셔 제명오리갓치 되얏더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 나오는 제명오리의 원말이 계명워리입니다.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들이 많습니다. '논다니'와 '은근짜'는 몰래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며, 서방질을 잘하는 계집종을 가리켜 '통지기'라고 합니다.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고 쪽을 찐 여자를 '외대머리'라고 하는데, 기생이나 몸을 파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조와 관련해서 여자에게는 엄격하고 남자에게는 너그러운 편인데, 그런 관념 때문에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들이 많이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행위를 해도 남자와 여자를 갈라서 판단하는 그릇된 습성 같은 건 이제 버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박일환의 '숨어 있는 우리말 사전'
1961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7년 장훈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 8월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가 1994년 3월 삼선중학교로 복직했다. 이후 오류중학교, 구일중학교를 거쳐 지금은 오남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1997년에 계간지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푸른 삼각뿔』, 『끊어진 현』, 시 해설집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용악』을 펴냈다.
세노야 세노야 / 고은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만순이 / 고 은
얼굴에 참깨 들깨 쏟아져
주근깨 자욱했는데
그래도 눈썹 좋고 눈동자 좋아
산들바람 일었는데
물에 떨어진 그림자 하구선
천하절색이었는데
일제 말기 아주까리 열매 따다 바치다가
머리에 히노마루 띠 매고
정신대 되어 떠났다
비행기 꼬랑지 만드는 공장에 돈벌러 간다고
미제부락 애국부인단 여편네가 데려갔다
일장기 날리며 갔다
만순이네 집에는
허허 면장이 보낸 청주 한 병과
쌀 배급표 한 장이 왔다
허허 이 무슨 팔자 고치는 판인가
그러나 해방되어 다 돌아와도
만순이 하나 소식 없다
백도라지꽃 피는데
쓰르라미 우는데
* 참깨 들깨 : 주근깨
* 산들바람 일었는데 : 가슴 설레게 했는데
* 히노마루 : 일장기
* 정신대 : 종군 위안부(일제 폭력에 희생된 삶)
* 비행기 꼬랑지 - 간다고 : 위안부오 데려가려는 감언이설
* 애국 부인단 여편네 : 친일 앞잡이
* 만순이 : 일제 말기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 상징 / 민족 비극의 상징
* 허허 : 어이 없는 탄식
* 허허 이 무슨 팔자 고치는 판인가 : 반어적 표현(만순이에 대한 연민)
* 쓰르라미 우는데 : 슬픔의 감정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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