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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겨울 - 정양

by kimeunjoo 2011. 1. 10.

 

 

 

 

 

 

겨울 / 정양

 

이 겨울

눈 내리는 들판은 더

넓어지고 있을 것이다.

빈 들에 사무치는 아우성으로

바람소리는 파랗게

날이 서고 있을 것이다.

 

목숨이란 어차피

천벌인 것을

백성들이 갈수록

천해진다 쿨룩거리며

사랑채는 겨울밤이 더

길어질 것이다.

 

대처로 떠나 잘된 이들도

갈수록 천해져서 떠돌고

이 겨울 고향 강물은

더 깊어지고 있을 것이다.

 

 

 

첫 눈 / 정양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

 

 

 

눈길 /  정양

 

흐린 하늘 밑

들 건너 마을이 자꾸 멀어 보인다

눈에 묻힌 길은 아예 잃어버렸다

들판을 무작정 가로지른다

발목이 아무 데나 푹푹 빠진다

 

잃어버린 길 위에 까마귀 떼

까마귀 떼도 길을 잃었나보다

어디로 날아가지도 않고

눈밭에 우두커니들 서 있거나

느릿느릿 서성거린다

 

길이 보여도 길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고

길이란 잃어버리려고 있는 거라고

구구구구 두런거리며 눈 덮인 들판을

조금씩 비껴주는 까마귀 떼

 

들끓는 검은 피에 취하여

차라리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여는 까마귀를 따라간다

또 눈이 오려는지

먼 마을 연기가 낮게 깔린다

 

 

 

 

눈 오는 날 / 정양

 

낮잠을 자다가

잘못 걸린 전화를 받는다

무슨 지랄로 집구석에만 자빠졌느냐

나잇살이나 넉넉히 들어 보이는

술 취한 목소리가

해라쪼로 나를 당장 나오라고 한다

여기는 군산집, 세상에는 지금

눈이 쌓였다고 한다 눈이

펑펑펑펑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펑펑펑펑 쏟아지던

그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금방 찾아낼 것 같은 그 목소리는

눈 내리는 군산집은, 눈 내리는

이 도시의 어디쯤이냐

술 취한 눈을 맞으며

기웃거리는 골목길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해라쪼로 자꾸만 눈이 내렸다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창비시선 )

 


 

 

 

저자 소개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천정을 보며」 당선.
19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동심의 신화」 당선.
1980년 첫시집 『까마귀 떼』 간행.
1984년 시집 『수수깡을 씹으며』 간행.
1993년 시집 『빈집의 꿈』 간행.
1997년 시집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창작과비평사) 간행.
현재 우석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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