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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향기/♣ 영상시

붉은 여우 / 손수진

by kimeunjoo 2011. 1. 10.

 

 

 

 

 

 

 

 

붉은 여우 / 손수진

 

 

늦은 밤 달이 뜨면

지붕으로 올라가 아무도 몰래

아-우, 아-우, 켕 켕

 

보퉁이 하나 부둥켜안고 기차를 탔네

한 달 월급 사천 원

아저씨는 습관처럼 훼스탈을 먹고

아줌마도 매일 밤 크림을 한 움큼씩 덜어내어

주름진 목에 번들번들 문질렀네

흑백 티브이에선 김창숙이 한복 밑에 꼬리를 감춘 채

담 위에 올라앉아 둔갑을 했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먹으로 틀어막았지만

실금간 항아리처럼 삐질삐질 소금기가 새어 나왔네

 

그 집에는 여우가 세 마리나 살았지만

아무도 그들이 여우인지 눈치 채지 못했네

다만 여우가 여우를 알아볼 뿐

그들은 새로운 여우를

동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계의 빛을 감추지 않았네

가끔 늙은 개가 은근한 눈길로

등 뒤에서 몸을 비비며 노는 걸 좋아했고

어린 여우는 기대에 부응하며

 

달이 뜨면 지붕으로 올라가

목을 길게 뽑고

달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아-우, 아-우, 켕 켕

 

 

 

 

그 여자가 사는 법 / 손수진 

 

콩밭을 메다가

나뭇가지 주워

땅바닥에 시를 쓰네

 

검푸르게 약 오른 무논에 피 뽑다가

물위에 떠 있는 개구리밥 밀어내고

손가락으로 시를 쓰네

 

"그놈은 잘 있을까"

 

구름에게 말을 거네

햇살에 반짝이던 포플러 이파리가

일제히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네

 

 

 

놋요강에 핀 목단 / 손수진

 

 

봄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던 어머니가

명아주 지팡이를 잡고 뒤뚱뒤뚱 걸어가

목단꽃 무더기 앞에 오래 앉아 계시더니

뭉텅뭉텅 한 아름 꽃 꺾어 놓고

집 안팎을 몇 바퀴 돌아

무슨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얼굴 가득 홍조를 띠우더니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헛간에 처박아둔 지 오래된 놋요강 들고 나와

수돗가에 앉아 오래 문질러 닦으신다

반짝이는 놋요강에 붉은 목단꽃 꽂아 안고

발그레 꽃처럼 웃으시며

야야, 이쁘쟈?

저 환장할 빛깔 때문에 모다 꺾어 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꽂을 데가 있어야제

나야 이제 꽃필 일 없으니 니 방에 놓아 둬라

 

 

 

알고 있니? / 손수진

 

푸른 달빛이 거무스레 약 오른 양파밭을 비추면

젖꼭지가 탱탱하게 긴장되는 거

알고 있니?

반쯤 드러난 고환 같은 뿌리 중심을 뚫고

뻣뻣하게 고개 쳐들고 달빛의 애무를 받고 섰는 둥근 씨방을 지나

뽑힐지언정 결코 굽히지 않는 저 푸르고 매운 근성을

알고 있니?

발에 신을 벗고 속치마도 걷어 올리고 천천히 달빛을 향해 걸으면

발가락 끝에서 아랫도리로 전해지는 둥글고 묵직한 전율에

입안 가득 풋살구 같은 침이 고이는 거

알고 있니?

젖은 대궁, 툭툭 장난스레 건드려

쏟아지는 수천 개의 까만 씨앗을 내 속에 심고

가슴 뻐근한 젖몸살이라도 앓고 싶은 거

너, 알고 있니?

 

 

 

나팔꽃 / 손수진

 

밤마다 이슬 밟고 다닌다는 소문, 달고 사는 여자를

낮이면 풀이 죽고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는 숫기 없는 그 여자를

어느 별 총총한 밤

숨어서 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요

쓰르라미 우는 언덕을 지나

송전탑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보르르한 콩꽃 같은 신발, 이름 없는 묘 옆에 벗어 놓고

글쎄 송전탑을 기어오르지 않겠어요 말릴 겨를도 없이

차가운 철탑을 움켜잡은 손가락이 얼마나 바들바들 떨리던지

하마터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끌어내릴 뻔했지 뭐겠어요

그녀는 밤새 철탑을 감고 오르더니

새벽이 되자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세상에, 어디에 그런 뜨거운 것을 숨기고 살았는지

몸에서 환한 꽃을 저 혼자 피우고 있었는데요

햐!

만일 피 뜨거운 사내였으면 어쩔 뻔했겠어요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을 사내도 될 수없는 나는

동트기 전 서둘러 갔던 걸음 되짚어 돌아와

지난밤 일을 함구하고 있는데요

자꾸만 입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지 뭐겠어요

 

 

 

흑산도 아가씨 / 손수진

 

콤콤한 홍어냄새 나는

그늘 많은 작부와

앉은뱅이 상다리를 두드리던 밤

파도는 가까이에서 오래 울었다고

너의 취한 목소리는 한층 더 젖어,

다시 가지 그러냐는 물음에

섬은 이미 사라지고

늙은 작부도 사라진지 오래고

육지에서 밀려간 섬 아가씨

발톱에 칠한 메니큐어는

동백꽃보다 더 붉더라고

엉뎅이 큰 작부를 닮은 가을 달이

철석거리며 비릿한 수작을 거는

방파제에 퍼질러 앉아 우리는

흑산도아가씨를 부르며 오래도록 소주를 마셨다.

 

 

 

 

 

 

손수진씨 첫 시집「붉은 여우」발간

가볍게 읽고 가슴으로 느끼는 작품 50여편 수록

 

2010년 07월 10일

 

 

지역에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손수진 씨가 처녀시집「붉은 여우」를 발간했다.

 

손 시인의 처녀시집「붉은 여우」(한국문연, 가격 7000원)는 50여편의 서정적 작품들이 누구나 가볍게 읽고 가슴으로 느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송수권 시인(순천대 명예교수)은 손씨의 시 세계에 대해“시편마다 주는 그의 메시지는 강렬하면서도 시적 아우라는 전통성을 지향하고 있다”며“현실을 뛰어 넘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가 꿈꾸었던 세계로 그 물주기를 터주고 있다”고 말했다.

 

허형만 시인(목포대 교수)은“신인이면서도 신인답지 않는 왕성한 작품 발표와 치열한 시정신으로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며“이번 첫 시집은 한국의 서정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시인으로서의 시적 경험이 어떻게 변용되어야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인지를 심도 깊게 보여주는 명쾌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2005년「시와 사람」으로 등단한 손 시인은 현재 무안문화원에서 근무 중이며,‘살아 있는 시’·‘시목’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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