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 이기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 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本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 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에 대하여 / 이기철
아서라, 너는 왜 노란색에다 네 잠언을 매달려고 하느냐
누가 검정 색은 어둠이라고, 붉은색은 열정이라고 말했느냐
오늘 다음 올 날을 내일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누구냐
누가 네 침대에 함께 자는 사람을 아내라고 말했느냐
아서라, 너는 왜 세상을 네 말의 상자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시라고 말하느냐
소년이 아이를 낳으면 왜 안 되느냐
뿌리가 하늘을 쳐다보면, 새가 거꾸로 날면 왜 안 되느냐
들판에는 가끔 오는 편지처럼
가끔 피는 꽃
장롱의 성은 남성이냐 여성이냐, 집의 내역을 잘 알면서도
장롱은 왜 온종일 함구해야 하느냐
풀들이 자아도취의 꽃을 피울 때 흙들이 내는 소리를 너는 듣느냐
아서라, 수요일은 왜 한 주일에 두 번 오면 안 되느냐
그만 먹어라,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음악을
단층은 너무 단정해 눕기가 거북해
발들을 이 층으로 길어 올리는 계단은 그래서 바빠
주문처럼 불길한 말은 쓰지마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타성이 와
봄이 일찍 떠나면 나무의 눈물이 보여
그 때 너는 무슨 자세로 돌 위에 앉을래?
삼동(三冬)편지 / 이기철
아무에게도 편지 않고 석 달을 지냈습니다 내 디딘 발자국이 나를 버리고 저 혼자 적멸에 들었나 봅니다 그간 마음에 서까래를 걸고 춘풍루 한 채를 지었다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이른다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그 깊은 골짜기에 내려서지 않으면 어찌 먼지 낀 세간이 보이겠습니까 전화가 울릴 때마다 귀는 함박꽃 같이 열렬했지만 마음의 회초리 열 번 쳐 세상의 풍문에 등 돌렸습니다 법어(法語)를 읽다 주장자(柱杖子)를 부러뜨린 선승이 계신다구요
물소리를 가르고 그 속에 뼈를 세우기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기와 같다구요 세상이 날려보내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마다 자갈돌 쌓아 올려 석탑을 이루는 석공의 인고를 생각했습니다 오래 소식 주지 마셔요
깊을 대로 깊은 병이 암을 지나 보석이 될 때가 오면 햇빛같이 사실적인 편지 드리겠습니다
자꾸만 인생무상이라고 쓰려는 마음을 꾸짖으며 추운 가지에 둥지 튼 새를 쳐다봅니다 또 소식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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